“발굴된 것들에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거대한 영토를 통치하는 위대한 통일왕국에 대한 여하한 증거는 없다. 다윗왕의 예루살렘은 당시 빈촌에 불과했다.”
2000년 7월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 ‘역사로서의 성서, 새로운 고고학적 시험에서 낙제’라는 제목의 기사는 이스라엘 메기도(성서의 아마겟돈)에서 고고학 발굴을 수행한 텔아비브대학 고고학연구소장인 이스라엘 핑켈스타인의 말을 이렇게 전했다. 기사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고학 발굴이 진행되면서, 역사적 사실로 공인됐던 성서 기록이 허구로 밝혀졌다는 고고학계 주장을 담았다. 성서를 역사서와 동일시하는 미국의 많은 복음주의 신자에게는 충격이었다.
고고학적 발굴로 성서 기록의 진위를 분석한 핑켈스타인의 저서 <발굴된 성서>를 보면, 이스라엘은 기존 가나안 부족에서 기원했다고 돼 있다. 성서에 기록된 모세의 엑소더스,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정복은 허구라고 그는 단언한다. 시나이반도에서 유프라테스강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다윗과 솔로몬 왕의 이스라엘 통일왕국과 그들의 수도 예루살렘의 영화 역시 없었다고 주장한다. 다윗 왕국은 팔레스타인 남부 산악지대 조그만 부족국가의 군장 정도였고, 예루살렘은 빈한한 산촌이었다고 핑겔스타인은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한다. 앞선 고고학 발굴에서 솔로몬 시대 영화를 방증한다는 왕궁터 등은 몇백 년 뒤인 북이스라엘 왕국 시대의 건물이라는 것이다.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핑켈스타인은 <뉴욕타임스>에 자신의 연구 결론이 “아주 강력한 부정적” 반응을 받았다고 했다. “분노가 (단순히 우리를 무시하는) 엄격한 정통파 유대교도에서 나온 게 아니라,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상징적 가치로 성서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더 많은 세속적 유대인들로부터 나왔다.” 이들이 성서의 ‘역사적 진실’에서 현대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을 찾는 이데올로기 작업을 벌여왔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야훼의 부름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가고, 그 후손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가나안 땅을 약속받고, 후손인 모세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탈출시키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다윗이 이스라엘 통일왕국을 건설해 솔로몬이 그 영화를 일구고, 이스라엘 민족이 야훼의 가르침을 어겨 바빌론 유수 등을 시작으로 그 땅에서 쫓겨나 2천 년을 방랑했다는 것이 성서의 서사다. 그렇게 방랑했던 유대인이 이제 팔레스타인에 돌아와 이스라엘을 다시 건국한 것은 애초 야훼가 그들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을 회복한 것이다. 이는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지상에서 구현되리라는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다.
근대 들어 이성과 합리주의가 신을 부정하자, 성서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성서의 무대인 팔레스타인 땅에서 근대과학인 고고학을 적용해, 성서 내용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려는 ‘성서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나온 배경이다. 성서고고학 탐사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미국 복음주의 교단과 그 목회자들이 주로 진행했다. 이들에게 고고학 탐사란 예단 없이 작업하고 나서 해석을 내리는 과정이 아니었다. 성서 기록을 실증하겠다는 목적 아래 발굴품을 예단에 끼워 맞추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모든 발굴 성과는 성서 내용으로 수렴됐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의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 교수가 성서고고학을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독실한 신자인 그는 1920년대부터 팔레스타인에서 고고학 발굴을 하며 성서고고학 연대기를 확립했다. 그는 “성서는 역사적 관점에서 본질적으로 옳고, 고고학은 이를 증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의 제자들인 조지 라이트, 존 브라이트 등은 성서고고학과 이스라엘 고대사의 주류 고전학파가 되고 성서 기록을 역사적 텍스트로 최대한 수용하는 ‘맥시멀리스트’를 형성한다. 존 브라이트의 저서 <이스라엘 역사>는 한국에서도 이스라엘 고대사의 표준 교과서로 여전히 원용된다.
대표적 주장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복설’이다. 이는 성서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을 간접적으로 실증하는 작업이었다. 올브라이트는 <석기시대에서 기독교까지>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은 채, 가나안 전 지역의 망을 파괴하고 정복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무자비한 정복이 “앞으로 있을 유일신 사상 측면에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가나안 사람들을 전멸함으로써 유사한 두 집단의 결합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도 했다. “역겨운 신화로 가득한 가나안 사람들은 (…) 순결한 삶과 그 숭고한 유일신 신앙, 그리고 엄격한 윤리 의식을 가진 이스라엘에 의해 대체돼야 마땅하다”고 이유를 들었다.
올브라이트는 대표 저서 <팔레스타인 고고학과 성서>에서 성서 기록 실증을 아브라함까지 밀어붙였다. 그는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시기를 기원전 20세기 혹은 19세기로 추정하고, 그의 손자 야곱 가족의 이집트 이주는 기원전 18세기 혹은 17세기로 손쉽게 비정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하조르에서 발굴된 고대 아치형 건조물과 마구간들은 솔로몬 왕위 때 것이라고 단언하며, “솔로몬 시대는 확실히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물질문명이 가장 번성한 시기 중 하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역사성,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다윗과 솔로몬의 영화로운 통일왕국을 ‘실증’한 올브라이트의 성과는 1950년대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건국 직후 현대 이스라엘에 더없는 건국 이데올로기의 황금밭이었다. 이스라엘은 올브라이트의 성과를 바탕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이를 수행한 사람이 건국 직후 참모총장을 지낸 이가엘 야딘이다. 고고학자 아버지를 둔 야딘은 퇴역한 뒤 고고학을 전공하고 벤구리온 정부의 국가적 차원 고고학 프로젝트를 맡았다. 1950년대와 60년대 그가 지휘한 고고학 발굴에서 나온 도기, 무기, 구조물, 예술품, 무덤은 모두 아브라함 등 ‘족장의 시대’ ‘엑소더스’ ‘가나안 정복’ ‘이스라엘 부족 영토 범위’ 등에 관한 틀림없는 증거로서 모두 제출됐다.
1964년 텔아비브대학 요하난 아하로니가 펴낸 <성서의 지도>는 이런 고고학적 성과의 대중적 결정판이었다. 모든 주요한 성서 인물들의 움직임과 사건을 고대 이스라엘 지도에 일목요연하게 그려놓았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유랑부터 솔로몬의 교역로까지 망라된 이 책은, 당시까지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빼곡히 채워넣었다. 현대 이스라엘 건국은 과거 엑소더스에 이은 가나안 땅의 정복이 재현된 것으로 해석했다. 1960년 제작된 폴 뉴먼 주연의 할리우드 영화 <엑소더스>가 그 결정체다. 이 영화는 유럽에서의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땅으로 입성한 현대 이스라엘 건국자들(시오니스트)의 서사시를 담았다. 미국이 시오니즘과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했다.
1967년 육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점령은 기대와 달리 주류 성서고고학계를 형해화하는 출발점이 됐다. 이때부터 등장한 2세대 고고학자들은 예루살렘 등에서 고고학 탐사를 예단 없이 하려 했다. 그 결과는 성서고고학의 기존 주류 고전학파가 펼치는 대부분 주장과 학설이 붕괴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주류 고전학파가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주장하는 열쇠였던 가나안 정복설은 이미 20세기 초기부터 독일 알트-노트 학파의 도전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알트와 제자 마르틴 노트는 이스라엘 기원은 평화적인 이주에 있다고 주장했다. 1979년 미국 뉴욕신학대학의 노먼 갓월드가 <야훼의 부족들>에서 이스라엘 기원은 내부 봉기에 있다는 내부 기원설을 내놓으면서, 주류 고전학파의 정복설은 무너졌다. 2000년 전후 핑켈스타인 등 고고학자들은 결국 주류 고전학파의 아브라함 역사성, 이스라엘 정복설, 솔로몬 통일왕국 등 기존 학설을 거의 무력화했다.
“1960년대까지 작성된 고고학적 근거는 벧엘, 라기스, 하솔과 같은 장소들이 기원전 13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에 있었던 가나안의 외부인 침략에 의한 대규모 전쟁 상황과 잘 들어맞는 것처럼 보여줬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이지 않겠는가?’ (이렇게 학자들은) 성서를 유리하게 해석해왔다.”(<이스라엘의 기원>, 삼인) 성서 기록의 역사성을 놓고 핑켈스타인과 논쟁을 벌인 윌리엄 데버 같은 주류 고전학파 역시 이를 인정한다.
결국 성서 논쟁으로 비화했다. 성서란 사료적 가치는 없고, 작성됐을 때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허구라고 주장하는 ‘미니멀리스트’가 덴마크 코펜하겐대학을 중심으로 등장했다. 이미 19세기 말 독일 성서문헌학자들이 성서는 아브라함·모세·여호수아 등이 활약하던 때가 아니라 일러야 기원전 10세기 초반 처음 기록됐고, 수백 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작성되고 편집됐다는 ‘문서 가설’을 주장했다. 19세기 말 독일 율리우스 벨하우젠이 체계화한 문서 가설은 성서는 작성됐던 시대 상황과 그 시대적 필요성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핑켈스타인은 <발굴된 성서>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성서가 만들어진 세계는 위대한 도시들과 성스러운 영웅들의 신화적 영역이 아니라, 백성들이 전쟁·가난·불의·질병·기근·가뭄 등 모든 인간의 공포에 맞서 그들의 미래를 위해 고투하던 작고 세속적인 왕국이었다.” 그는 기원전 7세기 남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 왕 때 정치 프로파간다(선전) 작업으로 성서가 쓰였다고 주장했다. 당시 아시리아에 이은 바빌로니아제국의 위협 앞에 북이스라엘 왕국이 멸망하는 등 남유다는 바람 앞 촛불 같은 운명이었다. 야훼 일신교를 중심으로 개혁과 왕권을 강화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는 차원에서 성서가 만들어졌다고 분석한다. 야훼가 선택한 민족 이스라엘에 약속한 통일왕국과 영화를 다윗과 솔로몬이 이뤄냈고, 이들의 후손인 남유다 왕가가 이스라엘 정통성을 가졌다는 걸 보여줄 목적이었다. 국력에서 북이스라엘 왕국보다 훨씬 뒤처졌으나 간신히 살아남은 남유다가 북이스라엘 유민과 그 영역을 통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성서가 언제 어떻게 왜 만들어졌는지는 유대인과 유대교, 이스라엘을 둘러싼 신화와 오해를 푸는 시작점이 될 수밖에 없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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