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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주의자 트럼프가 변했다?

여성 비하와 혐오 발언 쏟아온 트럼프 대통령

딸 이방카의 조언 따라 여성 문제에 이례적 관심
등록 2017-03-16 13:04 수정 2020-05-02 19:28
3월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여성의 날’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이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3월8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여성의 날’ 집회에 참여한 여성들이 트럼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뚱보(Fat), 돼지(Pig), 게으름뱅이(Slob)….’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그동안 여성을 가리키며 썼던 말 중 일부다. 예외 없이 여성을 사물화하고 외모를 비하하는 단어들로 여성에 대한 트럼프의 비뚤어진 성차별적 시각을 보여준다. 영국 일간지 는 트럼프의 취임 직후인 지난 1월22일치 기사(인터넷판)에서 그가 그동안 여성의 외모를 비하하고 성차별적 말을 지속적으로 해왔다며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그의 화려한(?) 성차별적 어록과 성추행 의혹 등을 일일이 언급했다. 신문은 기사 제목부터 아예 ‘도널드 트럼프 여성차별 추적기’로 뽑았다. ‘트럼프가 지난 수십 년 동안 뚜렷한 성차별주의자(sexist) 성향을 보여왔다’는 부제가 그 아래 놓였다.

여성운동=반트럼프운동

여성은 물론 성소수자를 향한 트럼프의 거듭된 비하와 혐오 탓에 미국 내에서 ‘여성운동=반(反)트럼프운동’이란 공식이 점차 형성되고 있다. 1월20일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 맞춰 수도 워싱턴에선 여성 수십만 명이 반트럼프 행진(Women’s March)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마돈나 등 유명 스타들까지 거리시위에 나서, 전날 열린 트럼프 취임식에서보다 더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업신여김의 대상이던 여성들에게 일격을 당한 셈이다.

취임 뒤 열린 첫 백악관 공식 브리핑 때 숀 스파이서 대변인이 기자들과 신경전을 벌인 게 바로 취임식 참여 인원 문제였다. 당시 스파이서 대변인은 트럼프의 취임식 현장 사진 속 인원이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보다 훨씬 적었다는 지적에 사진을 찍은 장소와 각도의 문제라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취임식 뒤 가장 큰 정치적 행사인 2월28일 트럼프의 첫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도 여성운동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날 하원 본회의장에는 흰색 옷을 차려입고 줄지어 앉은 로이스 프랭클 하원의원 등 여성의원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주로 민주당 소속인 ‘흰옷 의원’들은 미국 여성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참정권운동(Suffrage Movement·1848년 시작돼 투표권을 획득한 1920년까지 이어짐)을 상징하는 순백색의 옷을 입고 트럼프의 비뚤어진 여성관에 항의했다.

의원들은 자신이 걸친 흰옷이 단순히 반트럼프를 넘어 여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이슈, 예를 들어 오바마케어(전 국민 건강보험 가입 의무화), 여성의 낙태권 보장, 남성 노동자와 동등한 임금, 유급 출산휴가 등의 지지를 상징한다고 밝혔다.

트럼프는 이날 연설에서 국방비 증액, 반이민 입법, 오바마케어 폐기 등 주요 현안 외에 여성 문제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정책을 공개했다. ‘흰옷 시위’에 가려 거의 부각되지 않았지만 트럼프의 거친 입에서 여성 문제가 공식 의제로 언급된 건 관심을 끌기 충분하다는 지적이다. 트럼프는 먼저 아동 보육시설 이용 확대 정책을 의회와 논의하기 희망한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진 않았지만 미국 언론은 보육비에 대해 세금을 감면해주는 안이 행정부와 의회 사이에 논의 중이라고 전했다.

공화당, 남녀 임금 평등 법안 발의

트럼프는 이어 여성보건 문제에 새 행정부가 나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역시 세부 계획은 밝히지 않았지만, 낙태를 시술하는 공공 의료기관에 예산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기존 방침을 완화할 가능성이 엿보여 주목된다. 이들 비영리 병원은 트럼프가 예산을 끊겠다고 밝힌 직후 개인 후원자가 대폭 늘어난 상태여서 트럼프의 협박이 낙태 시술 중단으로 곧바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고 있다.

트럼프는 여성 기업가 지원 계획도 밝혔다. 그는 2월13일 저스틴 트뤼도 캐나다 총리의 미국 방문에 맞춰 출범한 ‘미국-캐나다 여성 기업인 발전위원회’ 회의를 언급하면서 직장여성 지원 방안을 마련하고 여성들이 기업 활동에 필요한 인맥과 시장, 자금 등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다짐했다.

트럼프의 이같은 ‘이례적인’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은 취임 직후부터 맏딸 이방카와 공화당 소속 여성 의원들이 막후에서 함께 준비해온 결과였다. 이미 공화당의 뎁 피셔, 조니 언스트 상원의원 등은 동일 노동에 대한 남녀 임금 평등과 여성들의 유급 가족휴가 보장을 법제화하기 위한 법안을 2월 초 잇따라 발의했다.

먼저 직장 내 평등임금(Equal Pay) 법안은 남녀 사이에 ‘동일 노동, 동일 임금’ 원칙이 사업장에서 제대로 지켜지도록 유도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이 회사 내 임금수준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임금 관련 정보를 동료들과 나눴다는 이유로 회사 쪽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명문화했다. 그동안 직장 내에서 임금수준 관련 정보를 일절 공개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여성에 대한 임금 차별의 길을 열어놓았던 관행에 제동을 걸겠다는 취지이다. 만약 법제화가 이뤄지면 여성들은 임금협상에서 훨씬 나은 조건- 동료 남성들의 임금수준을 미리 알 수 있기 때문에- 에서 회사 쪽을 상대할 수 있고 그만큼 남녀 임금 격차도 점차 해소될 것으로 기대된다.

유급 가족휴가 법안은 연간 최소 2주, 최대 12주의 유급 가족휴가(Paid Family Leave)를 노동자에게 제공하는 기업에 국세청이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것이 골자다. 현재 개별 노동자에게 제공되는 휴가와 별도로 추가 제공되는 가족휴가에 한해 감세 혜택이 주어진다. 남녀 노동자 누구나 자신은 물론 가족을 돌보기 위해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만큼 직장여성이 가장 큰 수혜자가 될 전망이다. 한국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여성이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느라 경력이 단절되는 일이 많다. 법안은 휴가를 시간 단위로 쪼개 필요할 때마다 사용할 수 있게 명문화해 직장여성들의 육아에 도움이 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 유도한 ‘일등 공신’
2월21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카 역사박물관에서 이방카 트럼프(오른쪽)가 아버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EPA 연합뉴스

2월21일 미국 워싱턴에 있는 스미스소니언 아프리카 역사박물관에서 이방카 트럼프(오른쪽)가 아버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EPA 연합뉴스

공화당 소속 여성의원들은 지난해 가을부터 이방카와 따로 만나 육아와 여성들이 직장 내에서 겪는 어려움과 관련해 논의해왔다. 이 자리에서 평등임금과 유급 가족휴가 문제가 논의됐다. 그동안 민주당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여성 문제를, 그것도 직장여성들이 직면한 가장 현실적 어려움인 직장 내 임금 차별과 육아용 유급휴가 문제를 공화당이 주도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특히 남의 말을 듣기 끔찍이 싫어하는 트럼프가 유독 귀를 기울이는 상대인 이방카가 관여하고 있어 백악관의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기대가 나온다. 이방카는 버지니아 로메티 IBM 최고경영자 등 미국 내 주요 여성 경제인들을 따로 만나 논의하는 등 여성들의 경제활동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데 적극적이다. 실제 기업에서 여성들이 차별 없이 일할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이를 제도 개편에 반영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이방카의 이런 막후 구실은 이해 충돌을 일으키는 등 일부 논란 속에서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트럼프 행정부의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 ‘일등 공신’이란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미국 케이블방송 CNBC도 3월6일치 보도에서 이방카 트럼프가 직장여성들의 경력 단절과 직결된 보육과 유급 가족휴가 문제의 해결에 발 벗고 나섰다고 보도했다. 방송은 이 문제에 대해 백악관과 공화당 사이에 당정 협의가 열렸다며 그동안 미심쩍어하던 민주당 쪽도 일부 반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CNN 역시 ‘트럼프가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미국 부모와 예비부모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며 같은 내용을 전했다. ‘잠깐, 트럼프가 유급 가족휴가를 지지했다고?’라는 제목의 기사는 트럼프가 유급 출산휴가가 아닌 유급 가족휴가를 언급했다며 공화당 소속 대통령으로선 대담한 접근이라고 평가했다. 트럼프가 후보 시절 잠깐 언급한 출산휴가- 미국은 출산한 여성에게 유급 휴가를 따로 주지 않고 있다- 에 비해 가족휴가는 가족 누구를 위해서라도 휴가를 사용할 수 있어 자연스레 여성뿐 아니라 남성의 육아휴가 역시 보장되기 때문이다. 방송은 백악관이 더 자세한 설명은 않고 있지만 트럼프의 입에서 진일보한 여성정책이 나왔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앞으로 트럼프의 연관 검색어는?

이방카가 막후에서 주도하는 육아 비용에 대한 세금 감면의 경우, 현재로선 그 혜택이 주로 고소득자에게 돌아가는 등 세부적으로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다고 미국 언론은 전한다. 유급 가족휴가 역시 기업과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려면 세금 감면 외에 추가 재원을 마련해야 하지만, 천문학적 국방비 증액에다 대대적인 사회기반시설 확충까지 돈 쓸 곳이 많은 트럼프 행정부가 예산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여성 복지를 남의 문제라며 제쳐두던 공화당이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꼭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평가다. 그동안 ‘여성 비하’ ‘성차별’ 같은 단어만 연관 검색어로 떴던 트럼프 옆에 앞으로 ‘여성 복지’라는 단어가 나란히 자리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강창민 재미 언론인*송호진·우문태·강창민의 ‘세계+’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세계+’를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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