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19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 브라이트샤이트 광장의 크리스마스 시장에서 ‘트럭 테러’가 일어났다. 이 광장에 있는 카이저 빌헬름 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훼손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쟁 위험성을 세계인에게 전시한 공간이다. 그 옆에 들어선 크리스마스 시장은 전쟁의 상처를 통과한 현대 독일인의 평온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최소 12명이 희생된 ‘트럭 테러’는 평화를 기원하는 베를린의 이 상징적 공간을 덮친 사건이다.
아이들을 위한 시사 이슈 사이트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들 사이로 “당신들(테러 세력)이 이긴 것이 아니다” “우리가 더 강하다” 같은 글들이 눈에 띄었다. 어떤 시민은 ‘왜(Warum)?’라는 단어를 쓴 팻말을 내걸기도 했다.
트럭테러의 용의자가 튀니지 출신으로 드러났지만 독일에선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난민 개방·보호 정책에 대한 전면 수정 요구가 거세게 일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사건 현장에서 만난 15살 여학생 마리아는 “베를린에 있는 수많은 난민들의 존재가 이번 테러의 직접적 원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는 “자유와 자신의 삶을 찾아 고향을 떠난 난민들의 문제와 테러를 일으키는 극단주의 세력은 별개다”라고 선을 그었다.
큰 사건이 벌어지면 언론의 속보와 보도량이 증가하는 건 독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 언론 외에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얻을 통로가 많다. 현안을 학습, 토론할 기회도 집 근처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사회 시스템으로 갖춰진 게 독일의 강점이다.
‘트럭 테러’ 직후 ‘플루터’(www.fluter.de)란 사이트에 들어갔다. 독일 사회 전체의 민주시민 교육을 지원하는 기관인 내무부 산하 연방정치교육원이 청소년을 위해 운영하는 사이트다. 1년에 네 번 란 잡지도 낸다. 정치·사회·환경·국제·평등 등 다양한 주제의 글을 청소년 눈에 맞춰 온·오프라인으로 제공한다.
이번엔 ‘평화를 잃은 광장’이란 주제로 테러를 다뤘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무장투쟁과 테러리즘을 분석한 프랑스 사회학자의 책에 대한 내용, 테러에 관한 심리학 분석, 1970~90년대 서유럽에서 벌어진 테러 역사, 다른 나라는 테러가 존재하는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대처하는지 등 여러 글을 올렸다. 학자들의 분석은 문답 형식으로 풀어 청소년들의 이해를 도왔다. ‘트럭 테러’의 배후를 무슬림과 난민으로 가정하고 이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글을 올린 게 아니다. 테러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주고, 왜 베를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고민하게 만드는 글들이다.
학교 안팎에서 생애 전반 정치교육 가능연방정치교육원이 더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사이트(www.hanisauland.de)도 열어보았다. 이 사이트 상단에 다뤄진 첫 주제도 ‘베를린에서의 테러 공격’이었다. 아주 쉬운 언어로 ‘트럭 테러’의 상황을 소개했다. 그리고 “시민들은 더 많은 희생을 두려워하게 되는데 그것이 테러리스트들이 기대하는 점이다. 테러리스트는 자유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 막아야 한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함께 일어서야 한다. 사람들은 희생자를 추모하며 촛불을 켜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본문에 있는 ‘테러 공격’ ‘자유’ 같은 단어를 누르면 그 용어를 쉽게 설명한 보충 해설, 테러 공격과 자유란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 등을 담은 ‘창’이 추가로 뜬다. 더 궁금한 내용은 주소를 적어 온라인에 남길 수 있다. 그러면 답변 자료를 집으로 보내준다. 이 사이트엔 ‘혼란과 분쟁’ 등 다양한 주제의 만화, 쉽게 풀어쓴 정치용어 사전도 실려 있다.
연방정치교육원 홈페이지(www.bpb.de)는 메르켈 총리를 주제로 내세웠다. ‘트럭 테러’가 메르켈 총리의 난민 정책에 대한 논쟁을 뜨겁게 만들 수 있다며, 메르켈 총리가 향후 어떻게 대응할지를 다룬 코너다. 그런데 주제를 다룬 방식이 흥미롭다.
연방정치교육원은 정부 산하 기구이지만, 이번 테러가 독일 정치와 메르켈 총리에게 미칠 영향을 전망하는 유럽 각국의 언론 보도를 다양하게 올려놓았다. 여러 시각의 보도를 제공하고 시민들이 독일 정치 상황을 판단할 수 있게 돕는 것이다. 연방정치교육원이 운영하는 별도의 정치교육 사이트(www.politische-bildung.de)는 유럽에서 일어난 테러에 대해 방대한 정보를 올렸다. 이처럼 테러 사건을 계기로 다양한 정보가 시민에게 제공된다.
온라인을 넘어 동네에는 시민학교(VHS)가 있다. 한국의 주민센터보다 강좌가 다양하다. 베를린의 12개 지역구 가운데 1개 지역구의 1년 교육 프로그램을 설명하는 책자가 보통 200쪽이 넘는다. 심리·철학·종교·역사·음악·미술·춤·요리·외국어 프로그램이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된다.
그 가운데 ‘정치와 사회’ 프로그램도 주요하게 편성돼 있다. 이곳에선 시민들이 민주주의 제도와 정당 운영 방식, 독일의 정치 현안, 유럽과 독일의 관계, 테러와 국제 문제 등 여러 주제의 강의를 듣고 토론한다. 베를린의 크고 작은 집회가 열리는 알렉산더 광장이나 파리저 광장 등 대형 광장뿐 아니라 동네 곳곳에서 정치와 사회 현안을 논하는 ‘작은 광장의 토론’이 펼쳐진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제도인 독일 정치교육의 한 모습이다. 하네스 모슬러 베를린자유대학 역사문화학부 교수는 “독일 정치교육 체계의 강점 중 하나는 정보 접근의 용이성이다. 한두 단계를 거치면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그걸 통해 현안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생애 전반에 걸쳐 학교와 학교 바깥에서 정치교육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습득할 수 있도록독일 정치교육은 한국의 민주시민 교육 용어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 정치교육이 일대 전환을 맞은 시점은 1976년이다. 정치교육을 두고 이념 갈등이 심하던 1976년 좌우 진영을 포괄한 학자와 정치교육 주체들이 독일의 작은 마을 보이텔스바흐에 모여 정치교육 대원칙에 합의했다. 이것이 ‘보이텔스바흐 협약’이다. 협약은 세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정치교육에서 교화 및 주입식 교육을 금지할 것.
둘째, 논쟁이 되는 사안은 논쟁 중인 것으로 그대로 소개할 것(주요 쟁점과 반대 의견을 모두 소개해 의견 차이 자체를 수용하는 태도를 갖추게 하자는 취지).
셋째, 당면한 정치 상황과 자신의 입장을 분석한 뒤 자율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도록 할 것. 그리고 기존 정치 상황을 자신의 이해관계에 부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능력을 키워줄 것.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공식 법규나 지침으로 도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독일 정치교육의 헌법처럼 자리매김했고, 이 협약이 흔들린 적이 없다. 연방정치교육원 운영 사이트(플루터 등)들이 테러에 대해 하나의 결론을 내리지 않고 다양한 정보 제공에 집중한 이유도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 ‘보이텔스바흐 협약’ 때문이다.
내무부 산하 연방정치교육원은 이 협약 준수를 조건으로 정치교육을 하는 단체에 예산을 지원한다. 연방정치교육원은 1년 예산의 최소 60% 이상을 정치교육 주체 지원에 써야 한다. 연방정치교육원은 정치교육을 주도하는 게 아니라 훌륭한 지원자 역할을 할 뿐이다.
연방정치교육원 예산을 지원받아 16개 주 소속 주정치교육원, 각 정당의 정치재단, 교회 등 종교단체, 노동조합, 주정부와 대학·시민단체 주관 시민대학 등에서 학생·청년·성인을 대상으로 정치교육을 진행한다. 주제도 다양하다. 독일 정치체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비롯해 사회복지, 노동, 환경, 빈곤, 인종차별, 사회참여, 지방자치, 다문화, 유로존 위기, 갈등 해결 방법론 등 폭넓은 주제가 다뤄진다.
정치교육 주체들은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원칙을 따라, ‘난 A라는 의견을 갖고 있지만, B와 C라는 의견도 있다. 당신들은 다양한 의견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떤 의견을 갖겠는가’란 형식의 교육을 진행할 수 있다.
학교에선 정치 과목이 운영된다. 독일에는 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정치교육 과목이 있다. 수업에선 지역 현안 사례 토론을 통한 지방자치 운영 실태 학습, 정당을 직접 만들고 선거캠프를 구성한 모의 선거 실습처럼 정치제도를 구체적으로 공부한다.
독일 베를린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한 교민은 “독일에서 수학 확률에 관한 개인 과외를 해주다가 선거와 투표에 관한 정치 상황에 확률을 적용하는 수학 문제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학교 바깥에선 청소년을 위한 많은 정치 포럼이 열린다.
독일 정치교육은 민주주의가 생동감을 잃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민주주의를 습득해야 한다는 이유로 진행되고 있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민주주의자(者) 없이 민주주의는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의 ‘2016 촛불’은 어디로2016년 말, 한국의 전국 곳곳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시민의 촛불은 한국 사회를 진전시킨 힘으로 작용한다. 한국 사회와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학교와 학교 바깥에서, 넓은 광장뿐 아니라 동네 곳곳의 작은 학습 광장에서, 그리고 생애 전반에 걸쳐 정치·사회 현안을 함께 배우고 토론하며 갈등을 조율하는 독일 정치교육 모델도 한국 사회가 참고할 만한 대상이다.
베를린(독일)=글·사진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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