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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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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고에 아무도 놀라지 않는 이유

실패로 끝난 홍콩 핵발전소 반대 투쟁
등록 2014-03-13 15:14 수정 2022-11-08 18:57
홍콩 성공회 신부 펑츠우드

홍콩 성공회 신부 펑츠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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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아시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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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8월20일, 당시 30살이던 홍콩 성공회 신부 펑츠우드는 중국 베이징으로 향했다. 중국 국무원 담당자를 만난 그는 홍콩 시민들의 서명이 담긴 서류 봉투를 건넸다. 봉투 안에는 홍콩의 중화전력공사(CLP)와 중국광둥핵전집단공사(CGNPC)가 중국 광둥성 선전 지역에 짓는 다야만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104만 명의 서명이 들어 있었다.

같은 해 중국의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 소식이 알려지자, 홍콩 사회는 강력한 반대운동으로 맞섰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다야만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홍콩 역사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반대운동으로 번졌다. 학생단체들로부터 시작된 반대 움직임은 학자, 홍콩 입법회 의원, 교사 모임, 노동자 단체, 시민단체 등이 가세한 ‘다야만 핵발전소 건설보류 연석회의’ 출범으로 이어졌다. 중국 정부에 제출한 반대 서명에는 당시 홍콩 인구의 5분의 1이 참여할 정도였다.

당시 영국의 통치를 받던 홍콩이 중국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든 건, 핵발전소 건설 소식이 전해지기 넉 달 전에 발생한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때문이었다. 핵발전소의 부지 선정 작업 결과가 공개됐고, 홍콩에서 불과 50km 떨어진 선전시 해안가에 핵발전소가 들어선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게다가 반대에 나선 홍콩 시민들은 해외 기술을 통해 처음 핵발전소를 만드는 중국의 기술력을 의심하며 “전기의 일부를 얻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사회적 논란이 일자 홍콩 정부는 핵발전소의 안전성을 검증하겠다며 당시 최신형 핵발전소였던 일본 후쿠시마 1호기에 공무원 사찰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국무원 총리인 리펑은 홍콩 시민들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정부에 핵발전 기술 지원을 약속한 영국·프랑스 기업과 계약이 진행됐고, 핵발전소 공사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반발하는 홍콩 주민들을 달래기 위해 중국 정부는 가동 정보를 공개하는 ‘다야만 핵발전소 안전자문위원회’를 운영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운동에 참여했던 ‘홍콩기독학생운동’을 통해 대책위원장을 지낸 우드 목사는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당시 체르노빌 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이 정말 큰 공포를 느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람들도, 중국 관료들조차도 건설을 중단하자고 할 정도였다. 결국 건설을 막지 못했고, 우리는 실패했다. 또다시 3년 전 일본 후쿠시마에서 사고가 났지만, 홍콩 사람들은 예전만큼 놀라지 않는다. 중국이 홍콩 주변에 더 많은 핵발전소를 짓고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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