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아시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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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과 비명이 난무하는 공간에 플라스틱 물병이 날아들었다. 지난해 8월2일 오전, 타이베이 중산구에 있는 대만 입법회 건물(한국의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대만 제1야당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 입법위원 40여 명은 이날 새벽 일찌감치 입법회 건물로 모여든 뒤 본회의장 문을 걸어잠갔다. 여당이자 입법회 다수당인 국민당이 1999년부터 신베이시 궁랴오구에 짓고 있는 룽먼 4호기 핵발전소의 가동 여부를 결정하는 국민투표 안건을 단독 처리하겠다고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의장석을 점거한 민진당 입법위원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하라”고 외쳤다. 잠긴 출입문을 뚫고 들어온 국민당 위원은 이를 막아선 민진당 위원과 함께 회의장 바닥에 뒤엉켜 굴렀다. 본회의장은 통제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여의도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이날의 촌극은 우리나라 언론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이날 벌어진 갈등은 그저 흔한 ‘해외 토픽’이라 말하기에는 녹록지 않다. 대만 4호기 핵발전소를 둘러싸고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던 ‘국민투표’ 갈등이 폭발한 날이기 때문이다.
2000년 천수이볜 총통의 탈핵 선언
국민투표가 대만 사회에서 뉴스의 중심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1987년 대만에서 계엄령이 해제되면서부터다. 집권세력의 자리를 굳혔던 국민당은 1992년 계엄령 해제 이후 처음으로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과거 군사정부 시절 핵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던 것처럼, 4호기 핵발전소 계획도 밀실에서 이뤄졌다.
바뀐 세상에서는 거센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대만 환경단체와 민진당은 도시 밀집 지역과 가까운 거리에 들어서는 4호기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문제 삼았다.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벌어진 지 몇 년 지나지 않던 상황이었다. 민진당은 더 나아가 “대만 분리독립 여부뿐만 아니라 핵발전소 가동에 대한 찬반 문제도 국민투표로 다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1년에는 시민사회단체가 중심이 된 ‘4호기 핵발전소 국민투표 추진위원회’까지 꾸려졌다.
국민당은 ‘국민투표 여론’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대만전력공사(TPC)는 부지 선정을 끝낸 뒤 1992년부터 4호기 핵발전소 건설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지방자치단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주민투표’로 맞섰다. 1994년 신베이시 궁랴오구를 시작으로 핵발전소와 가까운 지역에 있던 타이베이시·타이베이현·이란시 등에서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의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모두 4차례 진행됐고,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당시 법 체계에서는 국민당 정부가 주민투표 결과를 정책에 반영할 법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진통을 빚던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은 2000년 민진당의 천수이볜이 총통에 오르면서 새로운 갈림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공약에 따라 취임 첫해에 4호기 핵발전소 건설을 중단했다. 이미 가동 중이던 3곳의 핵발전소도 점진적으로 폐로하겠다는 사실상 ‘탈핵 선언’을 했다. 국민당과 핵발전 업계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건설에 참여한 미국 GE와 일본 히타치·도시바는 공사비 위약금 소송을 진행하겠다고 했다. 대법원회(한국의 헌법재판소)가 총통의 건설 중단 결정은 위헌이라고 판단하면서, 공사는 이듬해부터 다시 벌어졌다.
그러나 핵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천수이볜 총통이 핵발전소 건설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추진하겠다고 선언하자, 당시 입법회 다수당이자 제1야당인 국민당은 2003년 12월 단독으로 국민투표의 절차와 기준을 담은 ‘국민투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는 국민투표의 내용은 국가 안보 사안으로 제한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10년 만에 국민투표 다시 꺼낸 마잉주
진행 절차도 까다로웠다. 민간 영역에서 투표 발의를 하려면 10만 명의 서명이 필요했다. 그 뒤에는 중앙정부의 투표심의위원회가 타당성 여부를 조사하는 투표 발의 심사를 거치며, 이 과정이 끝나면 전체 유권자의 5%(약 100만 명)가 서명해야 비로소 ‘국민투표’를 진행할 수 있다. 투표가 이뤄진다고 해도 전체 투표율이 50%를 넘어야 유효하며, 이 가운데 절반을 넘긴 내용이 반영된다. 과도하게 복잡한 절차 탓에 결국 국민투표로 핵발전소 문제를 돌파하겠다던 환경단체·민진당의 의도는 물거품이 됐다.
10년 가까이 유명무실했던 국민투표가 논란의 중심으로 다시 떠오르게 된 건, 지난해 국민당 소속 마잉주 총통이 핵발전소 건설·가동 여부를 국민투표로 결정하자고 제안하면서부터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터진 뒤, 대만 사회에서 어느 때보다 핵발전소 가동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자 나온 제안이었다. 그는 1년 동안 4호기 핵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예산을 동결하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환영받지 못했다. 핵발전소 가동에 반대하는 이들은, 절차가 복잡한 국민투표를 제안한 것은 6월부터 진행하는 4호기 핵발전소의 시험가동까지 불필요한 사회적 논란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국민투표에 사용하겠다고 밝힌 질문 내용도 논란이 됐다. “당신은 4호기 핵발전소가 중단돼야 하며 가동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하십니까?”라는 질문이 유권자들에게 ‘핵발전소 가동 반대’ 주장이 부정적으로 비칠 만하다는 것이다.
국민투표가 핵발전소에 대한 대만 사회의 여론을 왜곡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체 핵발전소 4곳 가운데 3곳이 대만섬 북쪽에 밀집해 있으며, 나머지 1곳도 섬 남쪽 끝에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핵발전소 30km 일대에 밀집한 타이베이·신베이 등 북쪽 대도시 주민들은 핵발전소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지만, 대만섬 중·남부 지역으로 갈수록 핵발전소 문제를 긴박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핵발전소 근처 마을 주민들이 “전체 국민이 아닌 지역 주민의 의견을 우선 깊이 반영하라”고 주장하는 이유도 그렇다.
오직 충돌만 남아 있는 상황
국민투표로도 접점을 찾지 못한 대만 핵발전소 건설 논란은 올해를 기점으로 또 다른 길에 접어들고 있다. 4호기 핵발전소가 올해 시험가동을 거친 뒤, 2016년 예정된 상업운전 준비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핵발전소 건설 반대운동을 이끌어온 대만환경보호연맹(TEPU) 공동대표인 신민신 전 대만국립대 화학공학과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건설 중단이) 언제 이뤄질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노력할 뿐이며, 옳다고 생각한 일에 대해서는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노력할 만큼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리겠다.” 오래전 해결책을 놓친 대만 핵발전소 건설 문제에는 오직 충돌만 남아 있다.
타이베이(대만)=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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