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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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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시작은 ‘궁정 유대인’이었다

스페인 추방령이 유대인 네트워크의 확장으로 이어져…
네덜란드 궁정 재정과 군수조달 책임지는 특권층으로 자리잡으면서 ‘음모론’ 피어나
등록 2021-03-13 09:20 수정 2021-03-15 01:49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가 처형당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위키피디아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가 처형당하는 장면이 그려져있다. 위키피디아

유대인 문제를 둘러싼 핵심인 유대인 음모론은 근대 이후 유럽 각국 궁정의 재정을 주무르던 ‘궁정 유대인’에서 비롯됐다. 이들의 영향력과 이들에 대한 시기는 ‘돈만 밝히는 탐욕스러운 유대인’ ‘세상일을 배후에서 조작하는 유대인’이라는 유대인 음모론을 피어나게 했다.

교회 주교까지 된 스페인의 개종자

궁정 유대인은 네덜란드 유대인에게서 비롯했다. 17세기 초부터 네덜란드가 유럽의 금은괴·자금 시장으로 성장했다. 네덜란드 유대인이 선두에 서서 각국 궁정을 대리하는 경화 매매를 주도했다. 이들에게서 상품을 받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들도 금·은 등 귀금속을 취급하는 선도적인 상인으로 떠올랐다. 그 결과 유대인이 궁정 재정을 쥐락펴락하게 된다.

1581년 독립 선언으로 가톨릭의 스페인에서 독립한 신교의 네덜란드(네덜란드 7개주 연합공화국)는 1609년 종교 자유를 선포했다. 스페인 왕국이 있는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된 세파르디(지중해 지역 유대인)가 네덜란드로 흘러 들어왔다. 이들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로운 거주를 누리며, 네덜란드나 유대인 모두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이 네덜란드로 오게 된 배경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세계로 복원하는 레콘키스타(Reconquista)를 완료한 스페인 왕국이 1492년 선포한 유대인 추방령 때문이었다. 이베리아의 무슬림 왕조에서 유대인은 외교·행정·교역에 종사했다. 이베리아 세파르디는 지중해 지역 유대인 네트워크의 핵심으로, 유대인 커넥션의 원조라 할 수 있다.

11세기부터 레콘키스타가 진행되면서, 유대인은 기독교 왕국에서 교역·행정·학문을 위해 필요한 존재이면서도 종교적 정통성을 흐리는 존재였다. 개종운동이 시작돼, 많은 유대인이 기독교도로 개종했다. 이들을 콘베르소(Converso·개종자)라고 불렀다. 적잖은 콘베르소가 생존과 성공을 위해 겉으로만 개종했다. 이들은 유대인 사이에서 ‘마라노’(Marrano)라고 불렸는데 ‘돼지’ 혹은 ‘돼지 새끼’라는 뜻이다.

콘베르소는 상업과 교역은 물론이고 권력의 자리까지 나아갔고, 교회의 주교나 추기경이 되기도 했다. 레콘키스타가 완료된 15세기 말, 콘베르소는 골칫거리가 돼버렸다. 특히 교회가 불안해져 이들은 이단 종교재판에 회부됐다. 이른바 ‘마라노 이단’이었다.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도 문제였다. 종교재판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1492년 스페인은 유대인 추방령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유대인 15만 명 가운데 10만 명이 떠나거나 죽었다. 나머지 5만 명은 체류 대가를 지급하고, 기독교도로 개종한 뒤 잔류했다. 남은 유대인은 대부분 돈 많은 상류층이었다. 이들 콘베르소는 스페인에서 계속 상업과 교역의 중심 세력으로 일했다.

잠존 베르트하이머 초상화. 오스트리아 유대인 박물관 누리집

잠존 베르트하이머 초상화. 오스트리아 유대인 박물관 누리집

유대인 상인에게 외교적 보호 제공

유대인 추방령이 발표되던 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해 스페인은 유럽 최강국으로 부상한다. 신대륙의 금과 은이 흘러들었고, 교역이 활성화됐다. 이는 유럽 전역에서 중상주의를 발흥시켰다. 종교가 아니라, 무기를 사고 병사를 부릴 수 있는 금과 은이라는 돈이 더 중요했다. 스페인의 유대인, 즉 콘베르소가 다시 큰 역할을 했다. 콘베르소는 기존 교역 네트워크에 신대륙을 추가했다.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 중 일부가 카리브해 서인도제도와 남미로 가서 유대인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스페인에 이어 포르투갈에서도 추방된 유대인들의 절반 이상은 대부분 북아프리카와 오스만제국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일부가 서유럽으로 흘러갔고, 네덜란드도 그 대상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대인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효과를 냈다.

네덜란드는 북유럽 최대 내륙 교통망인 라인강 하류에 자리잡고 있다. 네덜란드 최대 도시 암스테르담은 라인강 하구의 심해 항구로, 대서양 무역의 중심 항구가 됐다. 네덜란드는 주로 과거의 적이자 경쟁 상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을 상대로 교역했다. 스페인과의 교역에서 큰 역할을 하는 콘베르소 유대인과 네덜란드 유대인은 그 뿌리가 같다. 이들은 곧 네덜란드의 생명선인 교역에서 중요한 입지를 다졌다. 네덜란드는 1657년 해외에 주재한 공사와 대사 등 외교 사절에게 명령해, 네덜란드 시민에게 주는 외교적 보호를 유대인 상인들에게 제공했다. 네덜란드의 유대인 5천~6천여 명은 동인도회사와 서인도회사에서 영향력 있는 소수집단이 됐다.

18세기 말, 유대인 상인들은 유럽 각국에서 화폐를 만드는 은을 제공하는 계약을 따냈다. 이런 거래를 하는 유대인 상인들은 본격적인 은행업에 다가간다. 한편으로는, 군복 등 군수품의 조달과 제조도 맡았다. 유럽 각국뿐만 아니라 신대륙과 중동에 흩어진 유대인 사업가들은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그 재정을 조달하는 광범위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 상인들은 17세기 전반부에 유럽 중앙에서 벌어진 30년전쟁의 와중에 교전 당사자들의 자산을 인수하거나 팔면서 부를 축적해, 그 기반을 닦았다.

태풍의 눈이 된 오펜하이머

대표적 선두 주자가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자무엘 오펜하이머(1630~1703)였다. 오펜하이머는 1660년대 신성로마제국 라인강 지역 팔츠 선제후의 군수계약자로 부상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프랑스와 일련의 전쟁을 치르자, 레오폴트 1세는 오펜하이머에게 오스트리아군 전체의 군수조달을 책임지게 했다. 1683년 오스만튀르크군에 포위된 빈을 버티게 해준 것도 오펜하이머였다. 오펜하이머는 빈을 지키는 군에 풍부한 물자를 조달해, 폴란드 국왕의 응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게 해줬다. 그는 이 공로로 ‘제국 최고 조달업자’라는 뜻의 ‘최고 상인’(Oberfaktor)이라는 공식 직함을 부여받았다. 게토(유대인 거주지역)에서 성장한 오펜하이머는 일부 유대인이 게토에서 벗어나 궁정의 특권층으로 떠오른 상징이었다.

유대인 상인들은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기업인으로도 떠올랐다. 18세기 프로이센에서 레비 울프는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군복 옷감 공장을 세웠다. 다비트 히르슈도 베를린에 군복 공장, 포츠담에 벨벳 공장을 만들었다. 베냐민 엘리아스 불프는 베를린의 사냥터에 면직과 옥양목 공장을 차렸다. 게토에서 벗어나야 할 유대인은 발흥하는 자본주의의 첨단 분야로 나아가야 할 위험을 충분히 감당할 동기가 있었다.

면직 공장을 세운 유대인 대부분은 금융인이었다. 충분한 자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이야말로 근대 이후 유럽 궁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 궁정 유대인의 전형이었다. 유대인은 유럽 각국의 궁정을 대리하는 경화 매매를 주도했다. 세파르디 콘베르소가 운영한 로페스 은행이 효시라 할 수 있다. 5명의 세파르디 콘베르소가 리스본(포르투갈), 툴루즈·보르도(프랑스), 안트베르펜(벨기에), 런던(영국)에 전략적으로 자리잡고는 유럽 전역의 경화 매매를 주도했다. 대금업으로 출발한 유대인이 각국 궁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거대 국제 은행자본가로 변신하는 과정의 출발점이었다.

곧 독일 지역에서 유대인이 궁정 자금책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대표적 인물이 잠존 베르트하이머(1658~1724년)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년)은 베르트하이머를 비롯해 아론 비어, 히르슈 칸, 베렌트 레만 등 유대인 금융업자를 부상시키는 계기였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레오폴트 1세가 이 전쟁을 치르며 이들로부터 수백만 굴덴을 빌렸다. 이들과 군수조달업자 오펜하이머의 도움이 없었다면, 합스부르크 왕가는 프랑스와 오스만튀르크 등과 동시에 치른 전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베르트하이머는 1703년 ‘궁정 유대인’(Hofjude, Hoffaktor)으로 임명됐다.

연못에 금으로 된 배를 띄웠던 대금업자의 말로

요제프 쥐스 오펜하이머는 궁정 유대인을 둘러싼 논란과 음모의 시작이었다. 삼촌인 자무엘 오펜하이머 밑에서 훈련받은 쥐스는 곧 신성로마제국의 헤센다름슈타트 공국을 위해 일하는 은행가로서 뛰어난 투자 역량으로 명성을 얻었다. 30대였던 1732년, 그는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카를 알렉산더 대공의 궁정 대금업자로 발탁됐다. 대공의 재정관리를 장악한 쥐스는 자신의 연줄을 최대한 이용했다. 정부 계약을 따내는 대가로 뇌물을 챙겼다.

그를 시기한 기독교도 궁정 관리들은 알렉산더 대공에게 쥐스의 부정부패를 환기했으나, 대공은 듣지 않았다. 1737년 대공이 숨지자, 쥐스는 사기와 횡령 그리고 기독교 여인과의 ‘육체관계’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쥐스는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등의 저택을 루벤스 등 거장의 예술품, 비싼 중국 자기, 희귀한 조각품 등으로 치장했다. 심지어 정원 연못에 금으로 된 배를 띄우기도 했다. 쥐스의 저택은 귀족과 각국 대사들이 모여 즐기며 이권이 오가는 사교장이었다.

쥐스의 처형이 말하듯, 궁정 유대인은 유대인을 둘러싼 논란에서 태풍의 눈이 됐다. 궁정 유대인으로서뿐만 아니라 현대 국제금융 자본의 원조가 되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런 논란과 음모론을 완성하게 된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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