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는 시대와 글쓴이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성서도 예외가 아니다.
기독교가 구약으로 쓰는 히브리성경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모세오경(토라), 전·후기 예언서(네비임), 성문서(케투빔)다. 모두 39편의 글로 구성됐다. 이 가운데 성서 제작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주로 모세오경과 전기 예언서다.
모세오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된다. 천지창조부터 시작해 노아의 방주가 등장하는 대홍수를 거쳐 아브라함 이후 족장들의 이야기, 시나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전한 계율, 그리고 모세의 죽음에서 막을 내린다. 예언서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전기 예언서는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의 가나안 땅 정복에서 시작해 이스라엘 성립부터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 창건과 솔로몬의 영화, 남유다 백성의 바빌론 유수(남유다 멸망 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까지 이스라엘 왕국의 부침을 다룬다. 신명기계 역사서라고도 한다. 중세 때까지 유대교와 기독교 교회에선 모세오경은 모세가, 전기 예언서는 예언자 사무엘과 예레미야가 썼다는 것을 공리로 받아들였다.
모세가 숨을 거두는 모습(신명기 34장 1~12절, 기원전 1451년께)이 생생하게 그려진 모세오경을 모세가 썼다는 건 종교적 믿음일 수밖에 없다. 바뤼흐 스피노자는 1670년 <신학정치론>에서 “모세오경이 모세가 아니라 모세 이후에 살았던 누군가에 의해 쓰였다는 것은 정오의 태양보다도 더 명확하다”고 말했다. 성서에는 어떤 사건을 기술하고서는 그 증거가 “오늘까지도” 생생하다는 식의 표현이 많다. 당대에 일어난 사건인데도 먼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수많은 문학적 방백이다.
18세기 성서학자들은 성서가 후대에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산물임을 믿게 됐다. 천지창조, 대홍수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기술들이 이런 결론에 이르게 한 대표 사례다. 특히 모세오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 야훼(YHWH, Yahweh)와 엘로힘 혹은 엘(Elohim, El)로 표현된 것에 주목했다. 1753년 프랑스 의사이자 성서 해석학자인 장 아스트뤼크는 창세기가 야훼와 엘로힘이란 표현을 쓴 다른 문서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성서가 긴 시간을 거쳐 후대 여러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수정·편집·보완된 것이라는 ‘문서 가설’을 확립하는 문을 열었다.
1883년 독일의 성서 문헌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은 <이스라엘 역사 입문>에서 모세오경은 네 가지 문서가 몇백 년에 걸쳐 편집된 것이라는 문서 가설을 정립했다. 그는 하나님을 야훼라 부르는 J(야훼의 독일어 철자인 Jehova의 첫 글자) 문서, 엘로힘이라 부르는 E 문서, 신명기(Deuteronomy)와 신명기계 역사서에 속하는 전기 예언서인 D 문서, 주로 제례 문제를 다룬 P(Priestly·사제 문서라는 뜻) 문서로 정리했다. 벨하우젠은 기원전 10세기 솔로몬의 궁전에서 J 문서가 쓰이고,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이후까지 차례로 이들 문서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성서는 벨하우젠의 분석보다 훨씬 후대에 쓰였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문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가 일찍 잡아도 기원전 8세기 들어 가능했을 것이라는 고고학자들의 최근 연구 때문이다. 성서를 8세기 혹은 7세기 왕조 말기에 작성되기 시작한 통일된 작품으로 보려는 경향도 있다.
1975년 캐나다의 성서학자이자 근동고대사학자인 존 밴 세터스는 <역사와 전통에서 아브라함>에서 성서는 D 문서인 신명기와 그 역사서들이 기원전 7세기에 중심 문서로서 가장 먼저 쓰였다고 주장했다. 야훼의 계율을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명기는 유대교가 정립되는 기초다. 이후 J 문서가 바빌론 유수 때인 기원전 6세기 중반에 D 문서의 역사적 정당성을 보완하려는 서문으로 쓰였고, P 문서는 바빌론 유수 뒤 기원전 5세기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사제들이 썼다고 분석했다. 또, E 문서의 존재를 부정했다. 성서의 역사적 가치를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신성시되던 모세오경의 첫 부분들인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라는 J·E 문서들은 기원전 7세기에 쓰인 신명기의 후대 부속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서에는 아브라함 등 족장들이 후대의 창작임을 보여주는 기술이 널려 있다. 족장들의 방랑에서 등장하는 낙타, 낙타를 이용한 캐러밴(대상)이 대표적이다. 낙타가 가축화해 사용된 것은 기원전 1000년 이후다. 낙타 대상들의 물건인 나무수지, 향유, 몰약 등은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제국 때 개척된 아라비아 대상로 교역 체계에서 거래되기 시작했다.
세터스가 전복한 성서의 작성 시기는 성서의 성격과 세계관을 새로 조명하는 중대한 전기였다. 성서 제작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등 강대 제국 앞에서 존망의 위기에 몰린 남유다 왕국 말기 요시야왕 때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야훼 일신교 종교개혁 차원에서 출발했고, 바빌론 유수가 결정적 계기라는 해석으로 이어졌다. 우상숭배, 바알신 등 가나안 토착신 숭배에 대한 질타는 성서의 중심 메시지다. 이는 성서가 쓰였을 때도 여전히 야훼 일신교가 정립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야훼는 가나안 토착신 중 하나였고, 기껏해야 여러 신 중 최고신에 불과했다.
성서의 뼈대와 핵심이 언제 모습을 드러냈느냐에는 의견이 엇갈린다. 이스라엘 기원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로 성과를 올린 텔아비브 학파는 성서가 요시야왕 때 종교개혁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핑컬스타인은 <발굴된 성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요시야왕이 이끄는 기원전 7세기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모든 이방의 예배 흔적들에 저주를 선포하고, 유다의 현재 불행의 원인으로 선언했다. …그 개혁으로 현대의 유일신교가 탄생했다. 동시에 유다 지도자들의 정치적 야망도 달아올랐다.”
텔아비브 학파에 따르면, 요시야 왕정의 성서 제작은 국민 통합으로 국가 영역 확대와 정치권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남유다 왕국 백성과 아시리아에 패망한 북이스라엘 왕국의 난민을 통합하고, 이를 바탕으로 북이스라엘 왕국 영토까지 합친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꿈꾸었다. ‘토라’(모세오경)는 그런 정치적 선전과 선동의 수단이었다.
다만 이는 남유다 왕국을 현대 국민국가 수준으로 상정하는 시대착오적 분석일 수 있다. 인류의 사상적 성숙에서 도약이 되는 중국의 제가백가, 인도의 석가모니, 그리스 철학의 업적은 공히 기원전 5세기 들어서야 선진 문명권에서 나왔다. 성서에 담긴 윤리관 등은 이런 인류의 사상적 성숙을 반영한다. 팔레스타인 벽촌에서 200년이나 빨리 이런 사상적 성숙이 발화했다고 볼 수 있는가? 핑컬스타인의 묘사대로, “가파르고 돌뿐인 산골짜기 사이의 좁은 산등성이 위 구릉지대 한가운데에 위태롭게 자리잡은 벽촌의 왕도에서 통치하는, 양치기와 농부들만의 희박한 인구를 가진 유다 왕국”은 부족국가 형태에서 겨우 벗어나는 수준이었다.
고대 농촌 사회에서 대부분은 문맹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이 이 종교적 개혁을 위한 경전 작업을 시작했겠지만, 현재 성서로 가는 출발선일 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성서는 남유다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인정하나, 그 역대 왕들의 타락도 질타한다. 성서가 요시야왕 때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이런 왕가에 대한 불경이 가능했겠는가.
이 때문에 성서는 이스라엘이 고대 선진 문명과 본격적으로 직면한 바빌론 유수 이후 기원전 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제작됐다는 학설로 합의가 모인다. 성서는 기원전 2세기에야 모습을 갖추게 됐다는 것이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과 영국 셰필드대학의 성서학자들로 구성된 코펜하겐-셰필드 학파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성서는 바빌론 유수가 끝나는 기원전 6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에 300년에 걸쳐 만들어졌다고 본다.
요시야왕 이후 남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에 멸망해, 유다의 엘리트들은 바빌론에 끌려갔다. 이들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제에 의해 50여 년 만에 가나안으로 귀환을 허락받았다. 이미 요시야왕 때 종교개혁에 고취된 이 엘리트들이 민족적 비극의 경험에 더해 선진 문명의 충격을 겪으며 그 결과물로 성서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성서의 배타적 일신교는 유배 과정에서 조로아스터교 등 추상적인 페르시아 종교를 접한 엘리트들의 문화적 산물로 여겨진다. 히브리어로 종교라는 단어인 ‘닷’(dat)이 페르시아에서 기원했다는 점도 이를 증명한다. 그들을 해방시킨 페르시아 제국에선 당시 선악의 이원론적 일신교 성격의 조로아스터교가 발흥했으나, 여전히 다신교 전통과 싸우고 있었다. 성서가 담고 있는 선과 악이라는 이원론적 개념이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는 우상숭배와 다신적 신앙에 대한 경고와 저주도 그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초기 야훼 일신교는 근동을 제패했던 아시리아·바빌로니아·페르시아를 거쳐, 그리스 제국의 헬레니즘과 조우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비로소 ‘유대교’로 정립됐다고 볼 수 있다. 저자들은 애초에 이 글들이 한 권의 경전으로 만들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성서는 300년 동안 쓰이고 수정되고 편집됐던 거대한 도서관이다. 핑컬스타인도 “유다 왕국 정복 뒤 150년 동안 일어난 사건들과 과정들은 유대-기독교 전통이 어떻게 출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럼, 초기 야훼 일신교와 성서가 탄생한 고향은 어디인가? 가나안 땅이라기보다는 바빌론의 유대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론으로 끌려간 남유다의 엘리트들은 거기서 유대인의 정체성도 만든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고레스 대제의 귀국 허가에도 바빌론에 남고, 유대교 정립을 계속했다. 여기서, ‘약속의 땅’에 돌아가기에 앞서 ‘유대인의 유랑’이라는 신화가 나온다. 성서와 유대교가 가나안이 아니라 바빌론에서 배태된 것은 유대인 신화의 시작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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