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0만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을 실은 배가 폭풍우 몰아치는 밤바다를 무사히 건너 항구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가 필요하다. 뛰어난 선장과 항해사가 있어야 하며, 나침반을 포함한 좋은 장비도 갖추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장과 항해사, 승객 모두 배가 현재 어디에 위치했고, 가려는 항구는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가?
한반도 지정학적 가치의 상승중국의 부상(浮上) 그리고 미국, 일본, 러시아, 유럽연합(EU) 등의 정책 변화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를 초불확실성의 시대로 밀어넣고 있다. 우리는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안전과 번영의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있는지 잘 모른다. 미국은 중국의 서태평양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결속을 강화해왔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동북아시아의 요충지 보하이만(渤海灣)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보하이만은 우리나라의 서한만, 경기만과 연결된다. 중국의 침공을 저지하거나, 반대로 중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모두 한반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격화될수록 한반도의 지정학적 가치는 상승할 것이다.
중국의 부상을 우려하는 일본은 세계 3위 경제대국이자 막강한 군사잠재력(military potential)을 갖췄다. 한국도 지정학적 가치에 더하여 세계 10위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를 배치하여 중국의 동향을 상시 감시하는 한편, 늘 아옹다옹하는 일본과 한국을 화해시켜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게 할 필요가 있다.
한·일 정부의 일본군 ‘위안부’ 합의 타결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사드 한국 배치 문제와 관련해 안보가 허물어지면 경제가 잘돼도 아무 소용 없다는 말이 종종 들린다. 하지만 안보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안보를 위해 당장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지만,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군사력은 오래갈 수 없다. 김훈의 소설 에서 이순신 장군이 말한 것처럼 “닥쳐올 한 끼 앞에서 지나간 모든 끼니는 무효”다. 병사는 먹지 않고 싸울 수 없으며, 전투기와 탱크도 석유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과 일본군이 영·미-소련 연합군에 패한 것은 무엇보다 미국 경제력이 독일과 일본의 경제력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소련이 40년 넘게 지속된 미국과의 냉전에서 패배한 끝에 붕괴한 것도 미국과 군비경쟁을 지탱해줄 경제력이 취약한 탓이었다.
사드 한국 배치 문제와 관련한 중국의 경제적 압박에 대한 대책으로 2012년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 지역인 조어도(일본명 센카쿠, 중국명 댜오위다오) 충돌 이후 일본의 대책을 원용할 수 있을까? 일본은 중국 무역 의존도를 낮추려 노력한 끝에 2011년 19.7%였던 대중 무역 의존도를 2015년 17.5%(대미 의존도는 20.1%)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한국의 대중 무역 의존도는 일본의 5배 이상이다. 일본 사례는 참고가 될 수 없다. 우리의 안보를 위해서는 군사안보의 미국, 경제안보의 중국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의 ‘힘을 통한 평화 구상’중국은 다롄과 상하이에서 2·3·4호 항공모함 추가 건조에 들어갔으며, 남중국해 도서들을 요새화하는 등 서태평양 방향으로 팽창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힘을 통한 평화(peace through strength) 구상’이 도전자로 떠오른 중국을 겨냥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트럼프는 취임 전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은 더 이상 ‘하나의 중국 원칙’에 얽매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중국해 및 북핵 문제 해결과 관련해 ‘하나의 중국 원칙’도 협상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이 1월 초 1호 항공모함 랴오닝함을 대만 해협으로 통과시킨 것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중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주력전투기 J-11 4대와 전략폭격기 H-6K 6대를 동원해 일본과 한국의 방공식별구역(ADIZ)을 침범했다. H-6K 폭격 사정권에는 사드 배치 예정지인 경북 성주도 들어 있다. 중국은 경제적 압박에 더해 군사력까지 동원하여 사드 한국 배치 추진에 반발하고 있다. 한국전쟁시 중국은 미군 주축 유엔군의 38선 돌파를 여러 차례 경고한 다음 개입했다. 중국은 사드가 자국을 겨냥한 ‘미국의 전략무기’라는 이유로 한국 배치에 반대한다.
트럼프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연합이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관계를 약화시키면서까지 러시아 손을 잡으려 한다. 트럼프는 취임 며칠 전 유럽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연합과 NATO로 대표되는 현재 유럽 체제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혔다. 또한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높이 평가하고, 러시아와 관계를 개선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에 대한 각종 제재도 해제할 뜻이 있다고 언급했다. ‘러시아와 연합하여 중국을 제압한다’는 ‘연로제중’(聯露制中) 의도를 표명한 것이다.
동북아시아는 유럽보다 상황이 더 복잡하다. 북한은 정권 생존을 위해 핵과 미사일 개발을 추구하고, 중국은 여전히 ‘북한이 망하면 중국도 위험하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시각에서 북한 붕괴를 우려하며, 미국은 한국에 사드를 배치해서라도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일본 역시 미국을 등에 업고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경학적 시각으로 무역과 환율 등 경제·금융 대책까지 동원해 중국의 팽창을 저지하려 한다.
북핵 문제 해결 위한 회담이 시작되면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은 더 이상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단극 질서가 아니라, 중국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다극 질서로 진입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 격화는 북핵 문제 때문에 불안정한 한반도에 폭풍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이나 중국 어느 한쪽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균형을 상실했을 때 독립도 상실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말고 정세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균형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어렵더라도 우리는 미국과 중국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사드 한국 배치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하면 피해는 우리가 입는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북한의 공세를 막고, 주한미군의 안전도 확보하며, 사드 한국 배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체결로 상징되는 미국 주도의 한·미·일 군사협력 강화가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냐는 중국의 우려도 해소해줘야 한다.
미국과 중국 모두 북한 핵무장에는 반대하므로 북핵 문제 해결 관련 미·중 공조를 이끌어내야 한다. 미국과 중국이 타협해야 북핵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 해결의 문이 열릴 수 있다. 미·중 타협을 기초로 북한을 설득해 동아시아의 모든 나라가 공존하고 번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야 한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이 시작되면 사드 한국 배치 필요성은 줄어들 것이다. 한·미 양국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중국이 북한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한·미 합동군사훈련 조정 △남북대화 추진 △북한 제재 완화 등 조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과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미·일 공동 대응을 어렵게 만드는 일본군 ‘위안부’와 소녀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일본을 설득하여 한국이 일본에 갖고 있는 뿌리 깊은 원한을 해소하도록 해야 한다. 부산 주재 일본총영사관 앞 소녀상 설치와 관련하여 일본이 한국과 통화스와프 협상을 중단하고 주한 일본대사를 귀국시킨 조치는, 일본을 과거에 사로잡히게 하고 한국을 중국 쪽에 서게 할 수 있는 전략적 실수로 이해된다. 중국 역시 경제·군사 레버리지를 총동원한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압박을 즉시 중단해야 한다. 한국의 약점을 이용하여 한국을 미국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뿐더러 중국에 대한 동아시아 인근 나라들의 두려움과 혐오감만 키울 것이다.
시대의 폭풍우에 맞서는 집단지성동서 냉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1975년 소련은 서유럽 전역을 사정권으로 하는 SS-20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배치했다. 이에 대응해 미국은 1983년 신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퍼싱2(Pershing II) 108기를 서독에, 중거리 순항미사일 그리폰(Gripon) 460기를 영국·이탈리아·네덜란드 등에 배치하기로 했다. 미국은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SS-20 미사일 철수와 퍼싱2, 그리폰 미사일 배치 철회를 연동시킨 병행 결정(dual track decision) 협상을 제안했다. 이 협상은 널뛰기를 계속하다 협상 시작 6년 만인 1987년 12월 타결되었다. 냉전이 종식된 1991년에는 사거리 1천~5천km의 모든 미사일이 철수·폐기되었다.
서독 헬무트 콜 총리와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부 장관이 주도한 보수(CDU/CSU)-중도(FDP) 연립정부는 동서 데탕트를 추진해야 독일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하여, 여론을 타면서 미국과 소련의 대타협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서독은 미소 어느 쪽도 크게 실망시키지 않는 외교력을 발휘했다. 우리도 당시 서독과 같은 상상력 풍부한 외교를 해야 한다. 사드 한국 배치 문제와 관련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끼리 편을 가르고, 상대편을 상종 못할 적으로 몰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최고위 외교안보직을 지낸 한 인사는 최근 유력 신문 칼럼에서 사드 한국 배치를 반대하는 이들을 ‘친북 좌파’라고 불렀다. 조선 숙종시대 당쟁이 절정에 이르던 무렵 노론과 소론·남인은 서로 반대당파 인사들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할 정도로 증오했다. 우리의 상대는 북한이나 미국, 중국, 일본이지 우리 내부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고 도착하려는 항구도 같은 우리는 서로를 갈라 칠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외부와 협상에서 유연성과 함께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정부와 기업, 학계 등 사회 모든 분야가 초불확실성이라는 캄캄한 시대의 폭풍우에 맞서 집단지성을 모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다.
우문태(宇文泰) 정치학 박사·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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