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대 미국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3주가 채 지나지 않은 지난 11월28일 새벽, 미국 정가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날린 트윗으로 벌집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오전 5시30분 자신의 트위터에 ‘불법으로 투표한 사람이 수백만 명에 이른다’며 ‘이들을 제외하면 선거인단뿐 아니라 일반 유권자 투표에서도 내가 이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통령 당선인의 유례없는 주장에 미국 언론은 ‘놀랍다’ ‘황당하다’부터 한편으론 ‘뭐, 트럼프니까…’ ‘트럼프답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가 이미 선거운동 기간 내내 언론을 상대로 ‘편파 보도’ 주장을 펴고 ‘선거가 조작됐다’며 결과에 불복할 가능성을 줄곧 내비친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엄격한 투표 관리 규정 도입 잇따라</font></font>
트럼프 당선인의 부정선거 주장에 대해 미국 언론은 근소한 표차로 승패가 갈린 일부 경합주가 재검표에 들어가면서 나온 ‘화풀이성 돌출 행동’으로 풀이했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그동안 부정투표 논란이 주로 투표권 제한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이용돼온 점을 감안하면 훨씬 복잡한 ‘정치적 속내’가 담겼다는 지적이다. 이번 선거에서 부정투표를 막는다는 구실로 투표 절차를 까다롭게 하자 주로 민주당 성향을 보여온 흑인 등 유색인종과 저소득층 밀집 지역의 투표율이 떨어지면서 ‘재미를 본’ 공화당이 앞으로 유권자의 투표권 행사를 더욱 옥죄려는 신호탄이라는 주장이다. 이번 선거 부정 논란이 다음 선거까지 미리 내다본 트럼프의 고도의 정치적 술수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그냥 흘려들을 수만 없는 이유는, 최근 들어 뚜렷해지는 미국 내 투표권 제한 움직임 탓이다.
1965년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을 부여한 미국은 당시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을 제정하면서 인종차별 역사가 있는 남부 16개 주에서 투표 관련 규정을 개정할 때 반드시 연방 법무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명시했다. 이 규정은 그동안 각종 선거에서 투표권과 관련해 흑인 등 유색인종 차별을 사전에 차단하는 주요 안전장치로 기능했다.
하지만 2013년 6월 연방대법원의 판결로 이 규정이 폐기됐고 이후 미국 내에서 유권자 신원 확인을 포함해 투표 관리를 더욱 엄격히 하는 새로운 규정 도입이 잇따랐다. 대표적인 것이 투표자신분증법(Voter ID Laws)과 사전 투표 제한, 그리고 투표소 이전 또는 폐쇄 등이다.
주요 경합주인 위스콘신주, 오하이오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등 14개 주가 투표 제한 규정을 이번 선거에 앞서 새로 도입했다. 명분은 부정투표 방지와 예산 절감이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한국의 주민등록증 같은 공식 신분증 제도가 없어 사실상 유일한 신분증인 운전면허증이 없는 소수계 유권자가 의외로 많다. 이런 현실을 감안하면 새 선거 규정 아래서 이들이 투표 참여를 제한받을 가능성은 불 보듯 뻔했다.
유색인종의 투표권 차별을 금지한 규정이 50년 만에 사라진 뒤 처음 치러진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는 예상대로 해당 지역에서 흑인과 저소득 빈민층의 투표 참가율이 대폭 감소했다. 진보 성향 주간지 (11월15일치)은 트럼프가 2만225표 차이로 승리한 위스콘신주의 경우 이번 대통령선거 투표율이 지난 20년 동안 최저였다고 보도했다. 특히 주내 전체 흑인 유권자의 70%가 밀집한 밀워키의 경우 투표 참가자가 지난 선거에 비해 5만2천 명이나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흑인과 빈민층 투표 참가율 대폭 감소</font></font>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 모두가 힐러리 클린턴 후보에게 투표했을 거라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민주당 색채가 짙은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율 감소가 트럼프 후보에게 결코 불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은 투표장에서 신원 확인을 위해 제시해야 하는 운전면허증 등 신분증이 없어 투표를 포기해야 하는 유권자가 위스콘신주에서만 30만 명에 이른다고, 법원자료를 근거로 밝혔다. ‘투표자 신분증 법’이 트럼프 당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11월7일치) 역시 노스캐롤라이나주 381개 카운티를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이번 선거를 위해 설치된 투표소 수가 2012년 대비 868곳이나 감소했다고 보도했다. 대법원 판결 이전에는 예산 절감을 이유로 흑인 밀집 선거구의 투표소 수를 줄이는 게 불가능했지만 이제는 거의 제지를 받지 않게 된 결과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투표권 제한 분위기가 앞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일찌감치 트럼프 지지를 선언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초대 법무장관에 지명된 제프 세션스 상원의원은 1980년대 중반 앨라배마주 검찰총장 재직 때 흑인 인권단체를 부정투표 혐의로 기소한 전력이 있다. 당시 그는 흑인 밀집 선거구에서 부재자투표를 지원하던 활동가들을 선거 부정 혐의로 몰아 재판정에 세웠다. 약 170만 표의 부재자투표를 전수조사했지만 부정투표로 의심할 만한 투표는 겨우 14표에 불과했다. 무리한 기소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당시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무죄선고로 뜻을 이루진 못했다.
세션스가 연방 법무장관으로서 유색인종에 대한 투표권 차별 시도를 앞장서 막아낼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민권운동가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 첫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역시 흑인 최초로 법무부 수장에 임명된 에릭 홀더 장관이 차별적인 투표권 제한 움직임에 적극 맞섰던 것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리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미약한 투표권 확대 움직임</font></font>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연방 상하원은 물론 주지사와 주의회까지 장악하는 압승을 거둔 점 역시 소수계를 겨냥한 투표권 제한 강화를 예고한다. 공화당은 절반 정도의 주에서 주의회 상하원 다수당을 차지했고 주지사까지 배출했다. 반면 민주당은 ‘전통적 표밭’인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6개 주에서만 주의회와 주지사직을 장악했다.
공화당 장악 주에선 이미 새로운 투표권 제한 움직임이 꿈틀대고 있다. 미주리주는 사진이 부착된, 정부 발행 신분증을 지참해야 투표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했다. 위스콘신주는 사전 투표 기간을 단축하는 법 개정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연방의회도 예외는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자리를 놓고 트럼프 당선인과 막판까지 경합했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연방선거에서 투표하려면 출생증명서 또는 여권 같은 시민권 서류를 제시하도록 규정한 법안을 발의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미약하지만 민주당색이 짙은 주의 경우 투표권 확대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버지니아주에선 선거를 앞둔 지난 4월 투표권이 박탈된 중범죄 전과자의 투표권을 회복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버지니아주는 이번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함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한 팀 케인 상원의원이 주지사를 지낸 곳이다. 당시 조치로 1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고 형기를 다 채운 뒤 출소했지만 투표권을 영구 박탈당한 20만여 명이 이번 선거에서 잃어버렸던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었다.
버지니아주는 아이오와주, 켄터키주, 플로리다주와 함께 1년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은 중범죄 전과자의 투표권을 영구 박탈해온 4개 주 가운데 하나였다. 민주당 소속 테리 매콜리프 버지니아 주지사는 전과자의 투표권 박탈 규정이 노예해방 직후 자유를 획득한 흑인들의 투표 참여를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였다며 ‘끔찍한 역사’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월25일치)는 그동안 버지니아주에 살고 있는 흑인 유권자 5명 중 1명꼴로 투표권을 박탈당했다며 매콜리프 주지사의 결정을 ‘역사적’이라고 치켜세웠다. 이 밖에 민주당 텃밭으로 분류되는 캘리포니아주가 투표일로부터 3일 안에 도착하는 우편투표를 인정하기로 하는 등 투표권 확대 규정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투표권 제한 흐름에 비해 상대적으로 움직임이 미약한 실정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부정선거’ 논란은 현재진행형</font></font>일부이지만 주별로 따로 진행되는 유권자 등록과 관리 등 현행 자치 선거제도 아래서 부정투표 가능성 역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이번 대통령선거에서도 일부 방송사가 최근 주 경계를 넘어 이사한 유권자가 이전 주소지와 새 주소지에서 동시에 투표 통지를 받은 경우가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이 주장하듯 수백만 명이 불법 투표하는 등 조직적인 선거 부정이 이뤄진 정황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 당선인 역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내놓지 않았다. 그동안 유색인종과 저소득층의 투표권 확대를 지지해온 민권단체들은 오히려 공화당이 주도해온 투표권 제한 움직임 자체가 사실상 부정선거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트럼프 후보가 선거운동 기간 내내 입에 달다시피 했고 당선 뒤에도 되뇐 ‘부정선거’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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