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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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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몰아낸 유대인의 후손이 묻는다

지독한 모순에 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저들’을 통한 ‘우리’ 정체성 확립이 낳은 질곡
등록 2021-07-17 07:44 수정 2021-07-18 01:03
2021년 7월9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무인기가 이스라엘 정착촌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REUTERS

2021년 7월9일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무인기가 이스라엘 정착촌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떨어뜨리고 있다. REUTERS

이 기획연재의 앞선 글들에서 유대인의 기원과 그 정체성의 진화 과정을 살폈다. 고대 이스라엘은 유대교의 기원인 야훼 일신교를 믿던 외부 종족이 가나안을 정복해서 건립되지 않았다. 가나안 지역의 한 부족에서 나왔다. 야훼 신도 가나안 지역 다신교의 한 신이었다. 고대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솔로몬 영화는 허구이고, 궁벽한 산악 부족 국가에 불과했다. 유대교의 정체성 확립과 성서 제작은 남유다 왕국이 멸망한 뒤 바빌론으로 끌려간 남유다 왕국 엘리트 유민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성서는 당시 세계를 제패한 제국 중심에 끌려온 이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이원적인 선악 세계관을 바탕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선진 문명 영향 속에 400년 이상 쓰고 편집했다.

고대 유대 주민은 어디로 갔나?

강자 대신 약자를, 탐미 대신 도덕을, 즐거움 대신 고난을 기꺼이 수용해 현세가 아닌 내세의 평화와 영원함을 추구하는 야훼 신에 기반을 둔 일신교 운동은 기원전 2세기부터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 삶에 지친 주민을 달랬다. 예수 탄생 이전부터 지중해 전역에는 유대교 신자가 존재했다. 그 일신교 운동의 한 분파가 예수 출현 이후 기독교로 진화해 로마 제국 국교가 되면서 유대인이라는 존재와 정체성이 출현했다.

이 과정에서 나온 신화 중 하나가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난 유대인이다. 로마가 당시 유대 지역 유대교 주민을 대량 추방할 이유도 없었고, 그 역사적 근거도 없다. 다수 유대인의 혈연적, 지역적 뿌리는 고대 유대 주민이나 팔레스타인이 아니다. 기원전부터 이미 지중해 전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유대교도다. 유대인이 서구 기독교 세계 전역에 흩어져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동유럽 유대인 아슈케나지는 독일어 방언인 이디시어를, 지중해계 유대인인 세파르디는 고대 스페인어에서 분리된 라디노어를 썼다. 이슬람 세계의 유대인은 아랍어 등 현지어를 쓰던 유대교도였다. 애초부터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살며 다른 언어를 썼다.

그럼 유대인이 자신들의 뿌리라고 주장하는 고대 유대 주민은 어디로 간 것인가?

기독교가 로마의 패권 종교가 된 이후에도 예루살렘에는 여전히 유대교도가 기독교도, 사마리아인, 여러 이교도와 함께 공존했다. 비잔틴제국의 유대교 탄압에 맞서 서기 614년 갈릴리에서 티베리아스의 베냐민이 주도한 봉기가 발생한 것은 당시까지 유대교도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음을 말해준다. 그때까지도 고대 유대 주민이 여전히 팔레스타인 땅에서 대를 이어 살아갔다.

고대 로마 때 유대 지역에서 대대적인 주민 추방이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가 나타나지 않자, 이스라엘 주류 역사가들은 추방 시기를 모슬렘의 팔레스타인 정복 때로 끌어올렸다. 즉 베냐민 봉기 직후인 서기 638~643년 모슬렘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고 기존 유대교도를 추방해 모슬렘으로 식민화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초기 모슬렘은 사막의 아랍 유목 부족이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할 이유가 없었다. 기존 주민을 추방할 필요도 없었다.

비잔틴제국의 기독교도에게 박해당하던 유대교도도 모슬렘 정복군을 환영하고 도왔다. 모슬렘의 팔레스타인 정복 이후 대대적인 주민 교체가 없었는데, 이 지역이 이슬람화했다면 이는 기존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는 사실로 귀납될 수밖에 없다. 이슬람 제국에서는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을 면제해주는 정책에 따라 정복지 주민들이 앞다퉈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는 것이 역사적 상식이다. 현지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했고, 팔레스타인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유대인과 모슬렘이 모두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동예루살렘의 성전산과 바위의 돔. REUTERS

유대인과 모슬렘이 모두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동예루살렘의 성전산과 바위의 돔. REUTERS

한때는 동반자로 여겼던 팔레스타인

19세기 말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온 시오니스트들도 팔레스타인 기존 주민인 모슬렘 농민 펠라힌이 유대인과 혈연적으로 동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대인 국가 건설에서 팔레스타인 주민이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로 초대 총리를 지낸 다비드 벤구리온, 그리고 건국 초기 10년이나 대통령을 지낸 이츠하크 벤즈비가 대표적이다. 이스라엘 건국의 핵심 주역으로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핵심 시오니스트인 이들은 1918년 <과거와 현재 이스라엘의 땅>(Eretz Israel in the Past and Present)에서 “펠라힌(모슬렘 농민)은 7세기에 ‘이스라엘의 땅’과 시리아를 차지한 아랍 정복자의 후예가 아니다. 유대인 농민은 다른 농민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땅에서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억압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 농민들은 변하지 않은 채 남았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주민이 자신들과 혈연적 기원이 같기 때문에 이스라엘 건국의 정당성과 동력을 이들을 포용해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1936~1939년 팔레스타인으로 유대인 입식을 반대하는 아랍 주민의 폭동 이후 더는 팔레스타인 주민은 유대인과 공통의 기원을 공유한 동반자가 아니었다.

현재 팔레스타인 분쟁의 두 주역인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주민의 관계는 이렇듯 모순에 차 있다. 2천 년 전 고대 유대 주민의 후예임을 내세워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을 건국하고 자신들의 배타적 생존권을 주장하는 유대인은 사실 지중해 전역 다양한 지역 출신의 후예다. 이들 유대인에 의해 그 땅에서 밀려나는 팔레스타인 주민이 고대 유대 주민의 후예다.

현대 중동분쟁의 발화점인 팔레스타인 분쟁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핵심 사안은 그 땅의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다. 2천 년 전 조상이 그 땅에 살았다는 이유가 사실이라 해도, 그것이 그 땅에 국가를 건설하고 기존 주민을 몰아내는 데 정당화될 수 없다. 더구나 유대인이 내세우는 고대 유대 주민의 후예라는 주장도 역사적 신빙성이 의심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유대인은 팔레스타인에 거주할 명분과 권리는 없는 것인가?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든다”

지금 이스라엘 유대인은 120년 전부터 그 땅에 들어왔다. 긴 세월이다. 그동안 유대인은 그 땅에 들어가 기존 지주들한테 토지를 매입하고 정착하는 과정을 거쳤다. 농장, 학교, 병원, 산업, 도로를 놓고 도시를 건설했다. 2차 세계대전 뒤 국제사회도 유대인 국가 건설을 허락하는 유엔 결의안을 채택했다. 물론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도 결의했으나, 이는 무산됐고 현재의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결국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 주민이나 모두가 이제는 그 땅에서 살아야 할 권리와 당위가 있다.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국제사회의 합의인 ‘2국가 해법’, 즉 이스라엘과 함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 그런 차원에서 나왔다. 문제는 그 해법 실현에 열쇠를 쥔 이스라엘 내부에서 갈수록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배타적 생존권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이에 비례해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을 부정하는 세력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한 배경은 근본적으로 서구 기독교 문명 세계가 만들어낸 유대인 문제에서 기원한다.

“만약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반유대주의자가 유대인을 고안해낼 것이다. 유대인은 반유대주의가 만든다.”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가 저서 <반유대주의자와 유대인>에서 한 이 말은 유대인 문제를 드러내는 가장 유명한 말이다. 유대인 문제는 서구 기독교 문명이 그들 자신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만들어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서구 기독교 문명 세계는 유대인을 자신들의 세계 밖에 있는 국외자로 취급했으나, 사실 기독교도와 그 세계의 정체성을 위해 존재해야만 했던 그 세계의 본질적 부분이었다.

중세 유럽 때 교황을 정점으로 기독교 천년왕국 세계인 크리스천 돔을 구축하며 ‘우리’인 기독교도는 ‘저들’인 이교도 유대인이 존재함으로써 더욱 명확해졌다. 근대 이후 유럽 국가에서 민족주의 국민국가가 형성될 때도 독일의 아리안족이나 러시아의 슬라브족 등은 열등하고 비열한 유대인과 대비돼야 위대함과 우월성이 성립됐다. 그래서 유대인은 기독교가 아닌 유대교를 믿는 이들에서 출발해, 예수를 죽인 자들, 돈만 밝히는 고리대금업자, 일하는 사람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 금융업 등 주요 산업을 장악한 집단, 세계를 지배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 그래서 박멸당해야 하는 자들로 역사 속에 자리매김해왔다.

이는 유대인에게도 집단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과정이었다. 그들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주변의 강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유대인 역시 강요된 정체성을 스스로 강화하며 주변의 차별과 억압에 대응했다. 유대교 신자에서 출발해 종교 공동체를 거쳐, 종족적 의미의 유대인 집단에 이어 민족과 인종 집단으로까지 나아갔다. 유대인은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전혀 다른 언어를 구사했고, 심지어 피부색도 다른 인종이었는데 민족집단화했다. “민족이란 상상된 공동체”라는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이 유대인에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저들’이 만든 ‘우리’가 우리에겐 없는가?

이는 유대인의 민족집단화가 잘못된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서구 기독교 문명 세계의 유대인 문제가 빚어낸 이스라엘 건국과 유대인 민족화, 인종화가 가져온 결과다. 서구 기독교 문명 세계에서 차별받고 박해받던 유대인이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팔레스타인 땅에서 차별받고 분리되고 유배되는 또 다른 집단을 만들어냈다. 아랍어를 쓰는 팔레스타인 지역 주민도 유대인의 존재에 의해 민족화됐다. 유대인이 이 땅에 들어와서 국가를 건설하고 자신을 분리하자, 팔레스타인 주민도 이에 대항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확보했다.

‘우리’라는 개념은 ‘저들’이 있어야 성립한다. 유대인은 기독교도가 창조했고, 팔레스타인인은 유대인이 창조했다. 한국 사회에는 지금 ‘우리’와 ‘저들’의 구분은 없는가?

정의길 <한겨레> 선임기자 Egil@hani.co.kr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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