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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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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과학

1970년대 칠레 사회혁명에 컴퓨터 연결망 활용…

정치·경제 조직혁명 구현한 영국인 스태퍼드 비어
등록 2017-03-03 15:17 수정 2020-05-03 04:28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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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의 걱정거리 중 하나는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새 활로를 열려면 자동화가 불가피하다고 한다. 자동화되면 그만큼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이 맡는 몫은 줄어든다. 그렇다면 실업대란 역시 피할 수 없다. 좁은 의미의 공장만 문제가 아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등장하면 운수 노동자들은 어찌 될 것인가?

이쯤 되면 과학기술 발전과 인간 행복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문명은 과학기술 발전이 곧 인간 행복 증대라는 믿음과 함께 성장했다. 이 믿음은 20세기 들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핵전쟁 가능성과 생태계 위기 앞에서 19세기의 낙관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한데 이제 정보화와 자동화가 결합돼 일으키는 해일 앞에서 이 의심과 불신은 한층 깊어진다. 과학기술 발전은 인간에게, 적어도 부나 권력과 거리가 먼 다수 서민에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걱정거리만 던져줄 뿐인가?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사이버네틱스’로 이름 날린 30대 대기업 경영 자문역

다른 가능성을 시사하는 20세기의 몇몇 실험이 있다. 그중 한 사례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라는, 지금은 낯선 단어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최근 ‘인공지능’이니 ‘제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말이 유행인데, 1950년대에 이런 유명세를 탄 신조어가 ‘사이버네틱스’다.

사이버네틱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쏭달쏭하기만 하다. 4차 산업혁명처럼 논자마다 자기 좋을 대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일단 사이버네틱스의 창시자로 알려진 미국 수학자 노버트 위너는 “생물과 기계를 아우르는 통제와 소통 체계를 연구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실제로 사이버네티션이라 자칭한 학자들은 유기체를 연구해서 그 원리를 기계와 사회 체계에 적용하려 했고, 역으로 정보·체계 등의 개념을 유기체에 적용해 생물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사이버네틱스라는 간판 자체는 이제 망각의 대상일 뿐이다. 더 이상 사이버네티션이라 불리는 학자는 없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를 넘나들고 사회과학으로까지 확장된 학제 간 연구의 선구였다. 오늘날 정보화·자동화 물결을 낳은 기초 이론들은 바로 이 연구의 산물이다. 사이버네틱스 시도가 없었다면, 컴퓨터는 발전했을지 몰라도 인터넷 등장이 늦었을 테고 당연히 네트워크 사회도 도래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이버네틱스 전도사들 중 경영학 쪽 선두 주자는 영국인 스태퍼드 비어(1926~2002)다. 그는 30대 젊은 나이에 대기업 유나이티드 스틸의 경영 자문역이 돼 이름을 날렸다. 사이버네틱스의 여러 착상을 기업 조직에 응용하는 게 그의 전공이었다. 덕분에 그는 명성뿐만 아니라 부도 누렸다. 교외의 근사한 저택에 살며 롤스로이스를 몰았다.

하지만 비어에게는 뭔가 주류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대기업에서 일할 때도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다녔고, 경영학과 컴퓨터뿐만 아니라 문학과 동양종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직업과 어울리지 않게 사회주의자라 자처했고, 늘 노동당에 투표했다.

주류에서 가장 벗어난 것은 사이버네틱스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이었다. 이 무렵 많은 사람이 사이버네틱스를 조지 오웰의 소설 을 앞당기려는 시도쯤으로 바라봤다. 컴퓨터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통제하는 초중앙집권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미국 국방부와 랜드연구소는 컴퓨터에 바탕을 둔 상명하달식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데 혈안이 됐다.

갑작스러운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초청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본가 파업을 막는 데 스태퍼드 비어의 ‘사이버신’이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칠레에서 벌어진 자본가 파업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모습. www.counterfire.org

칠레 인민연합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본가 파업을 막는 데 스태퍼드 비어의 ‘사이버신’이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칠레에서 벌어진 자본가 파업에 맞서는 노동자 민중의 모습. www.counterfire.org

비어의 구상은 이들과 정반대였다. 그는 컴퓨터를 서로 연결해 연결망의 어느 곳에서든 모든 정보를 공유하길 바랐다. 그러면 중앙과 지역이 따로 없게 된다. 지역 정보가 중앙에 비해 제약되는 것도 아니고, 중앙만이 정보를 취합해 결정을 내릴 능력을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어떤 단위든 공동 결정자가 될 수 있다. 비어는 이런 정보 흐름을 ‘데이터 고속도로’라 표현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정보 초고속도로’의 시초다.

비어는 중앙집권적 관료 체계를 넘어설 ‘조직 혁명’을 꿈꿨다. 그의 거래 상대이던 대기업들은 좀처럼 이런 실험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응답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낯선 나라, 대서양 건너편 칠레에서 왔다. 이때 이 나라에서는 또 다른 혁명, ‘사회혁명’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1970년 칠레 대통령선거에서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가 당선됐다.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성한 선거연합인 인민연합은 구리 광산과 주요 대기업의 국유화를 공약했다. 구리는 칠레 수출품의 3분의 2를 차지했지만 정작 구리 광산을 소유, 운영한 것은 미국계 다국적 기업들이었다. 아옌데 후보는 미국과 대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구리 광산을 국민의 자산으로 되찾고 민주적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집권한 뒤 그는 이 약속을 충실히 이행했다.

그런데 막상 구리 광산 국유화를 단행하고 국영기업을 확대하자 운영이 문제가 됐다. 인민연합 정부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여기지 않았다. 국가가 계획을 수립, 집행하더라도 노동자가 경영에 적극 참여하는 시스템을 원했다. 집중적 기획과 분권적 참여의 공존을 바랐다. 전례 없는 구상이었다. 그래서 난감했다.

당시 겨우 27살이던 인민연합 경제전문가 페르난도 플로레스는 사이버네티션 중에도 이단적 구상을 내놓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무턱대고 접촉을 시도했다. 바로 비어였다. 플로레스는 비어가 직접 칠레에 와서 인민연합 정부의 경제 운영 시스템 구축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놀랍게도 비어는 이 초청에 응했다. 그는 칠레 사회혁명에서 자신의 조직 혁명 구상을 실현할 기회를 봤다. 1971년 말이었다.

‘자본가 파업’ 무력화한 경제 운영 시스템 ‘사이버신’
스태퍼드 비어가 구상한 사이버신의 모델. 그는 한 노동자로 시작해 전 국가적 조직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의 연결과 소통을 구상했다. www.irevolutions.org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스태퍼드 비어가 구상한 사이버신의 모델. 그는 한 노동자로 시작해 전 국가적 조직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층위의 연결과 소통을 구상했다. www.irevolutions.org (*이미지를 누르면 확대됩니다.)

아옌데 대통령을 면담한 뒤 비어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비어와 플로레스는 경제학도, 공학도들과 팀을 결성해 컴퓨터를 활용한 경제 운영 시스템을 짜기 시작했다. 핵심은 국영 사업장들과 각 지역에서 입력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해 역동적으로 생산계획을 수립·집행한다는 것이다.

비어 팀은 정보를 공유할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논의할 중앙통제실을 설계했다. 그들은 이 시스템에 ‘프로젝트 사이버신(Cybersy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스페인어로는 ‘프로??토 신코’였다). 사이버신은 ‘사이버네틱스’와 ‘시너지’의 합성어다. 시너지에는 각 부분의 정보들이 취합되면 이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전체 지평이 열린다는 철학이 담겨 있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세상의 시각에서 사이버신은 지극히 원시적 시스템이다. 당시 칠레에는 전화조차 널리 보급되지 않아 정보를 입력할 때 텔렉스(전신)망을 활용했다. 중앙통제실이라고 해봐야 둘러앉아 모니터 하나를 바라보는 식이었다. 취합된 정보를 바탕으로 모니터에 뜨는 도표나 그래프도 몇 가지 안 됐다.

비어의 구상은 21세기를 내다봤지만 이때는 아직 1970년대였다. 인터넷의 출발이 된 미국의 아파넷도 이제 막 걸음마 단계였다. 비어가 칠레에 첫발을 디딘 1971년에 아파넷으로 첫 번째 전자우편이 전송되고 있었다. 전국에 걸쳐 컴퓨터가 고작 50여 대에 불과했던 칠레에서 사이버신 정도의 결과물을 냈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사이버신은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다. 1972년 가을 아옌데 정부를 전복하려는 자본가 파업이 벌어졌다. 트럭 운송업자들이 파업에 앞장서서 물자 수송이 마비됐고, 경영진이 출근하지 않아 공장이 멈췄다. 그러나 곧바로 노동자들이 경영진 없이 공장을 재가동시켰다. 연관 기업의 생산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쉽게 생산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텔렉스망으로 정보를 공유한 사이버신 덕분이었다.

사이버신의 성과에 고무된 비어는 더 야심찬 구상을 내놓았다. 이 구상에 그가 붙인 이름은 ‘사이버포크’(Cyberfolk). ‘포크’는 민중을 뜻했다. 사람들이 정부에 의견을 제출하면 사이버신의 정보처럼 어디서든 공유되고 정부는 이 의견에 실시간 반응하는 시스템이다. 개인용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네트워크를 통해 직접민주주의를 활성화하려는 21세기의 흐름을 한 세대도 더 전에 예견한 셈이다.

그러나 비어와 칠레 민중의 꿈은 돌연 중단됐다. 1973년 9월11일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칠레의 합법 정부가 무너졌다. 아옌데 대통령은 쿠데타 군에 끝까지 맞서다 자결했다. 이와 함께 사이버신 실험도 중단되고 말았다.

과학기술의 다른 방향성 막는 힘

이후 비어의 삶은 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는 칠레 동지들이 해외로 망명하도록 도왔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이버신의 이상을 알리고 새로운 프로젝트로 이어가려 했다. 부유한 명사의 삶과 작별한 그는 상수도도 없는 웨일스의 외딴 시골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가고 난 지금, 세상은 사이버신 구상과 닮은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첨단 과학기술에 당황하고 있다. 이 기술은 일하는 사람들을 내쫓는다. 그러나 비어와 칠레 민중이 ‘시작한’ 다른 방향도 있다. 이 기술은 일하는 사람들을 참여시킨다.

칠레의 사례는 우리에게 증언한다. 민중을 위한 과학기술은 가능하다. 단지 이것을 원치 않는 힘이 지금껏 이 가능성을 막아왔을 뿐이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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