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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레이디볼스의 영웅

미 테네시주립대 여자농구팀 38년간 이끌며 미 대학체육협회 사상 최다승 기록한 퍼트리샤 수 서밋
등록 2016-07-07 17:14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올리버가 많이 화났네요. 엄마는 여기 앞에 있는데, 자기는 저 뒤에 있다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빙글빙글 웃는다. 전형적인 ‘오바마식 기자회견’의 시작이다. 뒤편에는 건장한 여성들이 줄지어 서 있다. 그가 말을 잇는다. “저기, 올리버 이 앞으로 데려오셔도 됩니다. 감독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자, 데려오시죠. 좋습니다. 올리버가 오늘 양복을 입고 신경 많이 썼네요. 나비넥타이도 매고 말이죠. 자, 하이파이브! 그래요, 이제 다 정리됐네요.”

<font size="4"><font color="#008ABD">밤이면 오빠들과 농구 시합</font></font>

지난 6월26일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에 특별한 손님을 초대했다. 2015 시즌 미국 여성프로농구(WNBA)에서 우승한 미네소타 링크스 선수단이다. 미네소타 링크스는 2015년 10월 열린 챔피언 결정전에서 5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인디애나 피버를 누르고 창단 이후 세 번째 우승을 일궈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선수단을 치하하며 이렇게 말하자, 환호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마야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남자 선수들처럼 엄청난 갑부는 아니지만, 돈이 전부는 아니지 않느냐’고. 하지만 돈도 유용할 때가 있지요. 저는 동일한 노동에는 동일한 임금이 지급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언급한 ‘마야’는 지난 시즌 WNBA 올스타전에서 MVP를 차지한 링크스의 포워드 마야 무어 선수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은 뭔 소린가? 지난 시즌 미국 남자프로농구(NBA) 올스타전 MVP는 오클라호마시티 선더의 러셀 웨스트브룩 선수다. 그의 지난해 연봉은 1600만달러가 넘는다. 무어의 연봉은 10만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그가 오프시즌이면 중국 여성프로농구(WCBA) 산시 플레임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다. 출범 20주년을 맞은 WNBA의 현주소다.

NBA는 1946년 출범했다. WNBA보다 50년이 빠르다. 해마다 3월이면 미국 전역을 ‘광기’(March Madness)로 몰고 가는 대학농구도 엇비슷하다. 미국대학체육협회(NCAA)가 여자농구를 정식 종목으로 채택한 것은 1982년이 돼서였다. 남자농구보다 43년이 더디다. NCAA가 공인하기 전에도 여학생들은 농구를 했다. 그 시절을 대표하는 영웅을 만나보자.

퍼트리샤 수 서밋은 1952년 6월14일 테네시주 클라크스빌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만 3명이 있었다. 첫딸을 얻은 아버지는 고민에 빠졌다.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곧 결론이 내려졌다. ‘그냥 사내아이처럼 대하면 되겠지.’ 농민인 아버지는 근면했다. “소는 하루도 쉬는 날이 없다.” 어린 서밋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소젖을 짰다. 낮에는 건초를 거두고 담뱃잎을 썰었다. 오후 5시에 소젖을 한 번 더 짜고 나면 자유다. 그는 밤이면 오빠들과 어울려 온 동네를 다니며 농구 시합을 했다.

서밋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족은 인근 헨리에타로 이주했다. 고향마을 고등학교엔 여자 농구팀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밋은 2012년 스포츠 전문채널 <espn>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이걸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그 소리만 들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등번호 55번, 서밋은 코트에서 붕붕 날아다녔다.
1970년 서밋은 테네시주립대학에 진학했다. 오빠 3명은 모두 체육특기생 장학금을 받고 대학을 다녔다. 서밋은 그러지 못했다. 여학생에겐 체육특기생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딸의 등록금을 기꺼이 대줬다. 미국 대학에서 여학생에게 체육특기생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1972년 이른바 ‘타이틀 9’로 불리는 성차별금지법이 통과된 이후다.
1974년 대학을 졸업한 서밋은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시에 모교 농구팀 레이디볼스 코치로 선임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감독이 사직하면서 서밋이 감독직을 떠맡게 됐다. 그의 나이 22살 때다. 당시 선수 가운데 4명은 그와 1살 차이였다. 1976~80년 선수로 뛴 뒤 1985년부터 서밋의 곁에서 코치로 활약했던 홀리 워릭 현 레이디볼스 감독은 2012년 <espn>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지만 서밋 감독은 대단히 엄했다. 감독과 선수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항상 강조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자농구팀 감독직 뿌리친 까닭 </font></font>
감독 첫해, 그가 받은 월급은 250달러였다. 선수단 경기복을 사기 위해 도넛을 팔던 시절이다. 경기가 끝나면 감독인 그가 손수 세탁을 했다. 원정 시합을 갈 때면 운전대도 잡아야 했다. 그는 2009년 2월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정길에 숙박비가 없으면 상대팀 체육관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매트리스와 침낭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내가 선수 시절엔 더했다. 한번은 3연전을 치러야 했는데 경기복을 세탁하지 못했다. 한 벌뿐이었기 때문이다. 농구가 좋아서 뛴 거다. 농구 외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서밋이 체육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은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올림픽이 열렸다. 서밋은 미국 여자농구 대표팀 주장으로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 그로부터 8년 뒤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 열렸다. 서밋이 감독을 맡은 미국 대표팀은 전승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농구 선수와 감독으로 올림픽에 출전해 모두 메달을 딴 것은 그가 처음이다.
해가 바뀔수록 레이디볼스의 경기력은 좋아졌다. 1982년 NCAA 여자농구가 발족됐을 때, 미 전역에서 32개팀에 출전 자격이 주어졌다. 레이디볼스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첫해 4강에 오르며 기염을 토한 레이디볼스는 1987년 마침내 첫 우승을 차지했다. ‘신화’의 서막이었다. 시즌이 끝나면 선수 발굴을 위해 미 전역을 누볐다. 그가 결혼 10년 만인 1990년에야 외아들 타일러 서밋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그는 6차례나 유산의 아픔을 경험해야 했다.
절정을 구가하던 1998년엔 39전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2000년엔 농구 명예의전당에 헌액됐다. 서밋의 연봉은 125만달러까지 치솟았다. 대학 쪽에선 그에게 남자농구팀 감독직을 제안했다. “남자팀 감독을 하는 게 왜 더 좋은 일인 것처럼 말하느냐?” 그는 단칼에 제안을 물리쳤다. 2013년 서밋의 전기를 펴낸 샐리 젠킨스는 “서밋은 유리 천장을 깨뜨리지 않았다. 유리 자르는 칼로 조금씩 금을 그어나가다 어느 순간 천장을 열어젖혔다.”
신화의 끝은 맥없이 찾아왔다. 2011 시즌이 한창이던 때, 서밋은 경기 도중 자꾸 흐름을 놓쳤다. 그러고 보니 약속을 깜빡할 때도 많아졌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시즌이 끝난 뒤 병원을 찾았다. 뜻밖의 진단이 나왔다. ‘알츠하이머성 치매 초기’ 그는 망설임 없이 병명을 공개했다. 그리고, 하던 일 계속했다. 2012 시즌의 막이 올랐다. 서밋은 여전히 코트를 호령했다. 시즌의 마지막 경기가 열리던 날, 레이디볼스 경기장은 오렌지색으로 물들었다. 팬들이 입고 온 셔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 감독, 우리 친구, 우리 가족.”
1974년부터 2012년까지 레이디볼스를 이끌며, 서밋은 1098승208패를 기록했다. 우승컵도 8차례나 들어올렸다. 남녀불문, NCAA 사상 최다승 기록이다. 38년 감독 생활 동안 그의 지도를 받은 161명의 선수는 100% 대학을 졸업했다. NCAA 평균치는 90%를 밑돈다. 지도자로 활동하는 제자도 74명이나 된다. 오바마 대통령은 2012년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영예인 ‘자유의 메달’을 서밋에게 수여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은퇴 후 치매 연구·환자지원 재단 설립 </font></font>
은퇴 뒤에도 그는 명예감독으로 경기장을 찾았다. 또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설립해 치매 연구와 환자 지원사업을 벌였다. 올해 말이면 모교에 딸린 알츠하이머 진료센터가 문을 열 예정이다. 그가 고교 시절을 보낸 헨리에타 들머리에는 이런 이정표가 세워졌다. ‘팻 서밋의 고향, 헨리에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밋은 지난 6월28일 아침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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