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전야’(Freedom’s Eve). 드디어 내일이다. 구릿빛 피부의 노예들이 하나둘 교회로 모여든다. ‘워치 나이트.’(Watch Night) 깨어, 기도하라. 때는 1862년 12월31일, 하루 뒤인 1863년 1월1일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선포한 ‘노예해방령’이 발효되는 날이다. 이후 해마다 새해 첫날,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유서 깊은 항구도시 찰스턴에선 이를 기념하는 거리행진이 펼쳐진다. 행진의 종착지는 이매뉴얼 아프리카계 감리교회(이하 이매뉴얼 교회)다.
갖다놓은 테이저 그리고 ‘월터 스콧 법’
2015년 6월17일 이른 아침, 클레멘타 핀크니는 여느 때처럼 분주했다. 가 이튿날 전한 내용을 보면, 두 딸과 함께 부인이 준비한 아침 식사를 마친 그는 서둘러 차에 올랐다. 주도 컬럼비아의 의사당까지는 리질랜드 자택에서 약 2시간이 걸린다. 오전 9시30분, 핀크니는 상원 금융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의 안건은 장학금 재원 마련 방안. 논의가 채 끝나기 전에 민주당 소속 핀크니 상원의원은 슬며시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다시 차로 1시간30분여, 핀크니 의원이 도착한 곳은 노스찰스턴의 한 대학 강당에 마련된 행사장이었다. 이날 그곳에선 내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유력한 힐러리 클린턴의 유세가 열렸다. 연단에 오른 클린턴 후보는 ‘월터 스콧의 비극적 죽음’을 입에 올렸다.
지난 4월4일 오전 9시30분께 노스찰스턴의 한 대형마트 인근에서 지게차 운전기사 월터 스콧(50)이 경찰의 총에 맞아 숨졌다. 당시 경찰 쪽은 “스콧이 몰던 차량의 브레이크 등이 고장나 단속하기 위해 멈춰세웠더니, 스콧이 테이저(전기충격장치)를 빼앗아 달아났다.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총기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사실이 아니었다. 그날 경관은 불과 5~6m 앞에서 달아나는 스콧을 향해 권총 8발을 발사했다. 그중 5발이 그의 몸 구석구석에 박혔다. <nbc> 방송이 입수해 공개한 목격자가 찍은 동영상을 보면, 스콧이 숨진 걸 확인한 경관은 순찰차에서 테이저를 가져다 그의 주검 곁에 내려놨다. 해당 경관은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찰스턴 인구의 37%, 경찰의 80%가 백인이다.
사건 발생 직후 여론이 들끓었다. 핀크니 의원은 지난 몇 년간 끈질기게 추진해온 입법안을 다시 밀어붙였다. 근무 중인 경관의 몸에 소형 카메라 부착을 의무화하는 게 뼈대다. 경찰의 과도한 물리력 행사를 막으려는 의도다. 스콧 사건에 힘입어 해당 법안은 주 상원(4월 말)과 하원(5월 중순)을 차례로 통과했다. 이른바 ‘월터 스콧 법안’이다.
클린턴 후보의 유세 일정은 이날 오후 늦게 끝났다. 핀크니 의원은 다시 차에 올라 20분 남짓 달렸다. 차량은 이매뉴얼 교회 앞에서 멈췄다. 이제 ‘본업’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그는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매주 수요일 오후 6시에 시작되는 성경공부 모임이다.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마가복음 4장 16~17절)
이날 저녁의 공부 주제는 마가복음 4장, ‘씨 뿌리기 비유’다. 참석자는 핀크니 목사를 포함해 12명,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저녁 8시15분께 낯선 청년이 슬며시 나타났다. 그는 핀크니 목사 곁에 앉았다. 40~50분쯤 흘렀을까? 청년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도 컬럼비아 외곽에 사는 21살 백인 청년 딜런 스톰 루프다. “너희가 우리 여성을 범했다. 너희가 우리나라를 빼앗았다. 이제 너희가 떠날 차례다.”
마가복음 ‘씨 뿌리기 비유’ 공부 와중에
현지 매체 의 보도를 종합하면, 짧은 시간 루프는 45구경 권총의 탄창을 다섯 차례 갈았다. 핏빛 혼돈이 잦아든 뒤 찰스턴 경찰 당국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했다. 타이완자 샌더스(26·남), 샤론다 싱글턴(45·여), 드패인 미들턴(49·여), 신시아 허드(54·여), 마이라 톰슨(59·여), 에텔 랜스(70·여), 대니얼 시몬스(74·남), 수지 잭슨(87·여). 사망자 명단의 맨 앞에는 담임목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향년 41.
클레멘타 카를로스 핀크니는 1973년 7월3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뷰퍼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와 삼촌도 이매뉴얼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며 흑인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교육학자인 부친의 양육 속에 영민한 아들은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13살 때부터 교회에서 설교를 시작한 핀크니는 18살에 목회자 안수를 받았다. 그는 교단이 1870년 설립한 유서 깊은 흑인교육기관인 앨런대학교에 진학해 1995년 우등으로 졸업했다.
‘교회 밖에도 성전이 있다.’ 핀크니 목사는 집안 전통에 따라 정치활동도 병행했다. 23살 때인 1996년 주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된 그는 ‘최연소 흑인 의원’이었다. 4년 뒤엔 주 상원으로 무대를 옮겨 숨지기 전까지 정력적으로 일했다. 학업도 이어갔다. 1999년엔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또 웨슬리신학대학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거쳐 2012년부터 목회학 박사과정을 밟아왔다. 고향인 뷰퍼트와 찰스턴, 컬럼비아 등지의 교회를 거친 그가 이매뉴얼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이매뉴얼 교회는 미국 남부에서 최고의 역사를 가진 흑인교회 가운데 한 곳이다. 누리집에는 설립 연도가 1816년으로 적혀 있다. 공동설립자 가운데 눈에 띄는 이름이 있다. ‘덴마크 비시’. 1767년 버뮤다제도의 덴마크령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난 그는 14살 때 노예상인 조 비시 선장에게 팔렸다. 32살 때 우연히 산 복권에 당첨돼 600달러의 몸값을 내고 스스로 해방노예가 된 그는 태어난 곳과 옛 주인에게서 각각 이름을 따왔다.
목수로 일가를 이룬 그는 백인 교회의 차별을 피해 ‘독립’한 흑인교회를 지원했다. 교인들에게 문자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시 당국은 툭하면 교회 문에 못질을 해댔다. 불만이 쌓여갔다. 비시는 비밀리에 ‘해방투쟁’을 모의했다. 당시 찰스턴의 인구는 흑인이 1만4천여 명, 백인이 1만 명 남짓이었다.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해방된 노예들의 땅 아이티가 멀지 않다. 더글러스 이거튼 뉴욕 르모인대학 교수(역사)는 지난 6월18일 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애초 거사일은 7월14일, 프랑스혁명 당시 시위대가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던 날이다. 계획은 분명했다. 먼저 무기고를 습격한다. 이어 노예들을 해방시킨다. 저항하는 노예주는 가차 없이 응징한다. 찰스턴 항구에 정박한 배를 장악하고, 해방된 노예들과 함께 아이티로 향하는 게 대단원이었다. 하지만 밀고자가 있었다. 거사일은 6월16일로 앞당겨졌다.”
1865년 비시를 포함한 35명이 교수형
늦었다. ‘거사’에 가담하기로 했던 313명이 체포됐고, 비시를 포함해 35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교회는 폐쇄됐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이 불을 질러 건물도 잿더미로 변했다. 교회가 다시 문을 연 것은 1865년 남북전쟁이 막을 내린 이후다. 당시 교회 재건을 주도한 것은 목수이자 건축가인 로버트 비시, 덴마크 비시의 아들이었다.
1822년 6월17일 찰스턴에서 백인은 단 1명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2015년 6월17일 찰스턴에서 흑인 9명이 숨졌다. 이거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찰스턴의 백인들은 여전히 덴마크 비시를 테러범이라 부른다. 비시는 자유를 위해 싸웠다. …거사가 계획대로 진행됐다면, 본격적인 싸움은 6월17일 시작됐을 것이다. 끔찍한 우연인지 범인이 이런 역사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날짜가 같은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6월24일 저녁 6시, 이매뉴얼 교회 수요 성경공부 모임은 예정대로 열렸다. 6월26일 찰스턴대학 체육관에서 치러진 핀크니 목사의 장례식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조사를 했다. 운구 행렬은 이매뉴얼 교회에서 멈춰섰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n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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