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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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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시대를 돌아보라

나치독일 파시즘의 기원 연구하며 한평생 ‘악’을 탐구한 역사학자, 프리츠 리처드 스턴
등록 2016-05-26 16:12 수정 2020-05-03 04:28

혐오범죄에 스러진 넋을 기리는 추모의 공간, 또 다른 혐오가 민낯을 들이민다.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무지와 혐오를 뒤섞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의 화환은 2016년 5월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악’의 현현이다.
“난 누구든 다 믿어. 다만 내가 믿지 못하는 건, 사람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악마지.” 영화 (2003)에서 도널드 서덜랜드가 연기한 늙은 도둑 ‘존 브리저’는 이렇게 말했다. ‘악’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가?
왜 잠재된 악이 독일에서 현현했나

EPA 연합뉴스

EPA 연합뉴스

지난 세기는 ‘극단의 시대’였다. ‘세계대전’과 ‘인종청소’라는 살풍경한 신조어가 20세기 전반기부터 지구촌을 배회했다. 그 한가운데 ‘홀로코스트’가 있다. 인간이 인간에게 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절대악’의 경지다. 그 정체는 무엇인가? 1961년 4월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나치의 하수인 아돌프 아이히만을 지켜보며,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렇게 간파했다.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자기를 재판하는 자들에 대한 증오심도 없었다. 그저 자기는 ‘주어진 일’을 했을 뿐, 아무 책임이 없다고만 말했다. 그는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에 복종했을 뿐 아니라, 정해진 법 절차를 그저 충실히 따랐다.”

‘악의 평범성’. 아이히만 재판을 통해 아렌트가 단박에 얻은 깨달음이다. 똑같은 화두를 붙잡고 평생을 파고든 이들도 있다. 프리츠 스턴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프리츠 리처드 스턴(Fritz Richard Stern)은 1926년 2월2일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의 독일 땅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났다. 유대계였지만, 증조부 때 일찌감치 기독교로 개종한 집안이었다. 스턴 역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개신교식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쪽은 대대로 의업에 종사했다. 그의 형제와 사촌들도 대부분 의사였다. 이론 물리학 전공자인 어머니는 열정적인 교육가이기도 했다. 유복하고 지적인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얘기다. 시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턴이 7살 되던 해인 1933년 1월30일 국가사회주의당(나치)의 아돌프 히틀러가 공화국 총리에 올랐다. 두 달 남짓 만인 그해 3월24일, 나치 주도로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의회의 승인 절차 없이 정부, 아니 히틀러가 원하는 대로 입법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뼈대였다. 이른바 ‘제3제국’이 공화국을 대체한 게다. 탄압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스턴 가족이 미국행을 결행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인 1938년의 일이다. 스턴의 나이 12살 때다.

대서양을 건너온 가족은 이민자 집단 거주 지역인 뉴욕시 북서부 퀸스의 잭슨하이츠에 정착했다. 어린 스턴은 큰 어려움 없이 새 나라, 새 언어에 적응했다. 고교를 졸업한 그는 아이비리그의 한 곳인 컬럼비아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해 의학 예비과정에 지원했다. 하지만 인문학 과목을 여럿 수강하면서, 차츰 역사학에 빠져들었다.

최종 진로 선택을 앞두고 스턴은 어머니와 친분이 두터웠던 한 유대계 물리학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1933년 2월부터 뉴욕에서 망명생활을 해온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었다. 지난 5월18일치 를 보면, 의학과 사학을 두고 고민하던 스턴에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간단한 문제다. 의학은 과학이다. 사학은 과학이 아니다. 당연히 의학을 선택해야 한다.”

“미국 사회가 멍청해지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조언은 쓸모없었다. 스턴은 사학을 택했다. 그는 2006년 펴낸 회고록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치 치하의 독일에서 단 5년을 살았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음에도, 당시의 경험으로 평생 떨쳐내지 못할 불타는 의문이 생겨났다. ‘왜, 그리고 어떻게, 인간 모두에게 잠재된 악이 독일에서 현실로 나타났는가?’ 내 평생을 바쳐 해답을 찾으려 했다.”

스턴은 1953년 컬럼비아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6년 퇴임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모교에서 유럽사와 독일 근현대사를 강의했다. 그가 평생을 바쳐 궁구한 것은 19세기와 20세기 독일의 정치문화였다. 무엇보다 스턴은 ‘지적으로 멀쩡했던’ 독일 사회가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 원인을 추적했다.

1961년 펴낸 첫 책 에서 스턴은 19세기 말부터 지식인을 중심으로 독일 사회에 퍼지기 시작한 ‘극우적 인종주의 운동’을 그 배후로 지목했다. 그는 “근대성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엘리트 정치인과 지식인들의 문화적 절망감이 정치화하면서 나치즘의 출현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환희와 혼란이 뒤엉켰다. 유럽은 ‘통일된 독일’의 귀환을 마냥 반기지 못했다. 파시즘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평생 ‘통일된 평화로운 유럽’을 열망해온 스턴은 중재 역할을 자임했다. 1990년 통독을 코앞에 두고 마거릿 대처 당시 영국 총리를 비롯한 각국 지도자가 스턴의 조언에 귀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통독 이후인 1993~94년 리처드 홀브룩이 주독 미국대사로 재임할 때, 특별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파시즘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레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인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의 폐허를 딛고 1920년대 절정기를 구가했던 서구 문명이 불과 몇 년 만에 나치의 서슬 아래 놓이게 된 이유가 뭘까? 스턴은 외교안보전문지 (2005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진단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또렷하다. 선량한 독일인들, 이른바 ‘아리안족’임에도 나치 정권에 반대했던 이들은 1933년을 전후로 집단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들이 사라진 뒤 절대다수 독일인들은 ‘아리안족이 아닌’ 인종, 그들의 유대계 이웃들이 어떤 짓을 당하는지 더 이상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이 함께했던 과거를 부인했을 때, 고통은 더욱 심했다. …독일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교훈 가운데 하나는 수동적이고 무관심한 대중이 대단히 치명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말년에도 그는 ‘공포의 시대’가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외침을 쉬지 않았다. 특히 유럽 각국에서 떠오르기 시작한 극우 정치세력을 경계했다. 미국 사회에 대한 쓴소리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난 1월28일 독일 <dpa>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간혹 처연해진다. 민주주의가 해체되던 때 성장기를 보냈다. 삶의 막바지에 이른 지금, 민주주의가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서글픈 일이다.”
같은 인터뷰에서 스턴은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선 도널드 트럼프를 가리켜 “미국 사회가 멍청해지고 있다는 상징적 증거”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는 “트럼프처럼 돈과 야망과 탐욕이 전부인 인물이 스스로 대선 주자로 나선 것도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까지 받고 있다는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의 아흔 번째 생일이 닷새 뒤였다.
이토록 취약한 자유와 민주주의
“내가 태어났을 때, 세상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재난’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내 삶과 평생의 공부를 통해 깨달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교훈이 있다. 곧 자유와 민주주의는 지독히도 취약하다는 점이다.”( 중에서) 프리츠 스턴은 5월18일 뉴욕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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