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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이후 ‘노동자 통제’ 없는 사회주의 비판한

러시아 혁명정부 노동인민위원 실리아프니코프
등록 2017-02-15 21:50 수정 2020-05-03 04:28
볼셰비키 경제체제의 대원칙은 ‘노동자가 공장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은 대개 인텔리겐치아였다.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왼쪽)는 금속노동자 출신 ‘혁명의 양심’이다. pinterest.com

볼셰비키 경제체제의 대원칙은 ‘노동자가 공장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역설적으로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은 대개 인텔리겐치아였다.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왼쪽)는 금속노동자 출신 ‘혁명의 양심’이다. pinterest.com

2017년은 러시아 ‘10월혁명’ 100주년이다. 21세기에 100년 전 사회주의 혁명을 돌아보는 우리의 감회는 복잡하다. 신자유주의 위기 속에 대안을 찾아 헤매는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10월혁명 같은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한 때인지 모른다. 그러나 작금의 혼란을 낳은 전 지구적 반동은 실은 이 혁명에 건 기대가 환멸로 바뀌면서 대세가 됐다. 혁명의 대의에 공감하더라도 그 실제 역사를 비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10대 후반 공장노동자가 받아든

혁명 주역이면서 혁명 이후 체제의 변질을 고발한 인물로는 레온 트로츠키나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이 거명된다. 이들은 모두 지식인 출신이었다. 혁명의 양심 중에서도 이들과 대비되는 인물이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아니라 금속노동자였다. 볼셰비키가 대변한다고 한 바로 그 노동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실리아프니코프는 1885년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300km 떨어진 무롬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 때문에 9살 때부터 공장노동을 했다. 그러다 숙련 노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수도 페테르부르크로 떠났다. 뒤늦은 산업화와 함께 늘어나던 러시아 노동계급 1세대의 전형적 삶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선배 노동자가 하도 손을 많이 타서 너덜너덜해진 인쇄물 하나를 건넸다. 제호는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비롯한 사회민주노동당 망명 활동가들이 내던 정치신문이었다. 차르 정부의 탄압 때문에 외국에서 만들어 몰래 들여오던 신문이 공장노동자에게까지 닿은 것이다. 그 노동자 중 한 사람이 10대 후반의 실리아프니코프였다.

곧이어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의 물결이 청년노동자 실리아프니코프를 덮쳤다. 시위 참여 혐의로 구속 중이던 그는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활동가와 만났다. 이 인연을 계기로 그는 당시 논쟁을 거듭하던 사회민주노동당의 두 분파 중 (멘셰비키가 아닌)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을 더 강조하는 볼셰비키 쪽이 성미에 맞기도 했다.

왕성한 학습욕과 실천 의지에 불타는 젊은 숙련 노동자는 당 처지에서도 대환영이었다. 불과 22살에 실리아프니코프는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 조직 간부가 됐다. 지하정당 간부가 된다는 건 출세라기보다 고생길이었다. 1908년 그는 스위스의 레닌에게 당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프랑스 위조 여권을 들고 조국을 떠났다. 레닌을 면담하고 나서 그가 정착한 곳은 파리였다.

지식인 출신 혁명가들은 망명 중에도 대개 자기들끼리 돌려보는 신문에 글을 쓰거나 끝없이 논쟁을 벌이는 데 몰두했다. 그러나 노동자인 실리아프니코프는 달랐다. 그는 프랑스의 금속 사업장에 취직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프랑스 노동운동에도 가담했다. 덕분에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달리 서유럽 노동운동을 깊숙이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노동자들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서유럽 노동운동의 전통과 조직 내 민주주의에 동화됐다.

1914년이 되자 러시아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노동 현장이 다시 끓어올랐다. 1905년 혁명이 재발할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볼셰비키 국내 조직은 노동운동 경험을 지닌 간부가 절실히 필요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이름이 실리아프니코프였다. 이제 막 30대를 앞둔 그는 드디어 귀국길에 올랐다.

볼셰비키의 대원칙 ‘공장은 노동자가 통제한다’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오른쪽 사진 맨 왼쪽)는 노동 대중이 참여하고 결정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추구했다. 바바라 알렌은 그의 책(왼쪽 사진)에서 실리아프니코프의 투쟁을 이야기했다. pinterest.com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오른쪽 사진 맨 왼쪽)는 노동 대중이 참여하고 결정하는 사회주의 체제를 추구했다. 바바라 알렌은 그의 책(왼쪽 사진)에서 실리아프니코프의 투쟁을 이야기했다. pinterest.com

그가 귀국하고 얼마 안 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혁명이 아니라 제국주의 전쟁이 터진 것이다. 실리아프니코프는 잠시 스웨덴으로 망명했지만 국내에서 전쟁에 대한 염증이 커져가자 1916년 가을 다시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당 조직을 재건했다.

그러고 나서 불과 몇 달 뒤 2월혁명이 발발했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실리아프니코프는 감옥 밖 최고참 당원으로서 수도의 볼셰비키 조직을 책임졌다. 젊음을 다 바친 커다란 꿈, 노동계급 혁명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2월혁명으로 열린 공간에서 실리아프니코프는 페테르부르크 금속노동조합 결성에 앞장섰다. 4월 노동조합 설립 뒤 첫 사업은 경제 혼란 속에 실직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주는 것이었다. 두 달 뒤 페테르부르크 조직을 중심으로 전 러시아 금속노동조합이 건설됐다. 실리아프니코프는 멘셰비키 소속 후보와 경합해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금속노조는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사용자협회와 산업별 단체협상을 벌였다. 금속노조 집행부가 단체협상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은 저임금 미숙련·반숙련 노동자의 임금 인상이었다. 사용자협회가 임금 인상안을 거부하자 금속노조는 총파업을 준비했다.

임시정부와 너무 일찍 부딪치길 꺼린 볼셰비키 집행부는 오히려 총파업을 만류했지만 금속노조는 완강했다. 결국 8월에 임시정부의 중재로 금속노조 요구를 상당히 받아들인 협약이 체결됐다. 이 승리 덕분에 페테르부르크 금속노조는 7만 명이던 조합원이 10월까지 19만 명으로 늘었다. 이들이 수도에서 10월혁명을 뒷받침한 노동계급 기반이 됐다.

10월혁명이 성공하자 실리아프니코프는 혁명정부의 노동인민위원(장관 격)이 됐다. 노동인민위원이 되자마자 그는 레닌과 함께 혁명정부의 첫 포고령 중 하나를 작성했다. 공장은 노동자가 통제한다는 포고령이었다. 이때만 해도 혁명 후 볼셰비키의 경제체제 대원칙은 ‘노동자 통제’였다. 사회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직접 생산 활동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관료기구가 지령을 내린다는 생각은 애당초 없었다.

혁명 이후 체제 동원 대상으로 전락한 노동자

볼셰비키를 지지한 노동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사업장마다 노동자들이 공장위원회를 조직했다. 공장위원회는 노동자가 기업을 관리하는 대의기구였다. 1918년 초 모스크바에서는 총 288개 공장 중 222곳에서 공장위원회가 경영을 책임졌다. 한편 금속노동조합 같은 산업별 노동조합이 속속 건설됐다. 노동조합도 산업 전반의 운영 방향을 놓고 사용자와 협상했다.

이 무렵 쟁점은 노동자 통제의 중심 기관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레닌은 공장위원회라고 했고, 실리아프니코프는 산업별 노동조합을 강조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노동 대중 스스로 경제활동을 관리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공통 원칙이었다.

그러나 혁명정부와 반혁명 무장세력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전시 경제 운영을 위해 정부는 공장위원회 대신 전문경영인에게 기업을 맡겼다. ‘계획’이라는 이름 아래 관료기구의 권한이 막강해졌다. 공산당(볼셰비키의 새 당명) 간부들 중에는 이런 체제를 ‘전시 공산주의’라며 찬양하는 이들도 있었다. 붉은군대를 지휘해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는 노동자를 군대처럼 조직해서 생산성을 높이자고 주장했다. 노동자는 점점 체제의 주인이 아니라 동원 대상이 됐다.

실리아프니코프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것은 프랑스 망명 시절 경험한 노동자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노동계급 혁명으로 이루려 한 이상이 결코 아니었다. 내전이 끝나가던 1920년 말 그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공산당원들을 모아 ‘노동자 반대파’를 조직했다. 망명 시절 실리아프니코프의 연인이던 저명한 여성 혁명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도 이들과 함께했다. 관료가 아니라 노동자가 경제를 통제해야 한다는 게 노동자 반대파의 강령이었다. 그들에게 노동 대중의 참여와 결정권이 없는 체제는 사회주의가 아니었다.

레닌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자들은 노동자 반대파가 해당 행위를 한다고 몰아세웠다. 한때 당연시되던 이상이 이제는 분파주의라 비판받았다. 1921년 실리아프니코프는 당의 강압에 전 러시아 금속노동조합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사망하기 직전에야 레닌은 점점 더 비대해지는 관료기구에 불안감을 느꼈다. 부랴부랴 대안을 마련하려 했지만 이미 병석에 누운 그가 어찌 해볼 상태가 아니었다. 노동자를 군대처럼 조직하자던 트로츠키는 레닌 사후에야 관료주의에 맞서 투쟁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거대한 당-국가 조직을 장악한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노동자 반대파가 그토록 우려하던 관료 주도 질서는 스탈린 시기에 국가사회주의 체제로 굳어졌고, 한동안 많은 사람이 이 체제를 사회주의 교과서로 여겼다. 분명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바란 결말은 아니지만, 이들이 위기 순간마다 내린 잘못된 결정과 무관한 결말도 아니었다.

‘스탈린 체제’를 사회주의가 아니라 한 죄

70여 년 만에 이 체제는 무너졌다. 한때 많은 사람이 믿은 것처럼 국가사회주의가 혁명의 유일한 길이었다면 이제 와서 한 세기 전 혁명을 굳이 다시 불러낼 이유는 없다. 그러나 다른 길을 가리킨 이들이 있었다. 그 맨 앞에 실리아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가 있었다. 러시아혁명을 망각할 수만 없는 까닭이다.

스탈린 시절 실리아프니코프는 두 차례 체포됐다. 그는 정권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고 현 체제를 ‘사회주의’라 인정하길 거부했다. 필시 그것이 죽음의 이유였을 것이다. 1937년 가을 어느 날, ‘사회주의’ 정권은 모스크바에서 알렉산드르 실리아프니코프의 총살형을 집행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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