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모든 차별에 연대로 맞서다

① 실비아 팽크허스트: 노동자 계층과 함께 선거권 쟁취와 반파시즘 운동을 전개한 영국 여성운동가
등록 2016-11-16 21:38 수정 2020-05-03 04:28
더 나은 세상을 꿈꿨던 ‘20세기 사람들’을 시작합니다. 일찌감치 여성 연대, 진보정치, 기본소득, 대안생산 등의 ‘씨앗’을 뿌린 이들입니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이자 전 노동당 부대표 장석준과 철학·사회학 연구자이자 작가인 우석영이 매주 번갈아 이야기를 전합니다. _편집자
[%%IMAGE1%%]

얼마 전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다룬 영화 (‘여성참정권론자’라는 뜻)가 상영됐다. 관객은 아마 감동만큼이나 충격도 받았을 것이다. 영화에 묘사된 당시 여성들의 투쟁 양상이 참으로 격렬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 여성 단체 중 가장 전투적이던 여성사회정치연합(WSPU, 이하 여성연합)은 여성 선거권 도입에 미적대는 남성 정치인들에 분노해 일종의 테러 전술도 불사했다. 영화에서는 메릴 스트립이 이 조직의 전설적 지도자인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연기했다.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는 본래 남편 리처드와 함께 페이비언협회에서 활동하던 온건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운동 단체들마저 여성 선거권 도입에 적극 나서지 않자 여성연합을 결성해 참정권 운동의 선두에 섰다. 에멀라인 혼자만이 아니라 세 딸까지 온 가족이 이 운동에 몸을 던졌다. 기득권 남성들의 반대가 완강할수록 에멀라인과 딸들의 실천도 치열해졌다. 공공시설 파괴 같은 테러 전술을 채택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 선거권 문제에 기대만큼 앞장서지 않는 노동 세력까지 적으로 돌렸다.

이와는 좀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에서는 여성연합 안에서 에멀라인의 지도 노선이 별 비판 없이 관철된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운동가 중에는 즉각적인 여성 선거권 보장에는 한목소리를 냈지만 이를 위해서 노동운동과 연대해야 한다는 흐름이 있었다. 놀랍게도 이 흐름을 이끈 인물은 에멀라인의 딸 중 한 명이었다. 영화에서도 몇 차례 이름이 언급되는 둘째딸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2)다.

여성 억압과 노동 착취

언니 크리스타벨과 달리 실비아는 처음부터 전업 운동가로 나설 생각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그녀는 한동안 미술학도의 길에 전념했다. 하지만 투쟁의 급박한 현실이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1905년 어머니 에멀라인을 비롯한 여성연합 집행부가 체포되자 실비아는 임시 조직을 꾸려나가기 위해 명예 사무총장직을 떠맡았다. 불과 23살의 젊은 나이였다.

처음에는 어머니와 언니의 짐을 덜어주려 조직에 관여했지만 실비아는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은 여성 선거권의 강조가 지나쳐서 이에 비하면 다른 사회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다. 파리에 망명해서 운동을 이끌던 크리스타벨은 자유당 정권을 혼내주기 위해 보수당 지지 운동을 벌이자고도 주장했다.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노동당보다는 보수당 후보들을 밀어줘야 여성의 힘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해에서 보면, 선거권이 중요하지만 임금 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도 시급하다고 외치는 여성 노동자들은 선거권 쟁취 운동에 부담스러운 존재일 뿐이었다.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은 일부러 중산층 여성을 운동의 주된 기반으로 삼았다. 이런 노선에 실비아는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실비아는 여성뿐만 아니라 만인의 완전한 정치적 권리 실현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믿었다. 당시에는 재산세 납부액이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는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참정권이 없었다. 즉, 상당수 남성 노동자도 정치에서 배제된 상태였다.

물론 실비아도 여성 선거권 쟁점에 미온적인 노동당, 노동조합 지도부에 비판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여성운동이 노동운동에 손을 내밀어 보통선거제도 쟁취를 위해 함께 투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둘의 연대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여성 억압과 노동 착취가 교차하는 여성 노동자의 일상이었다. 그래서 실비아와 동지들은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회원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1912년 노동자 밀집 지역인 런던 동부에 처음으로 여성연합 지부가 결성됐다. ‘동런던서프러제트연합’(ELFS, 이하 동런던연합)이라 불린 새 지부는 본부와 달리 실비아의 노선에 따라 참정권 운동을 펼쳤다. 노선 차이는 투쟁 방법의 차이로도 나타났다.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이 대중운동의 한계를 느끼며 점점 더 소수 활동가의 앞선 투쟁을 강조한 데 반해, 실비아는 대중운동을 끈질기게 이어가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고 봤다.

1913년 벽두에 동런던연합은 새로운 노동자 회원들을 바탕으로 공개 대중집회를 재개했다. 영화 에 묘사된 것처럼 시위와 폭력 진압, 여성 시위자들의 감금과 옥중 단식투쟁이 반복됐다. 마침 산업별 노동조합이 새로 등장하면서 대규모 파업이 확산되던 무렵이었다. 노동과 여성이 양쪽에서 개혁을 압박하며 영국 사회를 뒤흔들자 정권도 더 이상 버티기만 할 수는 없었다.

“제한 없는” 선거권 도입
1912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잡힌 실비아 팽크허스트(왼쪽 세번째). 가디언 누리집 갈무리

1912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잡힌 실비아 팽크허스트(왼쪽 세번째). 가디언 누리집 갈무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14년 6월, 동런던연합 활동가들은 하원의사당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자유당 소속 허버트 애스퀴스 총리는 동런던연합 대표단과 면담하며 “제한 없는” 선거권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다. 정권으로부터 “제한 없는” 선거권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폭발물 투척에는 끄떡없던 정부도 파업과 결합된 끈질긴 대중 시위에는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실비아와 동런던연합 노선의 승리였다.

그러나 갑자기 닥친 전쟁으로 모든 개혁 논의가 돌연 중단됐다. 애국주의 광풍이 불던 개전 초기에는 사회운동도 숨죽이며 사태를 주시해야 했다.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은 이때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두 사람은 참정권 운동을 전후 과제로 미룬 채 정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다. 실비아는 이번에도 이들과 정반대 길을 택했다. 동런던연합은 노동자참정권연합(WSF)으로 이름을 바꾸고 반전운동에 나섰다.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고 더군다나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으며 실비아의 사상과 행동은 더욱 급진화됐다. 그녀는 영국에서도 가장 먼저 공산당 창당에 나선 인물 중 한 명이었는데, 전쟁 중 노동당에 느낀 실망감 때문에 새 당은 선거와 의회에 참여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보통선거제도 실현에 매진하던 투쟁 역정과는 정반대되는 결론이었다. 레닌이 나서서 이런 주장은 영국 현실에 맞지 않다며 실비아를 설득했다. 실비아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 결과 창당한 지 얼마 안 된 영국공산당에서 출당당했다. 그녀의 일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혼란은 길지 않았다. 실비아는 곧 새로운 전선에서 할 일을 찾았다. 1922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당이 집권했다.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최대 위협임은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분명해졌지만, 실비아는 처음부터 이 위험을 간파했다.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기 훨씬 전인 1920년대부터 그녀는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다.

신문 통해 에티오피아 참상 알리며

파시즘에 맞서면서도 실비아의 눈길이 향한 곳은 많은 이들과 달랐다. 영국 반파시즘 운동이 전력을 다한 것은 파시스트 반군과 내전을 벌이는 스페인 공화정부를 돕는 일이었다. 그러나 실비아가 첫 번째 연대 대상으로 주목한 곳은 1935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였다. 똑같은 파시즘의 희생양임에도 에티오피아는 스페인에 비해 관심 바깥이었다. 그만큼 유럽 좌파와 아프리카 인민 사이의 거리는 멀었다. 단, 실비아는 예외였다.

실비아는 1936년 라는 제호로 신문을 창간했다. 오로지 에티오피아인들의 참상과 투쟁을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인 신문이었다. 당대 영국인 중 과연 몇 명이나 이 신문에 주목했을까. 하지만 영국에 체류하던 젊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이 신문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과 범아프리카주의의 영감을 얻었다. 그중에는 훗날 케냐의 반영국 독립투쟁을 이끈 조모 케냐타도 있었고, 가나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콰메 은크루마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실비아는 에티오피아 연대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여성 참정권 운동의 옛 동지들과 함께 노구를 이끌고서 에티오피아를 연합국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영국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1960년 사망하고 나서 실비아의 유해는 에티오피아에 묻혔다. 지금도 그녀의 동상은 런던 동부의 한 공원에 있지만, 무덤은 에티오피아의 애국선열 묘역에 있다.

실비아 팽크허스트의 시대에 ‘연대’가 쉽지 않았던 것 이상으로 오늘날 ‘연대’는 멸종위기종이다. 대중에게 생존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누구나 다 자기가 남보다 더 고통받는다고 강변하는 데 익숙해졌다. 대중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고 사회운동들 사이의 거리는 멀어지기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99%가 아니라 1% 쪽으로 기울어진 전 지구적 세력 관계의 믿음직한 토대다.

자결권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은 하나

이 단단한 세력 관계는 오직 여성과 노동자가 한 방향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하고 북반구 노동자가 남반구 민중의 외침에서 자기 이야기를 찾는 순간에야 흔들릴 수 있다. 실비아는 이 진실을 알았고 그 선례가 됐다. 그래서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의 가교가 됐고 아프리카 민중의 입이 됐다. 그녀에게는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가 하나였다. 21세기에 무한 복제돼야 할 삶이 여기에 있다.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독자  퍼스트  언론,    정기구독으로  응원하기!


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인터넷신청▶ http://bit.ly/1HZ0DmD
카톡 선물하기▶ http://bit.ly/1UELpok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