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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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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권력을 압도하는 의회와 대중의 이중권력

영국 신좌파 밀리밴드가 2017년 한국 촛불의 미래를 구상하다
등록 2016-12-30 06:19 수정 2020-05-02 19:28
랠프 밀리밴드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광장민주주의’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바랐다. 그의 꿈을 아들 에드 밀리밴드 전 노동당 대표(왼쪽 마이크 든 이)가 현실정치를 통해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랠프 밀리밴드는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광장민주주의’ ‘시민참여 민주주의’를 바랐다. 그의 꿈을 아들 에드 밀리밴드 전 노동당 대표(왼쪽 마이크 든 이)가 현실정치를 통해 실현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다. EPA 연합뉴스

대통령 퇴진 촛불집회는 축제이기도 하지만 열띤 토론장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폭력-비폭력 논쟁으로 뜨겁더니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무렵부터는 대의민주주의-직접민주주의가 쟁점이 됐다. “광장의 압박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국회에 실망해서 대의제를 더는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있는가 하면, “그래도 대의제를 고쳐 쓰는 수밖에는 없다”는 반론도 있다.

우리만의 고민은 아니다. 민주주의 역사가 오래됐다는 나라들에서도 그동안 익숙했던 제도와 상식이 새삼 불신과 불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치를 통해 신자유주의 질서를 크게 바꿔보려는 이들에게, 정보화로 유례없이 성장한 개인의 소통 역량에 어울리는 정치 시스템을 원하는 이들에게 기성 민주주의는 낡고 답답한 틀로만 느껴진다. 과연 21세기 민주주의는 20세기 틀을 넘어서는 새 양식을 찾아 다져나갈 수 있을까? 20세기에 이미 이런 방향을 타진했던 이들이 있다.

의회 안에 갇힌 영국 노동당

1961년 라는 저서를 낸 영국 정치학자 랠프 밀리밴드(1924∼94)도 그중 한 명이었다. 책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사회주의를 목표로 추구한다는 정당들 가운데 영국 노동당은 가장 교조적인 정당 중 하나였다. 사회주의에 대해 그런 게 아니었다. 의회제도에 대해 그랬다.”

밀리밴드는 미국 사회학자 찰스 라이트 밀스의 학문적 동지였다. 둘은 대서양을 오가며 전후 영미 사회의 변동을 놓고 의견을 나누었다. 1956년 화제작 에서 밀스는 미국이 민주주의의 외양을 띠지만 실제로는 소수 경제·정치·군사 엘리트들의 지배 아래 있다고 분석했다.

당대 영국 사회를 바라보는 밀리밴드의 시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1958년 ‘누가 영국을 지배하는가?’란 제목으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그는 여전히 자본권력이 영국을 지배한다고 진단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노동당이 6년간 집권하면서 복지 확대 정책을 펼쳤지만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문에서 단언한 것처럼, 문제는 노동당의 정치가 의회 안에 갇혀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정당이라면 몇몇 제도의 개선에 만족할 수 없다.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불평등한 권력 관계에 균열을 내고 이를 뒤흔들며 결국 뒤집어야 한다.

의회 안의 협상과 타협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여의도 정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의사당 바깥의 넓은 세상에서 거대한 대중이 참여하는 정치 행동이 있어야 한다. 1926년 영국 사회를 잠시 정지시킨 총파업이 그런 사건이었다. 하지만 노동당은 총파업에 결합하기보다 거리를 두려고만 했다. 밀리밴드가 보기에 노동당은 이런 체질 때문에 자본권력에 손댈 수 없었다.

밀리밴드가 노동당을 매섭게 비판한 것은 그만큼 영국 좌파 정치에 건 애정과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밀리밴드의 개인사를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본래 영국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도 랠프가 아니었다. 벨기에에 거주하던 유대인 피혁 노동자의 아들 아돌프 밀리반트였다. 1940년 아돌프 히틀러의 마수가 벨기에로 뻗치자 16살의 그는 아버지와 함께 바다 건너 영국으로 피신했다.

낯선 나라였지만, 외롭지만은 않았다.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우던 영국 노동계급 사회는 유대인 탄압을 피해 망명한 이들 부자를 따뜻이 맞아주었다. ‘아돌프’라는 불길한 이름도 이때 ‘랠프’로 바뀌었다. 밀리밴드는 난민 자제를 위한 장학 프로그램 덕분에 런던정치경제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당대 영국 정치학계의 거목이자 노동당 이론가 해럴드 라스키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난민을 기꺼이 품어준 영국 사회(지금과는 사뭇 다른)에서 밀리밴드는 새로운 고향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중심에는 영국 노동운동과 사회주의가 일군 오랜 전통이 있었다.

외로운 무소속 좌파
랠프 밀리밴드(오른쪽)가 작은아들 에드 밀리밴드와 어깨를 겯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랠프 밀리밴드(오른쪽)가 작은아들 에드 밀리밴드와 어깨를 겯고 다정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밀리밴드는 스승 라스키처럼 상아탑에만 안주하지 않았다. 나 (1969) 같은 묵직한 저작들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만드는 일에도 뛰어들었다. 밀리밴드 세대 중 많은 이들은 노동당의 대안을 영국 공산당에서 찾았다. 그러나 밀리밴드는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정치 문화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탈린주의를 더 작은 규모로 반복하는 트로츠키주의 소정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밀리밴드는 외로운 무소속 좌파였다.

1956년 현실사회주의권의 첫 번째 대격변과 함께 상황이 바뀌었다. 그해 가을, 소련군 탱크가 헝가리 민중혁명을 짓밟는 광경을 목격하고서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당을 떠났다. 의 저자인 역사학자 에드워드 파머 톰슨 같은 사람들이었다. 밀리밴드는 무당파 신세가 된 지식인들과 함께 노동당도 아니고 공산당도 아닌 새로운 좌파정치를 개척하려 했다. 세상은 이들을 ‘신좌파’라 불렀다.

밀리밴드는 신좌파 사상가들 중에서도 현실정치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그는 기회 닿을 때마다 늘 현재의 노동당을 대체할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1960년대 초 핵무장 철폐 운동이나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은 아직 새 정치세력의 토대가 되기에 미약했다. 그는 일단 1960∼70년대 세계 곳곳에서 전개된 개혁과 혁명을 분석하면서 미래 변혁 전략을 모색하는 작업에 전념해야 했다. 1964년 몇몇 동료와 함께 창간한 연간 (사회주의자 명부)가 주된 논단이 됐다.

1980년대 들어 밀리밴드는 비로소 자신의 전망에 부합하는 현실정치의 한 흐름과 만났다. 이 무렵 노동당 안에선 ‘벤 좌파’로 불리던 신세대 좌파가 토니 벤 하원의원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구세대 노동당 좌파와 달리 이들은 사회를 바꾸려면 의회정치와 대중운동을 결합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특히 벤은 기성 엘리트 정치를 넘어서는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했다. 밀리밴드는 벤과 함께 정책 모임을 만들어 대처 정부의 시장지상주의 공세와 노동당의 우경화에 맞서려 했다. 현 노동당 대표 제러미 코빈이 바로 모임 참여자 중 한 명이었다.

밀리밴드는 벤 좌파의 노선을 “기업 권력 및 계급 구조와 대결하는 민주혁명”이라 규정했다. 이 혁명이 무르익는 데는 생각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시대는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현실사회주의권 붕괴 뒤 신자유주의는 더욱 승리를 구가했고, 노동당은 ‘제3의 길’을 받아들였다. 밀리밴드의 두 아들 데이비드와 에드워드도 아버지의 뜻과 달리 이 노선에 편승했다. 1994년, 이 끝없는 후퇴의 와중에 밀리밴드는 세상을 떠났다.

대의권력과 대중권력의 시너지
랠프의 저서 <회의(懷疑)하는 시대를 위한 사회주의>(왼쪽)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랠프의 저서 <회의(懷疑)하는 시대를 위한 사회주의>(왼쪽)와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생애 마지막까지 밀리밴드는 원고 한 편을 퇴고하고 있었다. 유고가 된 이 책의 제목은 다. 밀리밴드는 이 책에 평생에 걸친 정치적 탐색의 최종 결론을 정리했다.

직접민주주의 예찬자라면 밀리밴드의 결론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대의제 없이 민주주의 없다고 못박기 때문이다. 직접민주주의로 대의제를 대체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오히려 대의권력은 더욱 강화돼야 한다. 선출되지 않은 자본권력을 굴복시키는 길은 오직 선출되는 대의권력을 늘리고 키우는 것뿐이다.

그럼 밀리밴드는 노동당의 의회 백치증을 비판했던 과거 입장을 부정하는 것인가? 여기에는 역설이 있다. 자본가계급의 뿌리 깊은 권력을 제어할 정도로 대의권력이 강해지려면 대의기구 바깥에서 풀뿌리 대중권력이 성장해 대의기구 안에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참여민주주의가 활발해지는 만큼 대의민주주의도 기득권층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진다. 즉, 대의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는 상충 관계가 아니다. 오히려 둘은 시너지를 일으킨다.

밀리밴드는 이런 시너지가 나타나는 상황을 ‘이중권력’이라 칭했다. 이 말은 사회주의운동의 오래된 용어다. 그러나 옛 사회주의자들은 새로운 대중권력이 기존 대의권력을 대체하는 과정을 염두에 두었다. 반면 밀리밴드는 대중 참여 덕분에 대의권력이 더욱 민주적으로 관철되는 과정을 ‘이중권력’으로 일컬었다.

이는 바로 지난 한 달 동안 한국 시민들이 만들어낸 광경 아닌가. 우왕좌왕하던 국회가 광장의 눈치를 보며 탄핵소추안을 통과시킨 장면이 아닌가. 어떻게 하면 이 광경을 21세기 민주주의의 일상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까?

우리의 혁명이 혁명이기 위해서

지난 세기 막판에 밀리밴드가 병에 넣어 바다에 띄운 메시지는 헛되지 않았다. 그의 메시지는 지금 영국에선 코빈의 노동당 대표 당선으로, 미국에선 버니 샌더스 바람으로, 스페인에선 포데모스의 약진으로 메아리쳐 돌아오고 있다. 지금 이 땅에선 시민혁명이 그 답을 들려주고 있다.

다만 우리의 시민혁명은 밀리밴드의 잣대로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는 21세기의 대안이라며 유언처럼 세 가지 과제를 강조했다. “민주주의, 평등주의, 협동경제(밀리밴드는 이것이 사회주의의 핵심이라고 봤다)”가 그것이다. 촛불 시민들은 첫 번째 과제와 씨름 중이다. 하지만 뒤의 두 가지와 대결하는 일 역시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래야만 우리의 혁명은 참으로 혁명일 수 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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