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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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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같았던 4년, 혁명가가 죽자 그 땅은 다시 가난해졌지

마티외 케레쿠 베냉 전 대통령이 숨지자 떠오르는 급진적 혁명가, 부르키나파소의 ‘체 게바라’ 토마 상카라
등록 2015-10-28 18:18 수정 2020-05-03 04:28

“서아프리카 기니만 연안국가 베냉에서 ‘민주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티외 케레쿠 전 대통령이 노환으로 숨졌다.” 지난 10월15일 <bbc> 아프리카판은 이렇게 보도했다. 향년 82. 같은 날 의 케레쿠 부음 기사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베냉을 민주화로 이끈 (은퇴한) 독재자가 숨졌다.”
베냉의 현대사는 여느 아프리카 국가와 궤적을 같이한다. 19세기 말 프랑스 식민지가 된 베냉은 2년여 자치를 거쳐 1960년 독립했다. 독립 직후부터 종족 갈등과 권력투쟁이 불을 뿜었고, 나라 꼴을 제대로 갖출 새도 없이 쿠데타가 잇따랐다. 온통 엉망이었다. 그러던 1972년 10월 육군 중령 마티외 케레쿠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권을 장악했다. 독립 이후 5번째 쿠데타였다.
용맹한 군인이자 밴드 기타리스트
애초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사회주의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했던 그는 2년 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국정 기치로 내세웠다. 원유산업과 은행 국유화 등을 추진하며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처음엔 소비에트에서, 나중엔 프랑스에서 핵쓰레기를 수입해 국고를 메웠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 몰락과 함께 외부 지원이 끊기자, 케레쿠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던졌다. 그럼에도 군부를 비롯한 각계 압박이 거세지자, 케레쿠는 1990년 다당제 도입을 뼈대로 한 정치 민주화 계획을 내놨다.
1991년 치러진 대선에서 케레쿠는 총리를 지낸 소글로 니세파르에게 패했다. 그는 권력을 순순히 넘겼다. 케레쿠의 부음에 ‘베냉 민주화의 아버지’란 영예가 더해진 이유다. 케레쿠는 1996년과 2001년 대선에서 거푸 당선되며 10년을 더 집권했다. 쿠데타 이후 30년 가까이 권력을 누린 게다. 그 긴 세월 동안, 베냉 국민의 삶의 질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그의 부음을 접하며, 고개 들어 베냉의 북쪽 땅을 바라본 것도 그 때문이다. 베냉과 엇비슷한 역사를 가진 나라, 부르키나파소 말이다. 그곳에서 케레쿠가 살다 간 세월을 농축해 살았던 사람이 있다.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로 불리는 토마 상카라다.

지난해 12월2일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블레즈 콩파오레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스러진 6명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토마 상카라 전 대통령과 이자크 지다 전 총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REUTERS

지난해 12월2일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블레즈 콩파오레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스러진 6명의 넋을 기리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이 토마 상카라 전 대통령과 이자크 지다 전 총리의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을 펼쳐 보이고 있다. REUTERS


토마 이시두구 노엘 상카라는 1949년 12월21일 중북부 소도시 야코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모는 어린 상카라가 사제가 되기를 바랐다. 아들은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 시절 아프리카에선, 군대가 더 나은 삶을 위한 통로 구실을 했다. 고교를 마치고 19살에 군문에 들어선 상카라는 1970년 장교 후보생으로 선발돼 마다가스카르에서 교육을 받게 됐다. 그곳에서 필리베르 시하나나 독재에 맞선 1971~72년 민중항쟁을 목격했다. 상카라가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을 탐독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72년 귀국 뒤 2년 만에 북쪽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말리와 영토분쟁이 격화됐다. 상카라는 최전선으로 파견됐다. 젊은 그는 용맹했고, 여러 전과를 올리며 이름을 알렸다. 상카라가 당시 국경 분쟁에 대해 ‘쓸모없고 불의한 전쟁이었다’고 회고한 것은 나중의 일이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는 수도 와가두구에서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그 시절 그는 짬을 내 ‘투타큐(갑자기) 재즈’란 이름의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고, 모터사이클을 즐기기도 했다. 말리 전선에서 만나 ‘동지’가 된 블레즈 콩파오레는 보컬로 밴드에 합류했다.
2년 뒤인 1976년 상카라는 가나 국경에 가까운 중남부 요충지 포에 신설된 특전요원 훈련소장에 임명됐다. 그는 블레즈를 부사령관에 지명해 함께 임지로 향했다. 이 무렵 두 사람은 군부 내 전위조직인 ‘공산주의 장교단’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1981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젊은 피’ 상카라를 공보장관으로 발탁했다. 1982년 11월 또 다른 쿠데타가 벌어졌다. 새 정권은 1983년 1월 상카라를 총리에 지명했다. 그해 5월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의 아들로, 정부 아프리카 정책보좌관이던 장 크리스토프 미테랑이 방문해 상카라와 면담을 했다. 의심 많은 군부는 상카라를 전격 가택연금시켰다. ‘공산주의 장교단’ 동지들도 여럿 구금됐다. 대중적 분노가 커졌다.
그해 8월 콩파오레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독립 뒤 네 번째 쿠데타였다. 구금됐던 동지들은 풀려났고, 상카라는 33살 나이에 대통령에 올랐다. 이듬해인 1984년 10월 상카라는 나라 이름을 ‘오트볼타’(볼타강 상류)에서 ‘부르키나파소’로 바꿨다. 최대 부족인 모시족 말인 ‘부르키나’는 ‘존엄하고 정직한 사람’을 뜻한다. 줄라족 말에서 따온 ‘파소’는 땅과 나라를 뜻한다. ‘존엄한 사람들의 땅’, 젊은 혁명가가 조국에 바친 헌사였다.
“우리나라는 전 국민이 먹을 만큼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식량 분배 체계가 없어서, 외국에 식량 원조를 구걸해야 할 처지다. 우리 안의 ‘거지 근성’을 짜내는 게 바로 식량 원조다.”
집권 4년만에 식량 자급 이루고 할례도 금지
집권 이후 상카라가 맨 먼저 한 일은 농촌 지역에서 봉건 영주처럼 군림해온 부족장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공물 강요, 강제노역 동원 따위는 철저히 금지됐다. 부족장이 소유한 토지는 징발해 농민들에게 고루 분배했다. 인구의 80%에 가까운 농민들의 삶의 질과 함께 식량 자급도까지 높이는 두 가지 목적을 한꺼번에 이루기 위한 조처였다. 여기에 정부 주도의 관개수로 정비와 비료 지원 사업 등이 더해졌다. 부르키나파소는 상카라 집권 4년 만에 식량자급을 이뤘다. 상카라는 1984년 8월 토지와 광물자원 국유화를 선언했다.
포괄적인 예방접종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소아마비·뇌수막염·황열병 등 천형으로 여겨온 각종 전염병을 박멸하기 위한 노력이 집중됐다. 1984년 11월 단 보름 남짓 만에 어린이 약 250만 명을 대상으로 예방접종을 실시한 것은 세계보건기구(WHO)의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대대적인 주거 개선 사업과 인프라 건설 사업도 병행됐다. 황폐해진 산림 복원을 위해 줄잡아 1천만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간선도로가 전국을 이었고, 수백km의 철로가 마련됐다. 이 모든 것이 외부 원조나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을 통한 차관 없이 이뤄졌다.
만연한 성차별도 상카라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는 전통적인 여성 할례와 강제 결혼, 일부다처제 등을 전면 금지시켰다. 장관급을 포함한 정부 고위직에 진출한 여성도 전례 없이 늘었다. 여성의 군 입대도 권장했다. 그 시절 아프리카에선 매우 드문 일이다. 공직 부패 척결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대통령 월급은 450달러로 정해졌다. 최고급 관용차를 매각하고, 중형차로 바꿨다. 해외 줄장에 나서는 공직자도 더는 1등석을 탈 수 없게 했다. 그는 “1등석이든 이코노미석이든, 이륙과 착륙은 동시에 한다”고 강조하고는 했다.
나라 안에선 기득권을 빼앗긴 이들이 앙심을 품었다. 밀어붙이기식 개혁 정책과 반대 세력에 대한 단호한 대응도 불만을 키웠다. 나라 밖에선 노회한 권력이 신생 혁명을 향해 눈을 째렸다. 파국이 다가오고 있음을 감지했던 걸까? 상카라는 숨지기 약 일주일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혁명가 개인을 죽일 순 있어도, 혁명의 대의를 죽일 순 없다.”
1987년 10월15일, 땅거미가 진 직후였다. 독립 이후 5번째 쿠데타가 벌어졌다. 국방장관이던 콩파오레가 다시 나선 게다. 무도한 군홧발이 대통령 집무실을 유린했다. 동지 12명과 함께 회의를 주재하던 상카라는 목숨을 잃었다. 향년 37. 쿠데타군은 그의 사인을 ‘자연사’라고 발표했다. 상카라의 주검은 와가두구 외곽에 버리다시피 매장했다. 콩파오레는 대통령이 됐다. 부르키나파소는 다시 식량 원조를 위해 손을 벌렸고, 차관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신세가 됐다. 콩파오레의 시대는 그 뒤 오래도록 지속됐다.
암살 28년 뒤에야 발견된 유해는 온통 총알 자국
2014년 10월, 콩파오레는 임기를 5년 더 늘리기 위해 개헌을 추진했다. 마침내 성난 민심이 폭발했다. 시위대는 개헌을 논의하던 의회에 불을 놓았다. 버티던 콩파오레는 결국 코트디부아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가 구성됐고, 2015년 10월 대선을 치르기로 했다. 혁명이었다. 지난 5월 부르키나파소 법원은 상카라의 유해 발굴을 허락해달라는 유가족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사후 27년 만의 일이다. <afp>은 10월13일 “상카라의 유해는 온통 총알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고 전했다.
지난 9월17일, 독립 이후 6번째 쿠데타가 벌어졌다. 콩파오레 정부 충성파가 저지른 짓이었다. ‘존엄한 이들’이 다시 거리로 나섰다. 지난해 10월 콩파오레를 몰아낼 때 외쳤던 구호가 다시 메아리쳤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우리 승리하리라.’ 상카라 정부의 구호였다. 쿠데타는 6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임시정부는 복원됐다. 부르키나파소 대선은 오는 11월29일 치러질 예정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afp></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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