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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 EU 해체 가속화... ‘유럽의 시대’는 갔다

[코로나 뉴노멀]
1부 4장 G제로 시대
등록 2020-06-02 16:56 수정 2020-06-13 13:38
5월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시민이 유럽연합(EU) 본부 앞을 지나가고 있다. 거대한 ‘통합’을 꿈꾸던 유럽연합이 코로나19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EPA 연합뉴스

5월2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 시민이 유럽연합(EU) 본부 앞을 지나가고 있다. 거대한 ‘통합’을 꿈꾸던 유럽연합이 코로나19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EPA 연합뉴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표준’.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인간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인류의 생활양식은 예전과 똑같은 궤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이른바 ‘코로나 뉴노멀’ 시대의 개막이다. 무엇보다 인간과 인간의 물리적 접촉은 더 이상 무조건적인 덕목이 아니게 됐다. ‘접촉 축소’라는 시대적 요구는 자동차와 비행기의 이동을 줄게 해 의도치 않은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를 안겨줬다. 화석 연료로 지탱하는 지금의 에너지 구조는 더 이상 ‘이대로’를 외칠 수 없는 영역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작은 정부론’에 시달리던 국가는 영역을 확장해나갈 태세다. 코로나19 대응에 미숙함을 드러낸 미국과 중국, 두 국가는 국제적인 지도력을 잃었다. 지(G)2 시대가 저물고 지(G)0 시대가 열렸다.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는 ‘코로나 뉴노멀’이 정의와 평등의 얼굴을 갖게 하기 위해 세계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_편집자주

코로나19 이후 유럽(연합)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하기 위해 우리는 분명한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알던 유럽이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뒤 지나가버렸다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유럽 이후’라고 부를 수 있다. 코로나19 위기는 이 흐름을 더욱 가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유럽은 무엇인가? 대서양 건너편에서 유럽을 동경하는 제러미 리프킨에게 21세기 초의 유럽은 “포괄성, 다양성, 삶의 질, 지속가능성, 심오한 놀이, 보편적 인권, 자연의 권리, 평화”를 상징하며 이런 점에서 그는 ‘유러피언 드림’을 꿈꾼다. 유럽 안에 있지만 영국해협 건너편의 역사가인 토니 주트에게 유럽은 1945년 파편 속에 다시 등장한 국제적 가치의 모범, 즉 유럽인과 비유럽인 모두가 본받으려는 모범인 “가치의 공동체이자 국제관계의 체제”다.

자유주의는 훼손되고, 민주주의는 배제의 도구로

하지만 2008년 경제위기를 지나면서 유럽에 대한 동경과 자부심은 더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유럽연합 역사를 국제적인 시각에서 연구하는 미국의 역사학자 존 길링엄이 보기에 폴크스바겐의 ‘디젤 스캔들’은 기후정책의 세계적 양심이라는 벨기에 브뤼셀(유럽연합의 수도)의 주장이 공허하다는 것을, 난민 위기는 개별 회원국들의 안보 주권 앞에서 유럽연합이 무력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그가 보기에 우리가 유럽연합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사망’ 기사를 내는 것뿐이다. 유럽 동쪽에 있는 불가리아의 정치학자 이반 크라스테프는 ‘최근 몇 년 사이 유럽연합의 해체 과정이 더 빨라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경제위기와 난민 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발흥은 오랫동안 ‘포용의 수단’이었던 민주주의가 이제 ‘배제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유럽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팬데믹) 이후 유럽은 세계에,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모습인가?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은 건 여러 유럽 나라 정부의 무능, 더 나아가 의료체제의 취약함이었다. 3월 이후 미국에서 코로나19 위기가 커졌고 이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이 황당하기 때문에 가려졌을 뿐이지,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보인 모습은 전혀 모범 사례가 아니었다. 무능에 더해 방역을 위한 록다운(도시 봉쇄)과 셧다운(경제활동 중단)은 ‘유럽’과 사실상 등치돼온 ‘자유주의’의 훼손, 약화, 변형으로 보이면서 많은 사람의 우려를 낳고 있다.

그러나 유럽(연합)에서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전부터, 특히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크게 불거진 북유럽과 남유럽의 긴장, 그리고 서유럽과 동유럽의 긴장이 더 커진다는 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위기가 심각하며 앞으로 더 큰 충격을 주리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4월 초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1조5천억유로(약 2028조원) 규모의 부양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올해 유럽 경제가 10%나 수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경제위기에 대응할 것인지다.

4월23일에 있었던 유럽 정상회의는 이른바 ‘코로나 본드’에 합의하지 못했다. 코로나 본드는 유럽연합 회원국이 함께 보증하는 채권인 유로본드의 하나로, 이번에 큰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등이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독일을 비롯해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핀란드 같은 나라는 자국의 부담이 커질 것을 우려해 반대한다. 이 모습은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낯익은 유럽의 풍경이다. 경제적으로 튼튼한 북유럽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남유럽 나라의 긴장 말이다.

비상상태 이유로 통치 체제 바꾸려 하기도

그러나 5월19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말했듯이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조처를 요구”하는 모양이다. 독일과 프랑스 두 나라 정상은 이날 5천억유로(약 676조원)의 공동구제기금을 조성하는 데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마크롱 대통령은 유례없는 지금의 위기가 “효율적이고, 집단적이며, 무엇보다 유럽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유럽 통합을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대륙 유럽에서 가장 큰 경제 지역인 두 나라가 합의했기 때문에 네덜란드·오스트리아·핀란드 같은 나라가 반대한다 해도 공동구제기금은 실시될 가능성이 크다. 이는 다시금 민족주의적 포퓰리즘의 도전을 가져올 것이다.

강력한 방역 조처인 록다운과 셧다운을 보면서 이탈리아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은 비상사태를 정상적인 통치 패러다임으로 하려는 국가의 부상을 우려하고 있다. 물론 방역의 필요성, 시민의식과 시민적 연대 등을 고려하면 유럽에서 당장 권위주의 국가의 부상을 우려할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헝가리의 코로나19 관련 법률을 보면 아감벤의 우려가 순수하게 철학적인 차원은 아닌 것 같다. 3월 말, 헝가리 의회는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한 조처로 오르반 빅토르 총리에게 제한 없이 포고령으로 통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법률은 비상사태에 대한 명확한 시한의 제한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짜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들을 구금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실제 정부를 비판하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린 사람들을 경찰이 단속하기도 했다.

유럽의 연대와 공동 행동을 거부하고 권위주의적 형태의 주권을 내세우는 동유럽 나라들과 서유럽의 갈등은 난민 할당, 탄소 배출 등의 문제에서도 이미 나타났다. 1990년대 유럽 통합의 최대 성과 가운데 하나인 유럽연합의 팽창(동진)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영국인이 유럽 통합에 대해 원했던, 넓어질수록 옅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구현하는 듯하다.

새로운 유럽 탄생할까

이렇듯 유럽(연합)은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부터 여러 개의 단층선으로 나뉘고, 곳곳에 구멍도 숭숭 뚫려 있었다. 코로나19는 이런 약화와 해체의 경향을 강화할 것이다. 하지만 유럽연합이 다른 어떤 정치체와도 구별되는 지점은 유럽 통합의 아버지인 장 모네가 ‘동적인 불균형’이라고 부른 것에 의존하며 종국적 목표 없이 전개돼왔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지금 위기 속에 ‘유럽 이후’ 새로운 유럽의 탄생을 예측하는 일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안효상 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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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뉴노멀
1부 코로나 뉴노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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