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1월, 미국 매거진 의 표지에는 기저귀를 차고 실험실 바닥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는 한 여자아이의 사진이 실렸다. 표제는 ‘시험관아기 붐’. 그 아래 새겨진 문구는 이랬다. ‘자신이 잉태된 실험실에서, 미국 최초의 시험관아기, 엘리자베스 카’.
1981년 불임치료‘사업’이 시작되다
시험관 시술이 흔해진 요즘은 난자를 자궁 밖에서 수정시킨다는 발상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지 모른다. 30여 년 전만 해도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시험관 시술은 의학계의 혁명이었다. 낙태 반대론자와 종교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생명윤리의 문제를 제기하며 극렬히 반대했고, 이같은 논쟁은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하워드 존스(1910~2015) 박사는 미국의 시험관아기 붐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는 1979년 아내인 조지아나 존스 박사와 함께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의 이스턴버지니아 의과대학에 불임 클리닉을 설립했고, 1980~81년 두 해에 걸쳐 41차례 체외수정을 시도했다.
엘리자베스 카의 엄마, 주디 카는 존스 불임 클리닉의 13번째 환자였다. 앞서 세 차례 임신을 했으나 자궁외임신으로 나팔관 제거 수술을 했고, 자연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몇 차례 시도 끝에 1981년 12월28일, 카 부부는 미국 내 첫 번째 시험관아기의 부모가 되었다. 영국의 로버트 에드워즈 박사 연구진이 세계 최초의 시험관아기 루이스 브라운을 탄생시키고 3년이 지난 뒤였다(에드워즈 박사는 이 업적으로 2010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존스 부부의 시험관아기 성공 이후, 미국의 불임 치료 사업에 불이 붙었다. 존스 불임 클리닉에는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불임으로 고민하던 부부들이 모여들었다. 관련 기술을 배우려는 다른 나라의 의사들도 몰렸다. 이 중 우리나라의 문신용 서울대 의대 교수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5년 10월 첫 시험관아기가 탄생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시험관 시술로 태어난 아기는 전세계적으로 500만 명에 이른다. 그중 100만 명가량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미국 안에서만 보면, 전체 태어나는 아이의 1.5%에 달하는 수다.
미국 시험관 시술의 선구자이자 미국 최초의 성전환 클리닉을 연 하워드 존스 박사가 지난 7월31일 호흡기능상실로 숨졌다. 향년 104. 그는 자신이 열어젖힌 새로운 세계를 충분히 목격하고, 비로소 이 세상에서 소멸했다.
동의 없는 세포 채취, 불멸의 ‘헬라세포’존스 박사는 1910년 미국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1935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940년 같은 학교의 학생이던 조지아나 시가와 결혼했다. 그들은 이후 오랜 세월 연구 활동을 함께 한 평생의 동반자였다. 존스 박사는 존스홉킨스 의과대학병원에서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했으며, 정년퇴직 이후 이스턴버지니아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7년 아내가 알츠하이머로 환자를 진료할 수 없게 되자 그도 함께 은퇴했다. 존스 부인은 2005년 92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존스 박사는 은퇴 뒤에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100살이 넘은 나이에도 매일 연구실에 출근해 읽고 쓰고 콘퍼런스에 참여하는 등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12권의 책을 썼으며, 103살이던 지난해 가을 마지막 저서 을 출간하기도 했다.
존스 박사는 산부인과 수술 분야의 경계를 넓힌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일하던 1950년대에 존스 박사는 자궁경부상피내암이 당시 알려져 있던 것보다 훨씬 더 치명적임을 밝혀냈고, 생식기 이상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해 1958년 이라는 책을 공동 출간하기도 했다.
존스 박사의 환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헨리에타 랙스일 것이다. 흑인 여성인 헨리에타는 1951년 이상 출혈과 체중 감소 등으로 존스홉킨스 병원을 찾았다. 존스 박사는 그녀의 자궁에서 혹을 발견해 조직검사를 실시했다. 이후 헨리에타는 자궁경부암 진단을 받고 4개월 만에 사망했지만, 그녀의 난소에서 채취한 세포는 몇 주가 지나도록 성장을 멈추지 않고 증식했다. 이것이 오늘날 불멸의 ‘헬라세포’로 불리는, 실험실에서 배양된 첫 인간세포다. 헨리에타의 세포는 끝없이 살아남아 소아마비 백신, 항암치료제, 에이즈 치료제 개발, 인간 유전자지도 구축 등 셀 수 없이 많은 의학 분야의 획기적 발전을 가능케 했다.
2009년 헬라세포에 얽힌 진실을 폭로한 책 (레베카 스클루트 지음, 문학동네 펴냄, 2012)이 출간되면서 환자의 동의 없이 세포를 채취하고 실험에 남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생명윤리·인종·의학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존스 박사는 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은 비판에 대해 “(각종 실험은) 나중에 생겨난 일일 뿐 당시 의료 행위에 문제는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남성 생식기 잃은 아이를 여성으로존스 박사는 특히 남성도 여성도 아닌 ‘모호한 생식기’를 가진 아기들에 주목했다. 그는 1965년 미국 병원 최초의 성전환 클리닉인 존스홉킨스 성정체성 클리닉의 설립에 참여했다.
1970년대에 존스 박사는 생식기의 구조가 전형적인 남성 혹은 여성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간성’ 어린이에 대한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를 비롯한 의료진은 이 환자들이 18개월 이전에 성전환 수술을 하기만 하면 바뀐 성별에 심리적으로 잘 적응해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다.
당시 성전환 수술을 받은 환자 중 데이비드 라이머라는 남자아이는 포경수술 사고로 생식기를 잃고 찾아온 갓난아이였다. 존스 박사는 부모의 요청에 따라 생식기의 남은 부분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여성의 생식기를 만들었다. 이후 청소년기를 거치는 동안 데이비드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주사를 맞고, 여성으로서의 성정체성을 강요받는 등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았다. 데이비드는 결국 본래 자신의 성별인 남성으로 돌아왔고,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오늘날 이러한 질환은 ‘성발달장애’(DSD)로 불린다. 많은 이들이 영·유아기의 강제 성전환 수술에 반대한다. 이들은 개인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지하고 스스로 수술 의사를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수술이 미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스 박사는 성전환 수술에 대해 “당시 제기됐던 질문은 도덕적·심리적 문제가 아니라, 의학적 관점에서 이 수술이 유용한가에 대한 문제였다.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고 말했다.
존스 부부는 1984년 바티칸에 초청된 적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생식기술과 관련한 교황청과학원의 심포지엄에 존스 부부를 초대한 것이다. 바티칸에 미국의 산부인과 의사가 초청된 것은 이들이 유일했으나, 몇 년 뒤 공식 발표된 교회의 훈령에 이들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다. “(체외수정에 의한) 이러한 출산은 생명을 의사와 생물학자들의 힘에 맡기며, 인간 개인의 근원과 운명에 대한 기술의 지배 우위를 확고히 한다.”
언제부터 생명인가?존스 박사는 인간의 생식기술 진보의 최전선에 있었고, 그곳은 언제나 첨예한 논쟁의 장이었다. 낙태 반대론자뿐 아니라 낙태 지지자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냉동된 배아를 인격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든 배아가 착상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착상된 배아가 출산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주지했으나, 논쟁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는 102살 때 출간한 책 에서 배아를 인격체로 정의하려는 입법적인 움직임을 비판했다. 그는 ‘결국 파괴될 수천 개의 배아를 만들었다’는 비난에 대해 “그것은 대개 미세한 세포들의 덩어리인 채로 소멸되어버리는, 자유롭게 떠다니는 수정란의 손실일 뿐”이라고 말했다.
미국 최초의 시험관아기 엘리자베스 카는 지금 33살,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이 세상에 데려다놓은 존스 박사가 “마치 내 할아버지 같았다”고 말했다. “존스 박사님은 종종 제게 연락해 안부를 물었고, 매년 생일에 축하 전화를 해주었어요.” 이제 그는 죽었고, 그의 ‘실험실’에서 ‘생산’된 4천여 명의 시험관아기가 이 세상에 남았다.
이로사 객원기자 goorra@daum.net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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