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31일 밤 미국 뉴욕 시내 브루클린의 한 고급 아파트를 3천여 명의 시위대가 겹겹이 에워쌌다. 푯말에는 ‘트럼프에 저항하라!’(Resist Trump!) ‘강단 좀 보여, 슈머!’(Show Some Spine Schumer!) 같은 점잖은 문구뿐 아니라 ‘XX, 이게 뭐야, 척?’(What the f-k, Chuck?!) 같은 직설적인 욕설도 내걸렸다.
이 푯말의 대상은 아파트에 사는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였다. 시위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인선한 ‘문제투성이’ 초대 내각에 민주당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취임하자마자 ‘무슬림 입국 금지’를 비롯해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행정명령(executive order)을 쏟아내는 트럼프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며 야당을 성토했다. 민주당이 더 강력한 대정부 투쟁에 나서라는 주문이었다. 시위 참가자들은 ‘필요하다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트럼프를 막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트럼프에 저항하라!’같은 날 상원 본회의장에서는 일레인 차오 교통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인준 투표가 진행됐다. 부시 행정부 때 이미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차오는 트럼프가 지명한 다른 장관 후보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격 논란에서 비껴나 있어 표결에 참가한 99명 중 찬성 93표 대 반대 6표로 무난히 인준을 통과했다.
하지만 슈머가 버니 샌더스,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 등 민주당 내 손꼽히는 강경파들과 함께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확인되자 장내가 잠시 술렁거렸다. 차오가 미치 매코널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의 -매코널은 이날 본회의장에 나왔지만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인이기 때문이다.
슈머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대한 의견을 묻는 질의에 차오가 아무런 답변을 내놓지 않아 인준에 반대했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슈머가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에 보낸 ‘결사항전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왔다. 트럼프를 막기 위해 ‘필요하다면 뭐든 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는 것이다.
트럼프 견제 선봉에 선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를 둘러싼 두 사건은 민주당이 안팎으로 마주한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난해 11월 미국 대선과 총선에서 완패해 의회 다수당 탈환에 실패하고 정권까지 내준 민주당은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독선적 국정운영에 맞서 낯설고 힘겨운 싸움에 내몰린 상태다.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링으로 끌려나온 민주당은 ‘독불장군’ 트럼프와 ‘호위무사’ 공화당에 맞서 총력전에 내몰리고 있다.
초반 싸움에서 일부 성과도 있었다. 각료 인준의 첫 관문인 소관 상임위원회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가 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표결을 최대한 막는 민주당의 시간 끌기 전략에 트럼프 내각 구성은 역사상 가장 느린 속도로 진행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문제 후보자 낙마를 위해 총력전을 펼치고 있지만 ‘공교육 해체론자’ 교육부 장관, ‘인종차별주의자’ 법무장관, ‘환경규제 철폐론자’ 환경보호청장은 잠시 지체됐을 뿐 인준됐거나 곧 인준받을 전망이다. 단 2석 차이긴 하지만 원내 과반의석으로 16개 소관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독식한 공화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한 이를 막아낼 마땅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몇몇 공화당 의원조차 일부 장관 후보자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며 ‘양심 선언’에 나섰지만, 선거에서 갓 승리한 트럼프의 ‘서슬 퍼런’ 위세에 눌려 당내에서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현실의 높은 벽’을 마주한 민주당초대 내각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인준 지연이 민주당의 대트럼프 투쟁 1라운드였다면 2라운드는 무슬림 입국 금지로 대변되는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 반대 투쟁이었다. 1월27일 금요일 밤 행정명령이 전격 발표된 직후 미 전역의 주요 공항은 오도 가도 못 하게 된 무슬림 입국자들과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몰려나온 시위대로 아수라장이 됐다.
50여 명의 민주당 의원들은 직접 공항으로 달려가 공항 당국에 입국 허용을 촉구하는 한편 시위자들에게 힘을 보탰다. 슈머는 일요일(1월29일)에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트럼프에 맞서 ‘결사항전’을 선언했다. 지역구인 뉴욕에서 열린 회견에는 행정명령에 따라 가족과 생이별해야 할 처지에 놓인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들이 함께 단상에 올랐다.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트럼프는 다음날 슈머가 가짜 눈물을 흘렸다며 연기 선생이 누군지 물어볼 참이라고 비아냥댔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헌법 위반이라며 이를 뒤집기 위한 입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또 자신의 중간 이름 ‘엘리스’(Ellis)가 20세기 초 미국 이민자들이 입국 심사를 위해 대기하던, 뉴욕의 관문 ‘엘리스 섬’(Ellis Island)에서 따왔다며 ‘뼈 속 깊숙이 각인된 이민 정서로 싸워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민주당은 다음날 30일 약속대로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무효화하기 위한 상원 본회의 표결을 요구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요구를 어림없다며 바로 거절했다. ‘현실의 높은 벽’을 마주한 민주당은 우회해야 했다.
민주당은 이날 저녁 통상 의원들이 주도하는 집회가 열리는 의회 본청 계단이 아닌 의사당 맞은편 대법원으로 향했다. 의회에서 트럼프의 반이민 공세를 제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민주당이 기댈 곳은 사법부의 개입뿐이라는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집회 당시 슈머 옆에는 낸시 펠로시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 그리고 다수의 민주당 소속 의원이 나란히 섰다.
대법원 청사 앞 계단에 선 슈머는 ‘난민 환영’ 푯말을 든 시위대를 향해 ‘모든 수단을 다해 트럼프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재차 다짐했다. 그는 ‘결국 이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고 말했지만 울림은 그리 크지 않았고 공허함마저 느껴졌다.
민주당의 대트럼프 투쟁 2라운드인 반이민 행정명령 폐기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국 샌프란스시코 제9연방항소법원이 2월9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 재시행을 거부하고, 트럼프가 강력 반발하면서 이 사건은 사실상 연방대법원으로 공이 넘어간 상태다.
그리고 슈머는 이미 트럼프를 상대로 세 번째 싸움에 내몰렸다. 슈머의 대트럼프 투쟁 3라운드는 트럼프가 취임 11일 만에 부랴부랴 지명한 닐 고서치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인준을 저지하는 것이다.
지난해 2월 앤터닌 스캘리아 연방대법관이 서부 텍사스 주의 호화 휴양 시설에서 사냥과 파티 등 유흥을 즐기다 ‘석연찮게’ 사망한 뒤 공석이 된 대법관 자리는 애초 버락 오바마 대통령 몫이었다. 하지만 당시 상원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던 공화당은 오바마가 지명한 메릭 갈랜드 후보자 인준 청문회를 10개월 가까이(정확히 293일) 열지 않고 뭉개는 방식으로 대법관 임명을 무산시켰다.
이 때문에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대법관 자리를 강탈당했다’는 피해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다. 공화당으로서도 ‘보수의 우상’이던 스캘리아의 빈자리는 당연히 강한 보수 성향의 고서치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지층의 팽팽한 입장 차이에다 반이민 행정명령을 둘러싼 논란이 대법원 판결로 결정날 가능성이 커져 양당이 이번 싸움에서 서로 물러설 여지가 많지 않다.
보수 연방대법관 인준 막기 위한 필리버스터현재 슈머는 무기한 의사진행방해(필리버스터)로 고서치 인준을 무산시킬 것이라 밝혔다. 반면 속내는 복잡하다. 현재 미국 대법원(9명 정원)은 온건 보수 성향으로 주요 판결에서 ‘스윙보트’(결정권자)역할을 해온 앤터니 케네디 대법관을 제외하면, 보수(존 로버츠 대법원장,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와 진보(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엘리너 케이건 대법관)가 3 대 4로 약간 진보에 기운 상태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고서치가 합류해도 스캘리아 생존 시절인 보수 대 진보, 4 대 4 균형으로 되돌아갈 뿐이다.
이 때문에 이번 싸움에서 대법관 인준 규정(현재 표결을 위한 필리버스터 중단에 60표가 필요한데, 공화당은 여의치 않으면 이를 과반으로 낮춘다는 방침)이 바뀌는 ‘극약 처방’을 택하는 대신 고서치를 인준해주고 후일을 기약할 필요가 있다는 ‘신중론’이 민주당 안에서 나오고 있다.
83살인 긴즈버그와 78살인 브라이어, 거기다 80살인 케네디까지 진보와 온건 보수 성향의 초고령 대법관들이 만에 하나 트럼프 임기 중에 은퇴하거나 사망할 ‘최악의 경우’를 가정하면 더욱 그러하다. 대법원의 우경화를 막을 ‘최종 병기’인 필리버스터가 규정이 바뀌어 사실상 무력화된 상태에서는 트럼프의 초강경 보수파 대법관 지명을 막을 마땅한 묘책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가 압승한 공화당 우세 지역에서 중간선거를 치러야 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고서치 인준 반대가 몰고 올 역풍에 고심하고 있다. 고서치 인준 반대에 앞장설 경우 트럼프를 찍은 보수 성향 유권자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와 선거에 악재가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실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 조 맨친 상원의원은 트럼프가 고서치 지명을 발표한 지 24시간이 안 된 바로 다음날 고서치를 만났다. 민주당 의원으로서는 첫 번째였던 당시 고서치 면담을 두고 의회 안팎에선 내년 선거를 의식한 행동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지난 대선 때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트럼프는 67.9% 득표로, 26.2%를 얻는 데 그친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 말 그대로 압승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트럼프가 63% 득표로 27.2%의 클린턴을 꺾은 노스다코타에서 내년 11월 재선에 나서는 하이디 하이트캠프 의원 등 10여 명도 비슷한 처지다. 내년 중간선거에서 트럼프의 실정을 앞세워 ‘정권 심판’에 나서야 할 슈머 역시 당장 한 석이 아쉬운 상태여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좌충우돌’ 국정운영에 제동 걸리나1라운드 각료 인준 저지, 2라운드 반이민 행정명령 폐지, 3라운드 고서치 대법관 인준 저지까지. 슈머가 이끄는 미국 상원 민주당의 대트럼프 투쟁은 초반부터 전선을 넓히며 점차 거세지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트럼프의 ‘좌충우돌’ 국정운영에 제동이 걸릴지 여부는 슈머가 거둘 세차례의 전투 성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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