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뒤 승전국들의 파리강화회의가 마감되던 1920년 1월, 대표단 사이에 이상한 소책자가 나돌았다. <시온 장로 의정서>(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 이하 시온 의정서)라는 제목의 100여 쪽 영어본 소책자였다. 한밤중에 체코 프라하의 공동묘지에서 유대인 장로 12명이 은밀히 만나 유대인의 세계 지배를 위한 음모를 짰다는 내용이다. 이 유대인 고위 인사들은 세계 지배를 위해 24개 강령을 정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대혁명의 구호부터, 프리메이슨 등 무신론 비밀집단을 통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전파, 국제 금융위기를 조장하기 위한 금 가격 조작까지 다양했다. 당시 세계를 휩쓸던 전쟁과 혁명, 경제위기와 관련한 모든 세력과 현상은 이 유대인 장로들이 세계 지배를 위해 짜낸 24개 강령으로 설명될 수 있었다.
핵심 내용은 이렇다. 금융위기를 촉발하고 금 가격을 조장해 물가를 올린다. 종국적으로 “우리 외에도, 우리의 병사와 경찰에 헌신하는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소수의 백만장자가 세상의 모든 나라에 있어야 한다.” 이 방대한 일이 완료되면 인류는 “유대 주권 아래서” 유대교 단일종교로 통합될 것이다.
시온 의정서는 당시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를 폭로하는 사실적 기록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가장 옅은 영국에서도 달라진 상황을 드러냈다. 당시 영국의 최고 권위지 <타임스>는 1920년 5월8일 “이 강령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우리 몸의 모든 근육, 섬유질을 긴장시켜서 ‘팍스 게르마니카’에서 탈출했는데 ‘팍스 유다이카’로 전락했을 뿐인가?”라고 개탄했다. 1차 대전에서 간신히 독일을 물리쳤는데 그것이 유대인 세계를 만들어주지 않았냐는 질문이다.
1921년이 되자 시온 의정서는 유럽 전역에서 출간됐고 아랍어로도 번역됐다. 반유대주의자인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는 자신이 창간한 <디어본 인디펜던트>라는 반유대주의 성향 주간지에 시리즈로 게재하고 단행본으로도 출간했다. <국제 유대인: 세계의 최고 문제>라는 제목의 이 책은 미국에서 50만 부가 팔렸고,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됐다.
시온 의정서가 확산되던 1921년 런던 <타임스>의 터키 콘스탄티노플 특파원 필립 그레이브스는 러시아 왕실의 망명객 미하일 라슬로블레프를 만나 한 책자를 건네받았다. 1864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출간된 소설책이었다. 프랑스에서 망명한 변호사 모리스 졸리가 쓴 <마키아벨리와 몽테스키외의 지옥에서 대화>라는 이 소설은 당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 황제 정권을 풍자했다. 자유주의 입장의 몽테스키외와 전제주의를 상징하는 마키아벨리의 대화로 구성된 풍자소설은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나폴레옹 3세를 비판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대화의 3분의 1 정도가 시온 의정서에서 표절로 사용됐다. 시온 의정서는 러시아 차르의 비밀경찰 총수 표트르 라치콥스키가 관여한 사실이 그레이브스의 취재로 밝혀졌다. 각색된 시온 의정서는 백군의 반혁명 세력에는 최고의 효과를 내는 선전물로 이용됐다. 시온 의정서는 업데이트되면서 볼셰비키주의를 유대인의 소행으로 돌리고, 러시아 내전이 모든 정부를 유대인 지배에 종속시키려는 ‘국제적인 유대인 음모’의 논리적 연장선에 있다고 시사했다. 이는 서방국가들이 러시아에 군사 개입을 강화하라고 촉구하는 의도였다.
<타임스>는 그해 8월16일부터 세 차례 걸쳐 시온 의정서가 조작된 위서임을 밝히는 그레이브스의 기사를 내보냈다. 시온 의정서는 여전히 각국 언어로 번역돼 보급됐고, 지금도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에서 공식 출판물로 유통 중이다. 반유대주의자나 대중은 시온 의정서가 표절에 입각한 조작된 위서라는 사실보다는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라는 내용에 끌렸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은 홀로코스트를 자행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의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시온 의정서는) 위조에 기반한다고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은 매주 불평하나… 중요한 것은 시온 의정서가 긍정적이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확실하게 유대인의 본질과 행동을 드러내고, 그들 내부의 맥락과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을 폭로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시온 의정서는 기독교 서방 문명 세계에서 고대 이래로 차곡차곡 쌓인 반유대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1차 대전 뒤 유대인 차별이 비교적 적은 영국과 미국조차 유대인의 세계 지배 음모론에 휩쓸리는 등 서구 전체에 반유대주의가 고조됐다. 특히 독일은 패전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반유대주의를 극렬히 부채질했다.
독일에서 1차 대전 뒤 반유대주의의 격화는 직접적으로 두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1차 대전 패전은 전장에서의 패배가 아니라 국내에서의 배신 때문이라는 ‘배후중상설’과, 전후 좌파 봉기 때 유대인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배후중상설은 국내에서 종전 요구와 파업, 혁명을 일으킨 세력이 전선에서 싸우는 독일군의 등에 칼을 꽂았다는 음모론이다. 그 주역으로 유대인이 지목됐다. 군부와 우익 세력의 패전 책임 회피로 배후중상설이 시작됐다.
1918년 3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의 마지막 춘계공세가 실패로 돌아가자,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와 에리히 루덴도르프 참모총장은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정전협상과 민간정부로의 신속한 전환을 압박했다. 정전을 주도한 루덴도르프는 1919년 가을 베를린의 영국군 연락소 닐 맬컴 장군을 만나 독일군 패전 이유 중 하나로 국내 전선을 들었다. 이에 맬컴이 “당신들 등에 칼이 꽂혔다는 말이냐?”라고 묻자 루덴도르프는 “정확하게 바로 그거다. 우리는 등에 칼이 꽂혔다”고 말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대통령이 되는 힌덴부르크도 패전 조사위에서 “한 영국 장군이 아주 정확히 말한 것처럼 독일군은 등에 칼이 꽂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후에 다양한 배후중상설은 사회주의 세력과 유대인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사회주의 세력의 핵심은 유대인이어서, 배후중상설은 결국 유대인에게 초점이 집중됐다. 유대인의 상징인 매부리코를 한 흉측한 모습의 사람이 전투하는 독일군의 등에 칼을 꽂는 만평이 기승을 부려, 배후중상설로 더욱 격화되는 독일의 반유대주의를 드러냈다.
패전 직후 독일 전역에서 일어난 좌파 봉기에서 유대인의 주도적 역할은 반유대주의를 더욱 격화했다. 1919년 1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사회당 정부를 전복하려는 베를린 봉기를 일으킨 스파르타쿠스 연맹은 유대인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창설하고 지도했다. 이 봉기는 베를린 시내에서 나흘간의 무장투쟁 끝에 정부군과 우익 민병대에 진압됐다. 룩셈부르크는 은신처에서 5월 초 군에 체포됐다. 그는 구타로 사망한 뒤 주검이 버려졌다가 5월31일 한 운하에서 부패한 채 발견됐다. 룩셈부르크는 사회당의 전쟁 지지를 비난하며 철저한 반전 입장을 취했다. 그는 우파 세력에 배후중상의 주역으로 몰린데다 스파르타쿠스 연맹의 봉기로 완전히 독일을 파괴하는 유대인 배신자의 전형으로 부각됐다.
이보다 앞서 1918년 11월4일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에서는 독일 최초로 사회주의공화국이 수립됐다. 당시 패전 와중에 이 지역의 사회주의 세력은 평화적으로 바이에른 의회를 접수해 사회주의공화국을 선포했다. 독립사회주의당 바이에른 지구당의 지도자인 유대인 쿠르트 아이스너의 내각에 이어, 1919년 4월 베를린 중앙정부와 모든 관계를 끊는 완전한 소비에트 체제가 성립됐다. 이 정권의 중심 3인방이 다른 지역에 온 유대인인 구스타프 란다우어, 에리히 뮈삼, 에른스트 톨러이다. 일주일 만에 레닌주의자에게 정권이 넘어갔다. 정권을 접수한 토비아 악셀로드, 막스 레비엔, 오이겐 레비네는 독일 시민도 아닌 러시아 출신 유대인이다. 이들은 소련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파견돼, 붉은 군대 구성과 강제 집산화 프로그램에 착수했다.
베를린 정부는 육군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인 자유군단을 파견했다. 소비에트 정부에 관여한 유대인 지도자 6명은 체포돼 즉각 처형되거나 장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나치 정권 때 처형되는 등 모두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전후 독일에서 배후중상설과 좌파 봉기의 유대인 역할론에 노출된 전형적 인물이 아돌프 히틀러였다. 그는 1차 대전에 참전해 한때 눈이 실명되는 부상을 입었다. 전역 뒤에는 좌파 세력을 염탐하는 군 정보기관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히틀러에게 배후중상설은 최전선에 복무한 독일군 병사로서 훈장까지 받은 자신을 합리화하는 최적의 담론이었다. 또 전후 독일 사회의 혁명적 사회운동과 좌파 세력을 염탐하는 정보원 활동을 하면서, 독일 혼란과 타락의 원인이 좌파 세력이고 그 중핵이 유대인이라는 철학을 굳힌다.
히틀러 나치의 등장…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히틀러는 정보 활동 차원에서 가입한 독일노동당을 특유의 선동력과 실천력으로 자신의 당으로 개조하고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를 중심 이데올로기로 세웠다. 히틀러는 당명을 ‘나치’로 약칭되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으로 바꾸고 1920년 2월 당 강령의 24개 조항 중 6개를 반유대주의로 채웠다. 4항은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 부정, 24항은 ‘유대인의 유물주의적 정신’에 반대하는 끊임없는 투쟁에 따른 기독교 보존을 모든 독일인에게 촉구했다.
히틀러가 사실상 창당한 나치는 10년 만인 1933년 집권에 성공했다. 나치가 집권으로 돌진하던 1920년대 독일 사회에서 유대인은 경제위기와 사회 혼란에 불만을 품은 대중에게 희생양이 될 사회경제적 위치에 있었다.
1925년 독일 인구 조사에서 유대인은 56만8천 명으로 독일 인구의 1% 남짓이었다. 하지만 유대인은 특유의 사회경제적 위치로 독일 대중에게는 더 크게 보였다. 유대인 70%는 인구 10만 명 이상의 대도시에서 살았고 대부분 중산층이었다. 60%가 상업에 종사했고 22%는 전문직업인이었다. 1930년 유대인은 독일 섬유산업의 거의 절반을 소유했다. 도매 식품산업이 4분의 1, 대형 백화점과 연쇄매장의 3분의 2가 유대인 소유였다. 금융업에서 유대인 비중은 줄었어도 멘델스존, 블라이히뢰더, 슐레징거, 바르부르크 등 금융재벌 가문들이 독일 민간은행의 절반을 소유했다. 독일의 2대 출판사인 울스타인과 모제스도 유대인이 소유했다. 자유주의적이고 좌파적인 언론에서는 유대인이 압도적이었다. 1930년 독일 의사의 11%, 변호사와 공증인의 16%가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변호사의 50%는 베를린에 거주했다.
독일 대중의 눈에 유대인은 독일의 사회와 경제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비쳤다. 유대인의 압도적 다수가 영세자영업자이고, 대공황 때 독일 유대인 6만 명이 실직하는 등 유대인도 경제위기 앞에 똑같이 노출됐다는 사실은 무시했다.
나치가 집권하자 유대인은 이제 희생양이 될 완벽한 조건에 처했다. 서구의 유대인 문제는 결국 유대인 600만여 명 등 ‘열등한 인종’과 ‘반사회분자’ 1100만 명이 희생된 홀로코스트로 가는 길이었다.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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