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10월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중국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얼굴을 마주했다. 키신저-저우언라이 대화는 절반 이상이 한반도 문제에 집중됐다.
저우언라이는 키신저에게 ①주한미군 철수시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가능성 ②주한미군 철수 이전 한국군의 북진 가능성 ③북한의 국제적 지위 인정 등 3가지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입장 설명을 요구했다. 키신저는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진출하거나 한국군이 북진하는 일은 없을 것임을 확약하고, 유엔 가입 등 북한이 국제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답변했다. 키신저와 저우언라이는 한반도의 현상유지(status quo)와 소련·일본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저지하는 것이 미·중 양국의 국익과 일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키신저-저우언라이 밀약은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과 1979년 미·중 수교로 이어졌으며, 이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과 맞물려 소련 붕괴로 이어졌다. 1970년대 미국이 중국에 접근해 소련을 흔들었듯이, 이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러시아에 접근해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려 한다.
중국과 러시아 오가는 미국의 진짜 국익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 목표는 다음 세 가지다. 첫째, 미국을 외침(外侵)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 핵무기와 미사일을 포함한 군사력의 우위를 확고히 해야 한다. 둘째,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력균형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날개인 일본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셋째, 안정된 에너지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제3국의 중동 석유자원 장악을 저지하고, 제해권을 유지해야 한다.
이 가운데 한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독일 등 강국들이 위치한 유라시아 대륙에서의 ‘세력균형 유지’다. 특정국이 득세해 유라시아 대륙에서 세력균형이 무너지면 미국의 패권도 종말을 고할 가능성이 크고, 이는 우리나라 안보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유라시아 대륙에서 패권을 추구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중국은 지금까지 러시아와 손잡고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to Asia) 정책에 대항해왔다. 초대국 중국의 부상과 도전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제3제국이나 일본제국, 냉전시기 소련의 도전과는 규모와 성격 자체가 다르다. 중국은 미국과 비슷한 면적에 미국 인구의 약 4.5배에 달하는 14억 인구의 초대국이다. 현재의 국력 증강 속도를 감안할 때 중국이 초대국에서 ‘초강대국’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며, 2030년께는 적어도 서태평양 지역 패권국가가 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의 국익은 변한다백령도∼평택∼군산∼제주도를 연결하는 한국 서해안의 군사전략적 가치가 상승한 것은 2010년대 이후 중국이 미국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군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을 지낸 류화칭(劉華淸)은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이미 중국의 중장기 해양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세계 물동량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해양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중국이 경제 발전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대양 해군’을 보유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류화칭은 일본 오키나와를 기점으로 대만∼필리핀∼인도네시아 보르네오에 이르는 선을 제1도련선으로 정하고, 2010년대 말까지는 이 해역에서 미군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30년까지는 대규모 항공모함 편대를 구성해 오가사와라 제도에서 괌∼사이판∼파푸아뉴기니를 연결하는 제2도련선 해역에서 중국 제해권을 확립해야 한다고 했다. 제2도련선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태평양 최대 팽창선과 상당 부분 겹친다. 1·2도련선은 중국 관점에서 미국·일본으로부터의 해양 방어선을 뜻한다.
그런데 미국이 세력 보존을 위해서라도 서해∼오키나와∼대만∼남중국해 라인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방어선에서 중국이 바라는 제2도련선 동쪽 하와이 라인으로 후퇴하는 게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살아남으려면 중국에 서태평양을 양보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저명한 국제정치학자 로버트 캐플런은 ‘중국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Chinese Power)에서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미국이 국력을 회복하려면 중국에 서태평양을 양보하라고 조언했다. 미국이 중국의 제2도련선에서 하와이 라인으로 후퇴하고, 일본이나 한국 등 동북아시아 국가들보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인도양 국가들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위기의식은 이 정도로 심각하다. 러시아를 활용한 중국 견제 전략도 이런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러시아가 미국의 접근에 호응하고, 미·러 두 나라가 일본과 함께 중국에 압박을 가할 경우 중국의 서태평양 방향 팽창은 지체되고 북한도 더 이상 미국과 러시아, 일본의 포위망에 빠진 중국에만 의존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러시아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줄 것인지다. 미·러 간 나토의 역할과 우크라이나 문제 등에 대한 이견에 비춰 중국 정책과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의 공통된 입장이 찾아질지, 그리고 얼마나 지속될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통일 독일, 소련이 바라는 대로세계는 1970년대 초반 이후 40∼50년 만에 다시 대격변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인도, 나토 등이 모두 뒤엉켜 있는 초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이해 우리나라가 살길은 한반도 내부 문제, 즉 북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한반도 내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우리나라가 강대국들이 뒤엉킨 초불확실성의 세계 정세 변화에서 희생양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27년 전인 1990년까지만 해도 우리처럼 분단된 처지이던 서독은 동독을 어떻게 다루었을까. 한스 디트리히 겐셔 전 독일 외교장관은 독일 통일을 “비구름 뒤에 숨은 태양이 잠깐 얼굴을 내민 짧은 순간을 움켜쥐어 달성한 것”이라고 묘사했다.
겐셔의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일 통일은 도둑처럼 온 것이 아니라 찰나의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독일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인내와 지혜가 만들어낸 결과다. 통독은 콘라트 아데나워(총리·보수)가 이뤄놓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에곤 바르(특임장관·진보)가 설계하고, 빌리 브란트(총리·진보)가 감리했으며, 헬무트 슈미트(총리·진보)가 이를 더 단단히 하고, 헬무트 콜(총리·보수)과 겐셔(외교장관·중도)가 종결지은 독일 민족의 숙명적 과업이었다.
독일 통일의 설계자 바르는 통독은 소련과 함께 가야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서독이 소련이 바라는 대로 동독을 안정시켜야 하며, 동독과 경제협력해 동독 주민의 삶을 개선하고 동·서독 간 경제·문화적 유대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게 바르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그는 이를 ‘접근을 통한 변화’라고 이름 지었다.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積露成海), 변화를 위한 조치가 하나하나 쌓여 결국 통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바르는 게르만 민족주의자이자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바르의 아이디어는 사회민주당 출신 총리 브란트의 지지를 받아 동방정책(Ostpolitik)으로 구체화됐다.
키신저가 독일 통일을 지지한 이유동방정책은 처음에 서독 보수 주류는 물론이고 미국과 영국, 심지어 동독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헨리 키신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동방정책이 독일을 유럽의 중심에 위치시키려는 비스마르크식 외교 책략임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이 동방정책을 반대하면 서독과 여타 유럽 국가 간 관계가 악화되고, 이는 미국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판단해 동방정책을 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브란트 정부는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소련 접근을 시도했다. 브란트의 뒤를 이은 진보 사민당 슈미트 정부, 보수 기독민주/기독사회 콜 정부는 동방정책 이행 과정에서 초강대국이자 우방국인 미국의 핵심 이익에 결정적으로 반하는 정책은 결코 취하지 않았다. 서독은 미국의 의심을 받아가면서 소련과 함께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창설을 주도했다. 동독과 교역을 확대하고, 동·서독 간 왕래를 쉽게 하는 협정도 체결했다. 이는 서독에 대한 동독의 경제 의존도를 높였다. 동방정책은 국내외 정세 변화에 양태를 바꿔가며 1990년 독일 통일 때까지 계속됐다.
한국의 경우 박정희와 전두환 시대에 경제적 토대를 갖추었고, 노태우와 김영삼 시대를 거쳐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에 미국의 의심을 받아가면서까지 노태우 시대에 시작된 북방정책(Nordpolitik)을 한층 더 발전시켜 중국과 북한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명박과 박근혜 시대는 이 흐름을 이어받되 국내외 현실에 맞게 수정해 한반도 안정과 통일 기반을 구축했어야 하는데, 이 시대 통일정책은 오히려 1970년대 초반 이전으로 역행하고 말았다.
우리는 한반도 문제의 항구적 해결을 위한 통일정책을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재정립해, 초불확실성 시대라는 국제 현실에 적응해나가되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 2015년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의하면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을 경우 한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2030년까지 1.5~2.5%에 머물 것이라고 한다.
북한이 아무리 깡패같이 굴어도이미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이 살아남으려면 질과 양, 두 측면에서 모두 탈바꿈해야 한다. 질적 변화는 과학·기술 혁신과 행정·경제·사회 구조개혁에 기초한 경제활성화이며, 양적 변화는 북한 요소를 활용해 경제 규모를 키우는 것이다. 북한은 면적 12만3천km², 인구 2500만 명, 석탄과 철광, 우라늄 등 풍부한 지하자원이 있고, 특히 남한 입장에선 만주와 연해주라는 대륙과 연결되는 교량이다.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되풀이하는 등 아무리 깡패같이 굴더라도 우리는 북한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서독이 동독을 품었듯이 우리도 북한을 품어야 한다. 한국이 당면한 심각한 안보 문제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미국만 바라보는 단선적 대외정책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독일 통일의 책사 에곤 바르가 창안한 ‘접근을 통한 변화’ 역시 대안이 될 수 있다.
우문태(宇文泰) 정치학 박사·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계엄의 밤, 사라진 이장우 대전시장의 11시간…“집사람과 밤새워”
[단독] 윤석열, 4·10 총선 전 국방장관·국정원장에 “조만간 계엄”
[단독] 노상원 ‘사조직’이 정보사 장악…부대 책임자 출입도 막아
“안귀령의 강철 같은 빛”…BBC가 꼽은 ‘올해의 이 순간’
[단독] 비상계엄 전날, 군 정보 분야 현역·OB 장성 만찬…문상호도 참석
‘28시간 경찰 차벽’ 뚫은 트랙터 시위, 시민 1만명 마중 나왔다
롯데리아 내란 모의…세계가 알게 됐다
공조본, 윤석열 개인폰 통화내역 확보…‘내란의 밤’ 선명해지나
28시간 만에 시민들이 뚫었다...트랙터 시위대, 한남동 관저로 [영상]
‘내란의 밤’ 4시간 전…그들은 휴가까지 내서 판교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