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론 열기가 뜨겁다. 왜 지금, 기본소득일까? 지금 한국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 하는’ 다급한 처지에 있지만, 중·장기적 사회 비전을 세우려면 반드시 기본소득을 이야기해야 한다. 미국의 맥락에서 기본소득권을 주창하는 앤디 스턴은 (Raising the Floor, 2016)에서 기본소득 도입의 당위성을 정리했다. 우선적인 당위는, 생산·서비스 자동화로 인한 절대 고용량의 축소다. 더 구체적으로 금융, 제조업, 호텔, 의료업(병원), 요식업, 저널리즘, 유통업 등 수많은 분야에서 ‘인간 노동자’ 수가 감소할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것은 다른 무엇보다 대량 실직 또는 실직자 대중이라는 디스토피아를 뜻한다. 고용 불안은 가상의 미래가 아니다. 이미 숱한 노동자가 지금 겪는 냉혹한 현실이다.
2015년 국제노동기구(ILO) 보고서를 보면, 세계 비정규직 또는 임시직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무려 75%에 이른다. 이미 “현대인의 대부분은 잠재적 실업자”(세키 히로노)이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실업자 등 노동 약자층의 권리를 고용 창출이 아닌 다른 식으로 보호하는 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인공지능 개념보다 먼저 등장한 기본소득론기본소득의 필요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하지만 기본소득론은 21세기식 자동화 인공지능(AI)의 산물이 아니다. 인공지능 개념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주장해왔다. 18세기 말 토머스 페인, 20세기 초 버트런드 러셀과 데니스 밀너, 1920~30년대 사회신용운동(Social Credit Movement) 참여자들, 20세기 중엽 제임스 미드와 밀턴 프리드먼, 마틴 루서 킹, 심지어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까지.
그리고 앙드레 고르(1923~2007)가 있다. 고르는 앞서 말한 기본소득론자 그룹에서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의 기본소득론은 ‘전 생애에 걸친’ 자신의 철학적 고민, 즉 사회적 자유(해방)의 현실화를 가능하게 할 새로운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노동·자유·필요에 관한 카를 마르크스(1818~83)의 철학적 사유, 그리고 이것과 연동되는 마르크스 자본주의 이론에 뿌리를 두며, 그 사유와 이론을 현 세기에 살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기본소득권론을 재발견하는 중이며, 기본소득권론의 선구자 앙드레 고르를 통해서 카를 마르크스라는, 산업혁명이 낳은 위대한 지성을 재발견하는 중이다(구글 검색에서 다윈, 아인슈타인 다음 순위를 차지하는 인물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다).
앙드레 고르는 어떤 인물이었기에 시대를 앞서가며 카를 마르크스의 부활을 미리 준비해놓은 걸까? 이를 알려면 그의 유년기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언뜻 전형적 백면서생으로 보이는 이 좌파 철학자의 고향은 오스트리아 빈이다. 이렇게 말하면 유럽의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은 한가한 논객처럼 보이겠지만, 삶의 출발부터 그는 ‘소외’와 ‘자유’라는 마르크스의 테마에 온몸으로 이끌려갔다. ‘소외’는 그의 정체성 혼란의 다른 이름이었고 ‘자유’는 정체성 혼란 극복 상태의 다른 이름이었는데, 이 문제의 핵심에는 그의 모친이 있었다.
마르크스의 ‘소외’ ‘자유’ 테마에 이끌려앙드레 고르의 어머니 마리아는 오스트리아 부르주아 사회 입성을 꿈꾼 여성으로, 당시 빈에 팽배한 반유대주의라는 지배감정에 편승한다. 그리하여 유대인이며 유대교도인 남편마저 가톨릭으로 개종시킨다. 또한 마리아의 계획대로라면 아들 게르하르트(앙드레 고르)가 엘리트 교육을 받아 부르주아 멤버십 획득을 완성할 것이었다.
불행은 마리아가 보기에 아들 게르하르트가 탐탁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데서 시작된다. 부모의 높은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상황의 연속, 유대인 아버지와 유대교를 부정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찢긴 민족·인종 정체성, 빈의 유대인 혐오 정서는 어린 게르하르트를 ‘내가 이 세계에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느낌으로 몰고 간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게르하르트의 부모는 징집을 피해 아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지만, 이곳에서도 그는 문화적·민족적 이질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대체 누구일까? 내가 이 세계에 가치가 있을까? “자기 방에서조차 바깥에”(사르트르) 있던 게르하르트를 괴롭힌 질문들이다.
성년이 될 무렵, 게르하르트가 발견한 구원처는 철학, 프랑스(어), 그리고 사랑이었다. 사실 그를 철학으로 이끈 건 철학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관심이었다. 초기작 (1940년대 집필, 1977년 출간), (1958)도 자신의 정체성 분열을 자가분석해보려는 자전적 작품이다.
이런 가운데 게르하르트를 철학으로 깊숙이 끌고 간 인물이 있었으니, 장 폴 사르트르(1905~80)였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이지만 마르크스에게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사르트르와 고르의 교감이 지속되는데 이들의 연결고리는 ‘인간의 자유’라는 주제였다. 바로 이 주제가 고르를 노동 대중의 현실에서 자유를 사유한 마르크스에게 인도한다.
자기부정을 통해 행복의 길을 찾던 게르하르트는 16살 무렵 프랑스(어)에서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선조와 부모의 유산에서 단절된 자, 그 누구도 아닌 자, 새로운 자, 유의미한 자, 철학으로 세계를 재구축하는 자…, 게르하르트는 새로운 땅과 되고 싶은 자기를 일치시킨다. 실제로 그는 1949년(25살) 프랑스에 이주해 1954년(30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며 정신적 무국적자 처지에서 벗어난다.
도린과의 사랑마지막으로 철학 오타쿠 청년 게르하르트를 프랑스 신좌파 이론가, ‘노동자 자주관리’ 이론가, 사회적 생태론자로 연결해주는 최종적 링크가 있으니 젊은 날 사랑에 빠진 한 여인이다. (<d>의 바로 그 D이며, 2007년 약물 주사로 동반 자살한 여인이다.) 젊은 고르가 꿈꾸던 자신, 즉 ‘보이지 않는 철학자’가 허망한 존재임을 일깨워준 건 철학책이 아니라 한 사람과 사랑의 경험이었다. 도린과의 사랑으로 그는 자신을 직시하게 되고 삶의 육체성, 실재성, 역사성에 눈뜬다. 그리고 그 삶에서 소외되지 않는 글쓰기가 있다는 사실에도.
예견되었듯 게르하르트의 새로운 세계는 프랑스였다. 젊은 게르하르트는 정치 저널리즘에 투신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연다. 기자, 경제 담당 기자, 경제 담당 편집자, 사회주의 저널 의 창립자이자 필진으로 일하면서 (1959), (1964), (1967), (1969) 등의 저술을 펴내 ‘앙가주망(지식인의 사회 참여) 글쓰기’에 투신하니 말이다. 또한 그는 새로운 사회주의 전략, ‘노동자 자주 관리’ 이론가로서 1960년대 프랑스전국학생연합(UNEF) 운동과 노동조합연대조직인 프랑스민주노총(CFDT)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1983), (1988) 등 후기작에서 구현된 앙드레 고르의 기본소득 사상을 쪼개서 말해보면 이러하다.
첫째,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분업은 핵심 지배 수단이다. 노동분업으로 노동 주체가 노동에서 소외되는 한, 또는 노동이 타율적인 한 다수 인류의 자유란 사실상 공염불에 불과하다. 둘째, 생산과정 자동화가 기성 노동자를 노동 없는 삶으로 내모는데 이것은 결코 비극적 사태가 아니다. (되레 마르크스가 말한 “직접적 개별 노동의 소멸”()을 뜻한다.) 셋째, 이는 생산과 소비, 재생산으로 이어지는 자본 운동 사이클에 끼어 있던 고용이 취약해짐에 따라, 고용 규모가 축소되면서도 시장 규모는 크게 축소되지 않는 새로운 경제가 필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이 새로운 경제는 임금노동이 없어도 창출되는 소비(수요)로만 가능하며 이러한 창출은 “돈을 미리 지급받고 진행되는 상품의 소비”()로써만 가능하다. 소비를 위해 미리 지급되는 돈의 다른 이름이 바로 기본소득 또는 사회소득이다. 다섯째, 이러한 사태는 곧 다수 노동자가 타율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회적 생산에 참여·병립할 때만 진정한 자유 실현이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전문가·예술가 집단의 성벽이 무너져 상당수가 전문가·예술가로서의 삶이, 노동과 삶의 분열 소멸이 가능해질 것이다.
다수가 누릴 전문가·예술가의 삶
우리가 ‘분열 없는 인간’이라는 개념에 부딪히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만일 기본소득이 시민의 권리로 보장된다면, 우리는 직장에서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존재로 일하다 퇴근해서야 자신으로 돌아오는 가면극의 악순환에서 해방돼 ‘하나의 삶’을 살 수 있다. 즉, 노동과 삶의 분열에서 해방돼 ‘분열 없는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야 할 거리가 있다. 오직 자유의 실천이 타자에게 악영향 활동이 되지 않을 때만 우리는 ‘분열 없는 인간’ 또는 케이팝(K-Pop) 식으로 말해 ‘완전체’가 될 수 있다. 생태주의 윤리학이 ‘분열 없는 노동’의 경제학과 만나야 하는 이유다.
우석영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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