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륜에 대한 살처분 ‘국가주의’

나치 수용소 ‘절대 증언자’ 엘리 위젤

인간성 파괴 막을 성찰·자유·저항 절실　

루마니아 태생 미국의 유대계 작가이자 교수인 엘리 위젤은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극적으로 생존했다. 그곳에서 ‘우연’으로 살아난 그는 인간성을 파괴한 국가주의에 온몸으로 맞섰다. EPA 연합뉴스

최고 권력의 공백 기간을 뜻하는 ‘인터레그넘’(inter-regnum)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구시대 적폐를 청산하자며 여러 개혁안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현상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그런데 시민단체와 야당이 내놓은 개혁 과제를 살펴보면 하나의 이름 아래 묶을 수 있는 것들이 눈에 잡힌다. 바로 ‘국가주의 청산’이다.

한국 국가주의의 특징은 이것이 나라 곳곳에 여러 형태로 편재해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제도와 법에 내재됐고, 기업 운영 방식과 대중문화에도 스며 있다. 서울 종로구(청와대의 블랙·화이트 리스트)에 있는가 하면, 서초동(공안검찰, 국가보안법), 용산 참사에도 그 흔적이 있다. 금강(4대강 사업)에도 있고, 군산(새만금 개발), 평창(평창겨울올림픽과 가리왕산의 피폐화), 성주(사드 배치), 경주와 부산(월성·고리 원자력발전소), 제주(4·3항쟁, 미 해군기지를 위한 구럼비 파괴), 진도(세월호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책임 방기)에도 있다. 더 극단적으로는 철원, 양주, 부평(3사단·26사단·33사단 등지에 있던 삼청교육대)에 굵직한 발자국을 남겨놓았다. 한마디로 전국에 있다.

이것은 강당과 교실(국민의례·국정 역사 교과서)에까지 침투했고, 심지어 광화문광장에도 깊숙이 손을 뻗치고 있다. 광화문광장은 국가폭력의 희생자 고 백남기 농민만 함축하지 않는다.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나 이들에게 돈줄을 대준 재벌만 지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소수자·외국인 노동자를 경원시하는, 또는 학교와 군대에서 군사주의를 훈습한, 촛불 든 어떤 시민들의 심성과 감성까지 지시한다. 이것은 TV에도 스마트폰에도 출몰한다. 류현진(프로야구)부터 박상영(펜싱)까지 ‘진라면’을 광고하는 국가대표들, 안정환부터 박지성·손흥민, 김연아와 손연재, 그리고 최근 한강(작가)까지 국익을 선양한 ‘국가의 얼굴들’ 말이다. 국가주의는 한반도 남쪽에서 정말로 유비쿼터스하다.

한반도 남쪽, 유비쿼터스 국가주의

국가주의란 개별자나 지역공동체의 권익이 아니라 국가의 이익과 품격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후자가 전자를 보장하고, 후자를 위해 전자가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이데올로기다. 이 이데올로기가 한국 땅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암송하게 했던 박정희 정권에 의해 뿌리를 깊이 내렸지만 그렇다고 박정희와 주변 인물 몇몇이 완성한 것은 아니다. 국가주의는 이데올로기에 순응하고 그것을 내면화한 동조자들, 그러나 광범위한 층의 동조자들 없이는 제도로서도 문화로서도 성립되지 않는다.

독립된 판단력과 행동이 부재하는 개별자,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분위기에 쉽게 동조하고 마는 개별자, 자기 이익이 모든 판단의 준거가 되는 개별자, 자기 이익과 ‘국익’(또는 민족의 이익)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국익이라는 명분과 다른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쉽게 맞바꿀 준비가 된 개별자, 그리고 이들을 동원하는 ‘대를 위해 소는 희생돼도 좋다’는 위험한 사상…. 오늘날 이 나라에 여전히 존재하는 고질적 문제를 극단적 국가주의의 참상을 폭로한 기록물들이 성찰하게 해준다.

1944년 봄부터 1945년 봄까지 아우슈비츠와 부나(Monowitz-Buna) 수용소의 삶을 기록한 엘리 위젤(Elie Wiesel, 1928~2016·노벨평화상 1986년 수상)의 기록문학 (Night)은 귀중한 인류 자산이다. 과연 이 문학작품인가? (55권이 넘는 책을 썼지만) 단 한 권의 책을 써야 한다면 바로 이 책을 썼을 거라며 위젤이 지목한 은 당시 그가 게토(특정 인종·종족·종교집단을 격리하는 시설)와 수용소들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 치욕 어린 생존 그 자체의 복사본이다. 즉, 어떤 삶의 복사본이다. 거기엔 그곳에서 그의 삶을 가능하게 한 다른 모든 이들, 동조자와 피해자의 삶도 복제해 보관됐다.

나치 수용소 생존 기록

엘리 위젤은 자전적 책 <밤>(Night)을 통해 홀로코스트를 고발했고, 1986년 노벨평화상 수상(맨 오른쪽 사진) 뒤 “침묵은 가해자에게 힘을 준다”며 국가에 대한 ‘저항’을 말했다. 엘리 위젤 기념재단

그렇다. 이 우리에게 가장 먼저 일러주는 사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단순히 집단 처형용 공장이 아니라 연천과 철원, 화천과 양구, 인제 등지의 군부대가 그러하듯 특정한 삶이 흘러가던 장소였다는 점이다. 그곳엔 집단노동과 이를 선별하는 절차가 있었다. 머리를 깎이고, 새 의복을 지급받고, 새 번호를 부여받는 일련의 절차는 한국의 옛 중·고등학교, 지금의 군대와 교도소 절차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전기공·목공·시계공 등 좋은 직능군으로 선별된 사람, 좋은 노동그룹(코만도)에 속한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더 잘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선별’ 작업을 통과하지 못하면 가게 되는, 죽음으로 통하는 길을 더 잘 피할 수 있었다. 누가 어느 코만도에 속할지 정한 건 바로 카포(수감자이자 동시에 감시인)였다. 어떤 감시인, 간부들은 어린이를 좋아했는데 동성애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인 치과의사는 수감자의 입을 벌려 금이빨을 찾느라 분주했다.

은 그곳이 ‘독일인 압제자 대 유대인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대치의 세계가 아니라 다층 위계질서 사회였음을 알려주는데 이 점도 주목을 요한다. 게슈타포, 친위대(SS), 라거슈츠(수용소 경찰), 블록앨테스터(막사 반장), 슈투벤디스트(막사 행정 담당 수감자), 카포(라거앨테스터, 감시원이자 수감자), 특정 기술 수감자, 일반 노동력 수감자, 노동불가자(신체 허약 수감자·살처분 대상자). 이러한 분명한 위계질서는 이사, 본부장, 실장, 부장, 과장, 대리, 주임, 사원, 임시직 사원, 파트타임 계약노동자, 합법 외국인 노동자, 불법 외국인 노동자, 실직자 층으로 이루어진 위계질서와 얼마나 닮은꼴인가.

나치 수용소만의 특징이 있다면 특정 인종을 사실상 열등인류, 하등동물로 분류하고 그들을 살처분해도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과격한 생각,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생각은 한국인은 유럽인보다 우등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필리핀이나 베트남인보다는, 아니면 이슬람인보다는 분명 우등한 종족이라는 생각과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

그러나 위젤의 경험으로 그때 그곳의 삶은 다른 때, 다른 시간의 삶과 현격히 다른 종류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한 첫날 그는 아기와 어린이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풍경을 목격하는데 그날 밤으로 인해 자신의 나머지 삶이 “하나의 긴 밤”이 되었다고까지 말한다. 수용소는 몽둥이가 목소리보다 우위에 있던 세계였고 광기와 반(反)인간의 세계였다. 그것은 현실이라기보다 차라리 꿈이었다. “오직 그것을 경험한 이들만이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개정판 서문) 세계.

광기와 반인간의 세계

위젤은 1928년 루마니아 국경지대의 한 소박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대인 랍비의 후손이었는데 부모 역시 독실한 유대교도였다. 유대교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마을공동체, 가족공동체 환경에서 자랐다. 모든 것이 어그러지기 전 그는 이곳에서 유대교 경전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1944년 봄 그의 나이 열다섯, 마을은 게토로 지정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주민은 국경을 넘어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된다.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 여동생과 헤어져 아버지와 남았다. 1945년 4월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해방되었을 때 생존자는 오직 그뿐이었다. (어머니와 여동생은 가스실에서 처형, 아버지는 병사했다.) “빵과 숲이 곧 내 삶의 전부”()인 삶을 살다가 부헨발트에서 해방됐을 때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개정판 서문)

위젤의 특별한 경험담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극단적 국가주의의 화신인 나치의 사상과 계획, 실행은 결코 과거에 있던 역사의 기형아가 아니라는 것이 한 가지다. 모든 전쟁에서 일어난 처형과 살인은 ‘인종적·민족적 차별화’라는 합리화 기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즉, 저쪽 편에 있는 이들은 사실상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을 통해서.

한국은 지금부터 70년도 안 되는 멀지 않은 과거에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살육전을 벌인 20세기의 이례적 국가다. 물론 ‘빨갱이’라는 말도 인륜을 모르는 종족, 더는 인간이 아니어서 사살해도 되는 종족을 지시하기 위해 고안됐다. 시민의 성찰 능력, 인종적·민족적 편견과 아집으로부터의 자유, 국가주의를 국가주의로 인식하고 거부하고 대항할 줄 아는 능력. 이런 방부제가 없다면 얼마든지 이 나라도 저 ‘밤의 나라’로까지 부패할 수 있다.

국가주의 거부·대항 못한다면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은 같은 유대인이라도 금세 체제 동조자로 변모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카포는 유대인이었기에 피해자라 할 수 있지만 동시에 대부분의 카포는 일반 수감자를 구타하고 억압한 압제자, 나치즘의 공포 동원 체제 동조자였다. 일반 수감자도 대부분 저항자가 아니라 자기 목숨이라는 이익에 목맨 사람들이다. 의 훌륭한 점 하나는 화자가 자신의 면모를 무서울 정도로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모두 자기 생사에만 골몰할 때 모두를 옥죄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못한다는 진리를 지시해준다.

우석영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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