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월에 치를지 알 수 없지만 올해는 한국에 대통령선거가 있는 해다. 촛불시민 혁명의 여파로 어느 때보다 개혁의 기대가 높을 것이다. 정당 가운데 늘 앞장서서 개혁을 이야기해온 것은 진보정당들이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진보정당은 화제에서 멀어진다. 결선투표조차 없는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개혁은 기성 보수정당들 가운데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인 쪽의 집권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교과서였던 미국 정치도 마찬가지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는 무소속 진보파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 예비경선에 뛰어들어 판을 좀 바꿔보나 싶었지만, 결국 투표용지에 올라온 이름은 최악의 공화당 후보와 그만큼 최악인 민주당 후보였다. 미국에서는 이미 두 세기 넘게 반복되는 광경이다. 이 역사적 숙명을 뒤집으려고 노력한 이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샌더스의 선배들이 있었다. 노먼 토머스(1884~1968)도 그중 한 사람이다.
출세가 보장됐던 사회주의자미국에서 공화당-민주당 양당 구도에 가장 진지하게 도전한 흐름 중 하나는 사회당(SPA)이다. 1901년 창당한 사회당은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를 추구했다. 그래서 미국에 오기 전 이미 유럽 대륙에서 사회주의 운동의 세례를 받은 동부 대도시 이민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만이 아니었다. 대도시 독점자본에 쌓인 게 많았던 중서부 소농 중에도 상당한 지지자가 있었다. 한 세기 뒤에는 공화당 텃밭이 될 이들 지역이 당시엔 미국식 사회주의의 활기찬 실험장이었다.
사회당이 초기에 대중에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유진 데브스(1855~1926)였다. 철도노동조합 지도자였던 데브스는 1900년 대선부터 다섯 차례나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독점자본 개혁 여론이 비등했던 1912년 선거에서는 거의 100만 표(6.0%)를 얻었다. 데브스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친숙한 개신교 전도사의 말투로 사회주의를 설파하고 진보정당을 선전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이 사회당의 전진을 가로막았다. 유럽의 자매 정당들과 달리 미국 사회당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초지일관 반대했다. ‘개혁’을 약속하며 집권한 우드로 윌슨 민주당 정부는 이를 빌미로 사회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데브스는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러시아 10월혁명 여파로 반사회당 공세는 끊일 줄 몰랐다. 게다가 사회당의 얼굴인 데브스의 나이는 70대에 접어들었다.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차세대 대중 정치가가 간절히 필요했다. 이때 떠오른 사람이 바로 노먼 토머스였다.
토머스는 중서부 오하이오주 장로교 목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문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1911년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얼굴로 학벌까지 좋았으니 출세가 보장된 젊은이였다. 그가 사회당의 문을 두드린 것은 역시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평화주의가 신념이던 토머스는 앞뒤 재지 않고 반전운동에 뛰어들었다. 교회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사회당은 동지로 반겼다.
사회당의 단골 대선 후보처음에는 입당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사회당이 반전운동으로 탄압받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토머스는 1918년 사회당에 입당했을 뿐만 아니라 전업 활동가가 됐다. 그의 임무는 외곽조직인 산업민주주의연맹을 이끄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자 존 듀이, 사회주의에 동조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 등 당대 뛰어난 지식인들과 교유했다. 그러면서 기독교 윤리와 프래그머티즘이 결합된 독특한 사회주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토머스의 이런 면모에 사회당 집행부가 주목했다. 그들은 토머스 같은 전형적인 미국 토박이가 당의 새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머스보다 이에 더 부합하는 사람은 없었다. 뉴욕시장 선거에 사회당 후보로 출마했던 모리스 힐퀴트가 토머스에게 1924년 뉴욕주지사 선거 출마를 권했다. 토머스는 고심 끝에 이 제안을 수락했다. 이후 (데브스보다 더 많은) 여섯 차례 대선을 포함해 10번 넘게 사회당 후보로 공직 선거에 출마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채 말이다.
처음 뉴욕주지사 선거에 나설 때는 나름 희망이 있었다. 주지사에 바로 당선되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당시 사회당은 미국 정치판 전체를 뒤흔들어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주지사 선거와 함께 실시된 1924년 대선에 공화당 개혁파였다가 탈당한 로버트 라폴레트 상원의원을 출마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라폴레트는 사회당 후보는 아니지만 사회당과 노총(AFL)이 함께 지지하는 무소속 후보로 대선에 뛰어들었다. 사회당은 이 선거의 성과를 발판 삼아 미국에도 영국 노동당처럼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을 새로 만들려 했다.
이 선거에서 정치 초년생 토머스는 9만 표를 얻어 양대 정당 후보에 한참 뒤졌지만, 라폴레트는 483만 표(16.6%)라는 상당한 득표를 기록했다. 그러나 노동 진영은 이 성과조차 독자 정당을 창당하기에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게다가 라폴레트 후보마저 선거 직후 사망하고 말았다. 사회당의 원대한 재창당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의 보수 일변도 정당 구도를 바꿀 최대 호기가 무산되고 만 것이다.
이제 막 40대인 토머스가 이끌어야 할 당은 출구가 봉쇄된 상태였다. 토머스는 말년까지도 사회당의 확대 재창당 구상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기회가 오기만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첫 선거 도전지인 뉴욕주에서 공직 선거가 있을 때마다 거듭 출마해 당을 알리고 조금이라도 지지층을 넓히려 했다. 이런 노력이 통했는지 1934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거의 20만 표를 얻었다.
1928년 대선부터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첫 번째 도전 결과(26만 표, 0.73%)는 라폴레트 운동은 물론 데브스 시절에 비해서도 크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뉴딜의 지렛대 됐지만1932년 선거는 조금 달랐다. 대공황이 발발한 뒤 치른 선거여서 사회당 후보의 주장에 좀더 많은 사람이 진지하게 귀를 기울였다. 이 선거에서 토머스는 88만 표(2.23%)의 지지를 받았다.
단지 득표수만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당 후보가 정치 지형 전반에 끼친 영향이었다. 이 선거에서 토머스는 대공황 정책으로 다음을 공약했다. 실업자 구제를 위한 실업보험과 대규모 공공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 창출, 아동 노동 폐지, 공공연금 도입, 저렴하고 쾌적한 공공주택 대량 공급, 대기업과 부유층 증세, 기간산업 국유화 등.
1932년 대선 당선자는 바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였다. 집권 이후 그가 실시한 뉴딜은 토머스의 대선 공약과 상당 부분 겹쳤다. 몇몇 복지제도를 신설했고 공공근로 사업을 실시했으며 노동조합의 권리를 확대했다. 사회주의 후보의 공약을 받아들여 대공황에 대처한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이 이를 의식해서 토머스를 백악관에 자주 초청해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민주당의 ‘개혁’ 대통령과 ‘사회주의’ 정당 후보 사이에는 여전히 커다란 간극이 있었다. 무엇보다 토머스는 루스벨트 정부가 월스트리트 개혁을 내세우면서도 은행을 국유화하지 않는 점을 비판했다. 혈세로 은행을 살려준 뒤 경제위기의 원흉인 은행가들에게 돌려준 꼴이라는 것이다.
토머스가 루스벨트 정부에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었다. 물론 토머스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유럽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한 인물이다. 그러나 전쟁 참여가 결국 뉴딜을 사회민주적 개혁이 아니라 파시즘과 별반 차이 없는 엘리트 통제 체제로 변질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참전에는 끝내 동의할 수 없었다.
이와 함께 토머스의 현실정치 이력도 막바지에 치달았다. 그는 세상의 방향과 동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았고, 1948년 그의 마지막 대선 도전 결과는 14만여 표(0.29%)를 얻는 데 그쳤다.
미국 사회주의자의 마지막 메시지, 기본소득사회당 일선에서 물러난 토머스는 평생 신념에 따라 냉전과 핵전쟁의 공포에 맞서는 평화운동에 앞장섰다. 사회당은 점점 더 비주류로 밀려났지만, 토머스 노인만은 늘 꼿꼿했다. 흑인시민권운동을 비롯해 새로운 대중운동이 등장할 때마다 그곳에는 전 대통령 후보 노먼 토머스가 있었다. 죽기 직전까지 그는 사회당 동지 에리히 프롬(의 저자인 그 사람!)에게 마틴 루서 킹 목사를 1968년 대선에 공화당과 민주당에 맞서는 좌파연합 후보로 내자는 편지를 띄웠다.
세상의 눈에는 영락없이 실패한 인생이었다. 20세기에 토머스와 미국 사회당의 사회주의는 끝내 기회를 얻지 못했다. 어느 뉴딜 비판가는 “사회주의자가 수영하는 동안 벗어놓은 옷을 뉴딜파가 들고 튀어버렸다”고 표현했다.
정작 토머스는 끝까지 자기 인생보다 세상을 더 걱정했다. 마지막 저작 (1963)에서 그는 미래에 자동화로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는 이에 대응하려면 뉴딜식 복지를 넘어 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충분한 소득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민기본소득, 이것이 20세기 ‘미국 사회주의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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