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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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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정치 ‘공간’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여성주의로 지리학의 지평 넓힌 도린 매시
등록 2016-04-07 16:24 수정 2020-05-03 04:28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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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물리학자나 건축가들을 위한 주제로 여겨진다. 영국의 지리학자 도린 매시(Doreen Massey)는 공간을 비판적으로 재인식하는 작업에 오랜 세월 몰두해왔다. 매시에 따르면 공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저 바깥에 고정적,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평평한 표면’이 아니다. 시간과 뒤얽혀 사회관계 속에서 늘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특히 자본과 권력은 매시가 공간을 이해하는 키워드였다. 그녀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사람, 도시, 일자리, 자본 사이의 공간적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정치와 권력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공간의 정치경제학을 기반으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스템, 불평등과 양극화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새로운 정치적 공간이 열리기를 갈망했다.

대처에 맞선 ‘도시 사회주의 실험’ 주도

현대 인문지리학에서 공간·장소·권력 연구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의 급진적 지리학자이자 여성주의자, 좌파 사회주의 정치활동가 도린 매시가 지난 3월11일 런던 킬번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2.

영국 일간 은 그녀의 부고를 전하며 “1970년대 이후 그녀의 공간·장소·권력에 대한 저작은 다음 세대의 지리학자들은 물론 창조적 예술가, 노동조합원 등 많은 이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주었다”고 적었다.

대표작으로 (1984), (1994), (2005), (2007) 등이 있다. 그녀는 마르크스주의 지리학, 여성주의 지리학, 문화지리학 등 진보적 지리학의 지평을 넓힌 공을 인정받아 1998년 지리학계의 노벨상인 보트랭 뤼드상을 받았다.

1970년대부터 오랫동안 매시와 함께 활동해온 인물들을 보면 그녀의 정치 사상의 궤적을 짐작해볼 수 있다. 급진 지리학 분야의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데이비드 하비, 문화연구를 창시했으며 ‘대처리즘’를 최초로 분석한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 좌파 이론가 마이클 러스틴, 사회학자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이고 여전히 활발한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인 힐러리 웨인라이트 등이 그들이다.

매시는 1980년대 도시지역사회주의 실험의 사례로 지금도 종종 언급되는 ‘런던광역시의회’(GLC·Greater London Council)에 참여했다. 런던광역시의회는 1981~86년 노동당 급진좌파가 다수당으로 런던의회를 장악하면서, 마거릿 대처의 신자유주의에 저항해 벌인 반정부 도시사회주의 프로젝트다.

당대표로 선출된 켄 리빙스턴을 중심으로 공공주택과 의료 등 사회복지, 대중교통 요금체계 개편, 대안적 경제노동정책 등 일련의 기획을 통해 도시 차원의 사회주의 실험을 꾀했다. 매시는 1982년 노동정책을 담당하기 위해 창설된 ‘광역런던기업위원회’(GLEB)에 참여했다. 당시 경제자문으로 참여했던 로빈 머레이는 “도린은 공간이 단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젠더화된 공간, 계급화된 공간 등 ‘사회적’인 것이라는 관점을 가져와 많은 이들의 인식에 변화를 일으켰고, 이를 통해 추상적 원칙을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꾸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대처 정부와 끊임없이 갈등을 빚던 런던광역시의회는 결국 1986년 폐지되었다. 이후 이들은 끓어오른 사회주의 정치의 가능성을 이어가기 위해 ‘아리엘 로드 그룹’이란 이름의 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런던 북서부 킬번 지역에 있는 매시의 집 거실에서 열리곤 했다.

매시는 지속적으로 런던이라는 도시에 열정을 가졌다. 특히 자신이 거주하는 킬번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을 계속해나갔다. 2013년 매시는 같은 지역 동료인 스튜어트 홀, 마이클 러스틴과 함께 ‘신자유주의 이후: 킬번 선언’을 발표하고 지배적인 신자유주의 시스템에 대한 대안을 논쟁할 수 있는 공간을 열기 위한 활동에 매진하기도 했다.

도린 매시는 1944년 1월3일 영국 맨체스터의 거대 공영주택 단지인 위센쇼에서 태어났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런던광역시의회’에서 함께 활동했던 사회운동가 힐러리 웨인라이트는 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매시의 어린 시절 경험이 젠더·인종 간 불평등과 함께 복잡하게 뒤얽힌 계급 착취, 지배계급 권력 문제와 관련한 그녀의 분노에 최초의 불을 붙였다고 생각한다”고 썼다.

광산 노동자 파업 때 여성 지지 활동도

매시는 옥스퍼드대학에서 지리학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대학 지역과학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8~80년 런던 환경연구센터에서 일하며 영국 내 토지 소유의 자본주의적 형태 등 경제의 지리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노동의 공간적 분업’이라는 혁신적 개념의 기초를 마련했다.

마거릿 대처 정부가 환경연구센터를 폐쇄하면서, 매시는 1982년부터 영국 개방대학(Open University)으로 자리를 옮겨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개방대학은 배움을 원하는 누구에게든 열려 있었으며, 이런 태도는 더 폭넓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그녀의 교육적 신념과 닿아 있었다. 매시는 옥스퍼드대학 교수직을 거절하고 죽기 전까지 이곳에서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매시는 1984~85년 영국의 대규모 광산 노동자 파업에 참여했다. 1970년대 후반 세계 경제구조가 제조업에서 서비스업 중심으로 변화하면서 석탄 소비가 줄고, 탄광은 줄줄이 문을 닫는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1984년 국영석탄공사가 남요크셔 지방의 코튼우드 탄광과 스코틀랜드 폴메이즈 탄광을 폐쇄시키자, 석탄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140개 탄광이 휴업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때 매시는 주로 광산 공동체의 여성들을 지지하는 활동을 했는데, “이 경험은 그녀로 하여금 젠더, 섹슈얼리티, 인종이라는 요소가 계급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매시가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한 것은 자신의 이론이 정치적으로 미치는 영향이었다. 매시의 공간 관련 이론은 다른 지역의 진보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선진국 중심의 ‘하나의 발전 서사’에서 비켜나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던 라틴아메리카 지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정부가 권력에 저항적인 매시의 지리학 개념(‘권력 기하학’)을 볼리바르 혁명의 ‘5대 원동력’ 중 하나로 차용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녀는 1980년대 중반 니카라과에 1년간 머물며 반미·반독재 무장 혁명단체 산디니스타 관련 연구를 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 과도기 때 현지 운동가들과 함께 젠더와 경제 관련 정책 토론에 참여하기도 했다.

매시는 최근 전세계에 퍼졌던 ‘점령하라’ 운동을 공간과 정치가 연결된 좋은 예로 보았다. 매시는 2013년 팟캐스트에 출연해 ‘런던을 점령하라’ 운동에 참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점령하라’운동에서 희망을 보다

“나는 그들이 한 일이 새로운 종류의 장소를 창조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도시에 한 일 중 하나는 많은 공공장소를 사유화한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사람들을 점령한 방식 중 하나다. ‘점령하라’ 참여자들은 런던 증권거래소 바깥에 캠프를 설치하려 했는데, 그 광장은 보기와 달리 사유지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그곳에 캠프를 세웠고, 그곳은 공공의 공간이 되었다.

그들은 없던 공간을 창조했고, 사람들은 일하러 가는 길이든 쇼핑하러 가는 길이든 그곳을 그저 지나가기만 하지 않고 멈춰 서서 함께 대화하고 논쟁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이나마 그곳을 진짜 공공의 공간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공공의 정치적 주제, 더 넓은 세계, 우리가 원하는 종류의 미래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공간. 아직 우리에게 더 많이 필요한, 그런 장소가 진정으로 창조된 것처럼 보였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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