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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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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거짓이 없었다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은 없었을까

미국에 이라크 대량살상무기 보유 가짜 정보 흘리고 ‘이라크해방법’ 입법 로비 주도했던 아마드 찰라비 이라크국민회의 대표
등록 2015-11-19 18:11 수정 2020-05-03 04:28

그는 자기 나라를 사랑했다. 그 점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대대로 풍요를 누렸던 축복의 땅, 떠밀려 떠났고 반세기 동안 돌아갈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자기 방식으로 자기 나라를 사랑했다. 그게 문제였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아마드 압델 하디 찰라비(사진)는 1944년 10월30일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는 지난 11월3일 “찰라비 집안은 이라크 왕실과 가까운 귀족 가문이었고, 한때 최대 상업은행을 운영했다”고 전했다. 전통 시아파 집안이었지만, 종교적 규율로부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어린 찰라비는 여느 부유층 자제들처럼 가톨릭 예수회가 운영하는 미국계 사립학교 ‘바그다드칼리지’에 다녔다. 총리 출신으로 현직 부통령인 이야드 알라위, 재무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원유장관으로 일하고 있는 압델 마디 등이 그 시절 동무다.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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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의 간디 자임하며 반후세인 진영 꾸려

1958년 7월14일 영국이 세운 하세마티 왕국이 군사 쿠데타로 무너졌다. 국왕 파이살 2세와 왕실 일가족이 몰살됐고, 공화국이 선포됐다. 찰라비 가족은 서둘러 국외 망명길에 올랐다. 오랜 유랑의 시작이었다. 이후 찰라비는 대서양을 오가며 영국과 미국을 근거지로 삼는다. 찰라비의 ‘필생의 적’인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이 집권한 것은 1968년, 후세인의 1인 지배 체제가 완성된 것은 1979년의 일이다.

젊은 찰라비는 학업에서 발군이었다. 미국의 명문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수학을 전공해 학부와 석사과정을 마쳤고, 시카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게 1969년의 일이다. 그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아메리칸대학 교수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1971년 저명한 레바논 정치인 아딜 오세이란의 딸 레일라와 그곳에서 결혼했다. 베이루트는 찰라비의 두 번째 고향인 셈이다.

1980년대, 찰라비는 두 가지 행보를 내딛는다. 신생 이슬람공화국(이란)과 조국의 독재자(후세인)가 8년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시아파인 찰라비는 자연스레 이란을 응원했다. 정치인 찰라비의 탄생이었다. 앞서 그는 1978년 대학을 박차고 나온 뒤 금융권으로 뛰어들었다.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그가 설립한 페트라은행은 삽시간에 요르단 제2의 상업은행으로 성장했다. 가업을 이어 금융인이 된 게다.

페트라은행을 통해 부를 쌓으면서, 찰라비의 정치적 영향력도 커졌다. 요르단 왕실과 정치권은 물론 재야 세력과도 두루 교분을 유지했다. 타고난 사교성과 세련된 안목이 그를 명망가로 키웠다. 파국은 우연찮게 찾아왔다. 1989년 5월 요르단 중앙은행이 돌연 시중은행의 지급준비율을 35%까지 높였다. 이를 지키지 못한 것은 페트라은행이 유일했다. 감사가 시작됐다. 은행 금고가 비어 있었다. 요르단 정부는 2억달러 규모의 은행자금을 횡령한 혐의 등으로 찰라비를 기소했다. 그는 체포 직전 왕실 차량을 이용해 국외로 도주했다. 요르단 법원은 1992년 찰라비를 궐석재판에 넘겨 징역 22년형을 선고했다.

1991년 제1차 걸프전쟁 직후 이라크 남부(시아파)와 북부(쿠르드족)에서 반후세인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봉기를 부추겼던 미국은 이라크군 내부 반후세인 진영의 쿠데타를 기다리며 직접 개입을 미뤘다. 쿠데타는 없었다. 봉기는 무참히 짓밟혔다. 이라크 남부와 북부 일대에 비행금지구역이 선포됐다. 미국은 이라크 망명자 단체 지원을 본격화했다.

흩어진 이라크 망명자 단체를 하나로 묶어낼 단체가 1992년 영국 런던에서 창설됐다. 찰라비가 대표를 맡은 ‘이라크국민회의’(INC)다. 인도의 ‘국민회의’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리카민족회의’에서 따온 이름인데, 작명은 미국의 유명한 광고회사가 맡았다. 인도에는 마하트마 간디가 있었다. 남아공에는 넬슨 만델라가 있었다. 미국의 지원이란 날개를 단 찰라비는 이라크의 간디이자 만델라를 자임했다.

미 의회가 후세인 정권 붕괴를 명문화한 ‘이라크해방법’을 통과시킨 건 1998년 9월 말이다. 이라크 침공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입법 로비를 주도한 찰라비는 워싱턴 정가의 명망가로 성장했다. 법안 통과로 미국의 자금 지원이 큰 폭으로 늘었다. 미 의회 회계감사원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1992년 창설 이후 2003년 3월 침공 직전까지 미국은 이라크국민회의 쪽에 1억달러가량을 쏟아부었다.

9·11 동시테러는 미국의 이라크 정책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화했다. 천금 같은 기회였다. 놓칠 그가 아니었다. 찰라비는 미국에 각종 ‘정보’를 제공했다. 후세인 정권이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를 제공한 것도 찰라비였다. 미 정치권에서 찰라비의 위상은 어느새 ‘이라크의 조지 워싱턴’급으로 높아졌다. 찰라비가 내놓은 정보는 가짜였다. 미 국방정보국(DIA)이 ‘최고의 정보 자산’으로 꼽았던 ‘커브볼’이란 암호명의 제보자는 찰라비 보좌관의 사촌이었다.

2003년 전쟁과 함께 화려한 ‘귀환’

찰라비의 거짓 정보가 없었다면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았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합리적 추론은 가능하다. 침공 이후 이라크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견하지 못하자, 미국은 ‘이라크의 자유와 해방’을 입에 올렸다. ‘중동 전역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겠다’고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찰라비의 정보가 조작됐다는 점을 정말 몰랐을까? 크게 상관없었을 터다. 어차피 침공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2003년 3월20일 바그다드에 폭탄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개전 직후 찰라비는 미군 수송기 편으로 남부 나시리야의 벌판에 내려섰다. 망명 정객으론 처음으로 이라크 땅을 밟은 게다. 화려한 귀향이었다. 미국 주도 연합군 임시행정처(CPA)의 지원 속에 찰라비는 과도정부 구성을 주도했다. 폴 브레머 임시행정처 최고행정관은 명망가 25명으로 구성된 과도통치위원회 위원으로 그를 임명했다.

침공 20일 남짓 만인 그해 4월9일 미 해병이 바그다드 중심가에서 후세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찰라비는 이날을 ‘해방기념일’로 선포하자고 제안했다. 나머지 과도통치위원 24명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찰라비는 시아파 무장단체 ‘마흐디군’을 이끄는 과격 성직자 무끄타다 사드르와 긴밀히 접촉했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부터 맺어온 이란과의 관계도 강화해나갔다. 오래잖아 미국과의 관계가 엇나가기 시작했다.

2004년 5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2000년 3월부터 매달 이라크국민회의에 지원하던 자금(33만5천달러)이 끊겼다. 미 해병이 그의 집과 이라크국민회의 본부를 급습했다. 처음엔 사기 혐의라고 했다. 위폐 발행과 횡령 혐의가 추가되더니, 찰라비가 미군의 민감한 정보를 이란에 넘겼다는 풍문이 퍼졌다. 정부가 없는 혼란기, 찰라비는 짧은 기간 부총리와 원유장관 등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나라에서 그는 낯선 인물이었고, 대중은 그를 외면했다. 2005년 12월 총선에서 찰라비가 이끈 이라크국민회의는 단 1석도 얻지 못했다. 찰라비의 이름이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다.

미국의 침공 이후 이라크는 두 차례 종족 갈등으로 찢겼다. 점령 초기 임시행정처는 후세인 정권의 공화국수비대를 해산했다. 잘 훈련되고 무장한 25만 명가량이 이라크 전역으로 흩어졌다. 대부분 수니파였던 이들이 반미 저항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수니-시아파 간 유혈 사태도 불을 뿜었다.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에게 군대 해산을 제안한 것은 찰라비였다.

2008년 중반 이후 주춤했던 종족 갈등은 2010년 초반 다시 불붙었다. 그해 3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위기로 내몰린 누리 말리키 총리가 정적 제거 작업에 나선 탓이다. 찰라비가 위원장을 맡은 ‘탈바트당화위원회’가 유력 수니파 정치인 500명의 후보 자격을 박탈하면서 불만이 폭발했다. 유혈극이 꼬리를 물면서, 도처에 피가 뿌려졌다.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을 넘나들며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는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가 힘을 키운 게 이 무렵부터다.

정작 이라크 대중에게 외면당한 쇠잔한 말년

2006년 5월 집권한 말리키 총리는 2014년 9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퇴임을 앞두고, 쇠잔해가던 찰라비의 정치적 명운이 마지막으로 불씨를 키웠다. 이라크 침공을 주도했던 리처드 펄 전 국방자문위원장 등 네오콘 진영이 찰라비를 밀었다. 이란도 측면 지원에 나섰다. 결과? 후세인 정권에 맞서다 1980년대 영국으로 망명했던 하이다르 압바디가 새 총리로 선출됐다. 2015년 11월3일 오전 이라크 영문매체 은 찰라비의 낡은 사진과 함께 세 줄의 급보를 전했다.

“이라크국민회의 대표 아마드 찰라비가 숨졌다. 항년 70. 정부 소식통은 ‘이라크국민회의 대표이자, 의회 금융위원장인 아마드 찰라비 의원이 바그다드 북부 카디미야의 자택에서 이른 아침 숨을 거뒀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식통은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덧붙였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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