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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미스터 나이스

억만장자 대마초 판매상, 베스트셀러 작가, 평화주의 히피였던 하워드 마크스
등록 2016-04-21 17:38 수정 2020-05-03 04:28
세계적 억만장자 마약상이었던 하워드 마크스는 자서전 <미스터 나이스>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EPA 연합뉴스

세계적 억만장자 마약상이었던 하워드 마크스는 자서전 <미스터 나이스>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다. EPA 연합뉴스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날린 매력적인 ‘대마초 밀수왕’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하워드 마크스가 4월10일 영국 웨일스 남부의 자택에서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0.

마크스는 1970년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로 대마초를 유통한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43개의 가명을 썼고, 전세계 25곳의 돈세탁용 위장기업을 운영했다. 그는 짧게나마 영국 해외비밀정보국인 MI6의 스파이로 활동했고, 미국 마피아, 아일랜드공화국군(IRA), 콜롬비아의 유명 마약상 파블로 에스코바르 등과 손잡고 사업을 운영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유럽에서 가장 큰 대마초 판매상 </font></font>

오랜 도주 끝에 1988년 미국 마약단속국(DEA)에 체포됐을 때 그의 거래 조직은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서독, 홍콩, 파키스탄, 타이, 포르투갈, 싱가포르, 스페인을 아우르는 마약밀수단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았다. 에 따르면 당시 미국 마약단속국의 특별수사관 토머스 캐시는 그를 두고 “마약 거래의 마르코 폴로였다”고 말했다. 그는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7년을 복역하고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이후 고향 영국 웨일스로 돌아가 자서전 (그의 수많은 가명 중 하나가 ‘도널드 나이스’였다)를 출간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데니스 하워드 마크스는 1945년 8월13일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에 진학해 물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이때 히피 문화에 빠져 마리화나를 처음 접했다. 그는 부업으로 마리화나를 팔러 다녔다. 늘어나는 수익을 ‘세탁’하기 위해 옥스퍼드 지역에 작은 상점까지 차려두었다.

졸업 뒤인 1967년 마크스는 결혼해 런던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엔 친구들의 네트워크를 이용했지만 그는 점차 유럽에서 가장 큰 대마초 판매상이 되었다.

“런던에서 도매업을 시작했다. 일주일에 대략 100kg을 취급했으며 당시로서는 두드러지는 규모였다. 도매업자는 수많은 밀수업자와 접촉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밀수업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곧 한 달에 수천달러를 벌게 되었다. IRA의 정보원인 제임스 매칸과 팀을 이뤄, 아일랜드를 통해 대마초의 대량 반입이 가능하도록 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연계해 레바논에서 나오는 물건을 받기도 했다. 마크스와 공범자들은 이후 많은 회사를 앞세워 돈세탁에 나섰다. 그들은 1973년 미국과 캐나다로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1973년엔 영국 MI6의 업무에 ‘채용’됐다. 마크스가 마약밀수업자로서 IRA의 멤버와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MI6 쪽은 그에게 접근해 IRA 관련 정보를 요구했다. 그러나 마크스의 스파이 임무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단기간에 끝났다.

마크스는 공연 투어 중인 록밴드들의 음향기기를 이용해 대량의 대마초를 유럽과 미국으로 운반해오기도 했다. 숨은 공간이 있는 특별한 스피커 캐비닛을 주문해 그 안에 대마초를 숨겨 운반했다. 처음에는 진짜 록밴드들을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진짜 밴드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가짜 밴드 이름을 만들어서 같은 방법으로 그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를 통해 말했다.

1973년 마크스는 네덜란드에서 국제 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됐다. 영국으로 송환돼 기소됐지만, 보석으로 풀려난 뒤 도주했다. 이후 그의 행방은 대중의 관심사였다. 에 따르면, 마크스가 마피아에 납치됐다거나 MI6에 끌려갔다는 등의 가십 기사들은 언제나 언론의 흥미를 끌었다. 실제로 그는 ‘미스터 나이스’ ‘앨버트 레인’ 등 총 43개의 가짜 신원을 이용했다. 콧수염을 기르거나 변장해 얼굴을 바꾸며 몰래 영국을 드나들었다. 여전히 전세계를 누비며 대마초 밀수 사업을 했다. 그는 후일 자신이 이 일을 “운명이자 카르마(업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프로권투 선수와 같은 마음이었다. 어느 날 쓰러지겠지만, 패배하기 전까진 계속 해야만 했다”는 말에선 절박함마저 찾아볼 수 있다.

마크스는 1980년 다시 체포됐지만, 재판에서 뜻밖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특유의 매력으로 배심원들을 쥐락펴락했다. 자신이 MI6 요원으로 일한 것뿐이라는 주장도 했다. 실제로는, MI6와 그의 거래는 이미 몇 해 전에 끝난 상태였다. 에 따르면 후일 마크스를 붙잡는 데 큰 공을 세운 미국 마약단속국 요원 크레이그 로바토는 “그가 시스템을 패배시키는 것, 자신은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라는 어떤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걸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43개 가짜 이름으로 살다</font></font>

이후 그는 둘째아내와 딸들과 함께 스페인 마요르카섬으로 이주했으나, 결국 1988년 아내와 함께 미국 마약단속국에 체포돼 공범 20명과 함께 기소됐다. 필리핀에서 퇴폐 안마시술소를 운영하던 모이니한이 그를 배신했다. 그는 마크스의 광대한 지구적 조직의 3인자였다. 기소장에 따르면, 마크스의 조직은 1973년부터 1988년까지 수천t의 대마초를 미국과 캐나다에서 유통했다. 1990년 마크스는 25년형을 선고받았다.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미국 인디애나주 테레 호트 연방교도소에서 복역했다. 7년 뒤, 그는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에 따르면 마약단속국 요원 크레이그 로바토는 당시 이 사건이 남미의 범죄왕들에게 일종의 ‘청사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 수많은 기업을 내세운 마크스의 대규모 마약 비즈니스 형태는 전세계 마약상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멕시코 마약 전쟁에 관한 저서 를 쓴 영국의 저널리스트 이오안 그릴로는 에 기고한 ‘하워드 마크스는 어떻게 마약 거래에 대혁신을 일으켰나’라는 글에서 “마크스는 세계적 사업을 개척하는 데 특별한 기업가적 기술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그릴로에 따르면 마크스가 1970년대 대마초 밀수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마약 거래 시장은 수많은 ‘소규모 플레이어’들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마크스는 ‘대담한 플레이어’였고, 결국 전대미문의 세계적 억만장자 마약상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이 한번에 가장 많은 양을 운반한 경우가 타이에서 캐나다로 밀수했던 30t(10억달러 상당)의 대마초였다고 말했다. 한창때는 전세계 대마초 거래량의 10%를 관장했다고도 했다.

그는 영국의 MI6 첩보원부터 고위층 금융업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옥스퍼드 연줄을 이용했으며, 피의 전쟁을 벌이곤 하는 남미의 다른 마약왕들과 달리 폭력을 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돈세탁을 위해 정교한 문서를 기반으로 여행사, 와인 수입 업체 등 여러 사업체를 만들었다. 송금은 스위스와 홍콩의 은행을 이용했다. 이 기술은 후일 많은 마약상들이 차용하게 되었다.

미국 마약단속국 수사관 토머스 캐시는 와의 인터뷰에서 “마크스는 밀수 방법에서 완벽을 추구했고, 돈세탁 사업체를 전세계 많은 나라에 걸쳐 복잡하게 마련해두었다.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 그토록 많은 국가들의 노력이 필요했던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가석방 뒤 1996년 웨일스로 돌아와 라는 자서전을 썼다. 이 책은 100만 권 이상 팔렸다.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돼 2010년 영국에서 개봉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대마초 합법화’ 내걸고 총선 출마도</font></font>

밀수업을 그만둔 뒤 마약은 그의 삶에서 ‘동반자’ 구실을 했다. 마크스는 대마초 합법화를 위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97년에는 ‘대마초 합법화’를 단일 공약으로 걸고 총선에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무대에 올라 개인적 일화를 이야기하는 스탠드업 원맨쇼를 했고, 등에 글을 기고했다. 2006년엔 자서전의 속편인 를 펴냈다. 최근엔 (2011), (2013) 등의 범죄소설을 썼다.

마크스는 “늙은 히피”이자 평화주의자를 자처했다. 오늘날 마약 거래가 더욱더 폭력적인 일로 변해가고 있지만, 자신의 과거 마약 범죄만큼은 폭력과 이어져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대마초 거래가 불법으로 남아 있는 한 폭력적 마약 거래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마초 금지법으로 인해 발생한) 폭력과 테러리스트에 대한 기금 조달을 중단하라.”()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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