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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도시를 타전하다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킬링 필드’ 처음으로 세계에 보도한 언론인 시드니 섄버그
등록 2016-07-26 21:26 수정 2020-05-03 04:28
재회 뒤 미국 <뉴욕타임스> 사무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드니 섄버그(왼쪽)와 디트 프란. AP 연합뉴스

재회 뒤 미국 <뉴욕타임스> 사무실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시드니 섄버그(왼쪽)와 디트 프란. AP 연합뉴스

“200만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놀라운 침묵 속에서 도시를 떠났다. 그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연료가 떨어진 자동차를 밀며, 마치 인간 양탄자처럼 도시의 도로를 점령했다. 한때 진동으로 흔들리던 도시는, 버려진 자동차와 비어 있는 상점들이 늘어선 침묵의 거리로, 오직 과거의 반향만을 담고 있는 공간으로 바뀌어버렸다. 가로등 불빛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으스스하게 타올랐다.”()

1970년대 특파원 시드니 섄버그가 캄보디아로부터 타전해온 기사는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는 1970년대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자행한 대학살인 이른바 ‘킬링 필드’를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그는 ‘킬링 필드’ 현장을 목격한 몇 안 되는 외신기자로서, 수도 프놈펜이 크메르루주 반군에 함락되는 과정, 주검이 굴러다니는 거리와 피로 물든 병원, 하룻밤 사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덤이 되는 과정 등을 특유의 유려한 문체로 기록했다.

‘킬링 필드’의 참상을 국제사회에 알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 시드니 섄버그가 7월9일 미국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 그는 아카데미 수상작인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의 실제 주인공이다.

‘킬링 필드’는 1975년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주 정권이 친미 성향의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린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명분으로 도시의 지식인과 부유층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1979년까지 4년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죽음의 문턱에 섰던 6시간

의 동남아시아 지역 특파원이던 섄버그는 베트남전쟁이 여타 지역으로 번져가던 1970년대 초반 캄보디아 취재를 시작했다. 섄버그의 현지 취재 파트너는 ‘디트 프란’이라는 캄보디아인이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 등 언어에 능통한 통역사이자 지략이 뛰어난 현지 가이드로, 이미 내전으로 쑥대밭이 된 캄보디아 곳곳을 섄버그와 함께 누비며 취재를 도왔다. 둘은 서로를 “형제”로 부르며 가까워졌고, 후일 이들의 관계는 ‘세기의 우정’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1975년 봄, 섄버그는 로부터 프놈펜을 빠져나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크메르루주군이 수도 프놈펜으로 접근하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미국대사관은 폐쇄됐고, 대부분의 외신기자와 외교관 등은 모두 도시를 떠난 상태였다. 섄버그와 프란은 지시를 거부하고 그곳에 남았다.

에 따르면 섄버그는 후일 그곳에 남은 결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곳에 남겠다는 우리의 결정은, 크메르루주 정권이 승리를 거둬 원하던 것을 얻으면 잔학 행위를 끝낼 거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그것은 절실한 바람이나 희망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1975년 4월17일 크메르루주군이 수도로 진격해 들어오던 날, 섄버그는 프란과 함께 취재 현장으로 나가려다 무장한 크메르루주 군인들과 맞닥뜨렸다. “그들은 소리 지르며 우리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손짓했고, 머리와 배에 총을 겨누며 손을 머리 위로 올리라고 명령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프란을 보았다.” 에 따르면 후일 섄버그는 이렇게 썼다.

“그 전에도 힘든 상황을 많이 겪었지만, 내가 프란의 얼굴에서 날것의 공포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내게 그들이 시키는 대로 다 하라고 말했다. 나는 떨고 있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프란은 어떻게든 감정을 추스르고, 그들에게 간곡히 부탁하기 시작했다.”

프란은 군인들의 무장병력 수송차량에 올라 2시간 반 동안 그들을 설득했다. 이들은 당신의 적이 아니며, 단지 당신들의 승리를 기록하기 위해 온 외신기자일 뿐이라고. 이들은 6시간 뒤에야 가까스로 풀려났다.

섄버그와 프란은 프랑스대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며칠 뒤 크메르루주군이 프랑스대사관에 남아 있는 모든 캄보디아인에게 그곳을 떠날 것을 명령했다. 프란은 섄버그와 헤어져,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한 채 농촌으로 향하는 수백만의 행렬에 합류하게 되었다.

강제 노동수용소에 갇혔던 디트 프란

상황이 악화하면서 섄버그는 4월30일 다른 기자들과 함께 트럭을 타고 캄보디아를 탈출했다. 그는 타이 국경을 넘어 방콕에 도착한 뒤, 자신이 목격한 프놈펜 함락에 대한 기사를 써 타전했다. 이 사건이 처음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이후 뉴욕으로 돌아온 섄버그는 친구 프란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나왔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프란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몇년간 아무 소식도 듣지 못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 가족도 보고 싶지 않았다. …프란의 가족(당시 섄버그의 도움으로 캄보디아를 빠져나와 샌프란시스코에 살고 있었다)조차 만날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76년 그는 킬링 필드 보도로 언론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시상식에서 그는 취재 파트너였던 디트 프란과 이 상을 공유한다고 말했다.

기적적 소식이 들려온 것은 그가 캄보디아를 떠나온 지 4년이 지난 1979년 10월이었다. 섄버그는 동료로부터 프란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프란은 1979년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입을 틈타 강제수용소를 탈출했고, 농부로 위장해 크메르루주군을 피하며 타이의 난민캠프까지 65km를 걸었다.

섄버그와 함께 일한 전직 기자 찰스 카이저가 최근 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당시 섄버그는 이같은 메시지를 전해듣고, 그것이 자신이 들어본 “가장 강렬한 여덟 단어”였다고 말했다. “생존자 디트 프란이 시엠레아프 앙코르에 살아 있다(Dith Pran survivor, living in Siem Reap Angkor).”

섄버그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타이 난민캠프로 가서 프란과 재회했다. 섄버그는 이후 1980년 에 ‘디트 프란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긴 기사를 썼다. 이 글은 프란이 크메르루주군에 붙잡혀 강제 노동수용소에서 겪은 시련을 고스란히 묘사하고 있다.

프란은 고학력의 배경을 숨긴 채 잦은 구타와 고된 노동을 견뎠으며, 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질병, 혹은 공개 처형으로 죽어가는 동안 그는 벌레와 달팽이, 쥐를 잡아먹고 하루 한 숟갈의 밥으로 연명하며 살아남았다. 이 기사는 책으로 출간됐고, 1984년 영화 의 토대가 되었다.

섄버그는 프란을 뉴욕으로 불러 의 사진기자로 일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프란은 오랫동안 그곳에서 사진기자로 일했으며, 2008년 췌장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도시 문제에 관심 깊던 논쟁적 기자

시드니 힐렐 섄버그는 1934년 1월17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클린턴에서 태어났다. 1955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뒤, 징집돼 군사신문 기자로 2년을 복무했다. 그는 1959년 편집국 복사 아르바이트생으로 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당시 복사 아르바이트생 신분으로 쓴 글이 신문 오피니언난에 실렸는데, 이 글을 계기로 1960년부터 기자로 일하게 되었다. 9년간 도시, 주 입법부 분야를 담당했으며, 1969년 인도 뉴델리에서 첫 해외 특파원 일을 시작했다.

캄보디아 취재에서 돌아온 뒤인 1980년대엔 도시 분야 에디터로 일했고, 격주로 도시 뉴욕에 대한 칼럼을 썼다. 그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생산하는 ‘도시 제국’에 반대하는 등 논쟁적인 글을 주로 썼고, 고집불통의 태도는 상사와 잦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1984년 뉴욕 맨해튼 웨스트웨이 고속도로 프로젝트에 대한 의 보도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뒤, 그의 칼럼은 돌연 연재 중단됐다. 그는 26년간 몸담은 를 그만두고 나와 의 칼럼니스트로 10년 동안 일했다. 후일 등 매체에 기고했다. 2010년에는 각종 매체에 쓴 글을 모은 책 가 출간됐다.

그는 말년에도 논쟁적인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실종자로 처리된 베트남전쟁 포로 문제에 관심을 가졌고, 부동산 산업과 정치의 관계를 들여다보는 글을 꾸준히 써 현재 뉴욕의 심각한 문제인 젠트리피케이션을 ‘예언’했다는 평을 받았다. 유족으로 아내와 두 딸이 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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