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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자, 그리고 실패한 피의 복수자

독일 나치에 복수 꿈꾼 유대인 레지스탕스 조직 ‘나캄’의 전 리더 요제프 하르마츠
등록 2016-10-12 20:34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범죄인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들고일어나 나치에 보복을 가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세계는 그들의 행동에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을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치 ‘징벌’은 충분치 않아 보였다. 독일 나치 전범과 유대인 학살 관여자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지만, 단 161명만이 유죄 선고를 받고 종결됐다. 희생된 유대인 수가 600만 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의’ 실현을 기대했던 유대인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한 수였는지 모른다. 학살에 연루된 수많은 독일인들은 처벌되지 않은 채 전후 미국의 마셜플랜에 의해 재건되고 있던 독일 사회로 돌아갔다.

이대로 나치 범죄는 정당한 처벌 없이 종결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스스로 보복에 나선 무장 유대인 레지스탕스 조직이 있었다. 1945년 소련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에서 창설된 나캄(NAKAM)이라는 조직이다. ‘나캄’은 히브리어로 ‘복수’라는 뜻. “유대인의 피가 갚아주리라”(Dam Yehudi Nakam)라는 종교적 문장에서 따온 말이다. 50여 명의 젊은 레지스탕스 출신을 주축으로 전쟁 동안 독일의 전쟁물자 수송을 차단하기 위해 철도·교각·통신망을 공격했고, 전후에는 나치 전범 살해와 대규모 나치 사살 작전을 꾸몄다.

리투아니아의 홀로코스트 생존자 요제프 하르마츠(Joseph Harmatz)는 이 보복 집단을 이끈 인물이었다. 그는 1946년 동료들과 함께 전후 독일 나치 친위대 출신 포로들이 수감된 수용소에 지급되는 빵 3천 개에 독을 타는 대담한 작전을 감행했다. 그때까지 나치 전범에 대한 개별적인 보복은 종종 있었지만, 이같은 규모의 사건은 유례가 없었다. 이 작전이 유대인의 나치에 대한 대규모 보복극으로 기록된 유일한 사건이다. 하르마츠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 행위를 600만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에 대한 “정당한 응징”으로 여겼다. 유일한 후회는 당시 이 작전이 불발에 그쳐 한 명의 나치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나치 보복을 목적으로 조직된 유대인 게릴라 암살단 나캄의 일원이던 요제프 하르마츠가 9월22일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1.

<font size="4"><font color="#008ABD">사건 발생 50여 년 뒤 고백 </font></font>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50여 년이 지난 1998년이다. 하르마츠는 오랜 세월 동안 공식적으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1946년 사건 뒤 붙잡히지 않았으며, 이스라엘로 이주해 일상적인 삶을 살았다. 해운회사를 경영했고, 1960년부터 1994년까지 국제 유대인 직업훈련 기관인 ‘월드 ORT(Organization for Rehabilitation through Training)’의 고위 책임자로 일했다. 그는 유네스코 고문이었고 유엔의 다양한 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하르마츠는 은퇴 뒤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1998년 그는 영국 BBC 이라는 프로그램에 얼굴을 가린 채 가명으로 1분 남짓 출연했고, 이후 영국 와 긴 인터뷰를 나누었으며, 그해 5월 나캄 시절 회고록인 를 출간했다.

하르마츠는 1998년 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600만 명의 독일인을 죽이는 것이었다. 독일인에게 도살된 모든 유대인에게 일대일로 대응하는 숫자여야만 했다.”

1946년 사건 당시로 돌아가보자. 나캄을 창설한 이 조직의 리더는 압바 코브너(Abba Kovner)였다. 그는 후일 이스라엘의 저명한 시인이 된 인물이다. 그는 하르마츠를 “특수작전”의 대장으로 임명했다. 하르마츠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서 나치 피고인들을 저격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을 도와줄 유대계 미국인 간수가 나타나지 않아 불발됐다. 이들은 이제 개별 나치 전범을 살해하는 작전에서 나아가, 일련의 대담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애초 계획은 독일 뉘른베르크시에 공급되는 수돗물에 독극물을 타려는 것이었다. 이들은 뉘른베르크 정수장 내부에 멤버 중 한 명을 위장 취업시키고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코브너가 이스라엘 건국을 준비 중이던 유대인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팔레스타인에서 유럽으로 독극물을 가져오던 길, 배에서 영국 경찰에 붙잡힌 것이다.

영국 경찰은 나캄의 계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하르마츠를 비롯한 조직원들은 윗세대 시온주의자들이 그들을 배신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곧 이뤄질 꿈인 이스라엘 건국을 앞두고 도덕적으로 발목 잡혀 국제적 지지를 잃게 될 것을 우려했다. 독극물은 바다에 버려졌고, 코브너는 체포돼 이집트 감옥에 수감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호밀빵 3천 개에 독을 바르다</font></font>

하르마츠는 코브너의 자리를 이어받아 즉시 ‘플랜 B’에 착수했다. 목표 장소는 뉘른베르크 외곽의 13포로수용소. 나치 친위대 출신 독일인 포로들이 구금된 곳이었다. 계획은 이들에게 공급되는 빵에 치명적 독성 물질인 비소를 퍼뜨리는 것이었다. 빵은 수용소 근처 단일 베이커리에서 공급됐다. 이들은 조직원 중 하나를 역시 그곳에 위장 취업시킨 뒤 적당한 시기를 보았다.

1946년 4월 어느 토요일 밤, 하르마츠와 동지들은 베이커리에 잠입했다. 그리고 미리 마룻장 밑에 빼돌려둔 보급품을 꺼내 미술가용 붓으로 호밀빵 3천 개의 표면에 접착제와 섞은 비소를 발랐다. 빵 안에 주입하면 조리 과정에서 독성 물질이 변질될 수 있었다. 이들은 빵 한 덩이를 포로 4명이 나눠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예상 사망자 수는 1만2천 명에 이를 것이었다.

하르마츠는 1998년 와의 인터뷰에서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날 아침, 나는 (수용소에서 죽은) 내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 일이 성공할 것을 생각하면 정말 기분이 좋았다.”

계획은 불발에 그쳤다. 포로들이 고통을 호소했다는 보도는 나왔으나, 사망자는 확인되지 않았다. 최근 공개된 미국 CIC(전투정보지휘소)의 자료에 따르면 당시 사용된 비소는 6만 명을 죽일 수 있는 양이었다. 그럼에도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은 것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들이 애초 비소를 너무 얇게 펴발랐거나, 포로들이 빵에서 뭔가 이상한 맛을 감지하고 할당된 양을 다 먹지 않은 것으로 추측됐다.

하르마츠와 동료들은 일을 끝낸 뒤 즉시 해외로 도망쳤다. 하르마츠는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1998년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독일 정부는 살인미수 혐의로 하르마츠와 동료들에 대한 수사를 벌였으나, 그들을 기소하지는 않았다. “특수 상황”이었다는 이유였다.

요제프 하르마츠는 1925년 1월23일 리투아니아 로키스키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청소년 공산주의자 단체에 소속된 드문 ‘유대인 좌파’였으며, 소련의 리투아니아 합병 이후인 1940년 15살의 나이로 유대인 레지스탕스 단체에 들어갔다. 이듬해 나치 점령군이 수도 빌나(현 빌뉴스)에 도착해 가족은 모두 게토에 수용됐고, ‘게토 청소’가 이뤄지는 동안 하르마츠는 다른 레지스탕스 동료들과 하수관을 통해 게토를 탈출했다.

“하수관은 비좁고 끔찍했다. 나는 자살을 생각했는데, 만일 내가 죽어버리면 뒤에 오는 사람들의 길을 막아버릴 거라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1998)

<font size="4"><font color="#008ABD">죽기 직전까지 “양심의 가책 느끼지 않는다”</font></font>

하르마츠는 하수관에서 외곽의 숲으로 도망쳐 유대인 레지스탕스 그룹에 합류했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게토에서 자살했고, 형은 소련군에 입대한 뒤 세상을 떠났으며, 동생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가족 중엔 어머니만이 살아남았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나는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그때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말했다. 지난 8월 그는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가 그토록 치열했던 이유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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