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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이타테무라 사무소(한국의 면사무소)입니다. 모두가 피난을 갔지요.”
지난 3월5일, 일본 도쿄를 출발해 4시간을 달려 도착한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 사무소는 텅 비어 있었다. 사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제염 작업을 위해 사무소 구석을 빌려 쓰는 업자 두세 명이 어색하게 일어나 일행을 맞았다. 1층 입구를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쪽부터 주민과, 세무과, 건강복지과 등의 팻말이 이어진다. 물론 모두가 피난을 떠난 탓에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제염 작업 아직 시작도 못한 곳도…이타테무라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와규(일본소)를 특산물로 만들었던 마을이다. 그러나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면서 마을 대부분은 거주제한구역으로 변했다. 그동안 주민들이 들인 노력도 물거품이 된 셈이다. 사무소 마당엔 겨울 동안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수북이 쌓여 있었고, 눈 속에 파묻힌 방사선 선량계는 2.5마이크로시버트(μSv)를 가리키고 있었다.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의 상처는 아직 그대로였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남쪽 나라하마치의 주민 마쓰모토 기이치(65) 전 정(町·한국의 면 단위)의원도 지난 사고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3년 전 ‘그날’은 그가 의원으로 재직하던 정의회의 회기 마지막 날이었다. 나라하마치엔 원자로 4기로 이뤄진 후쿠시마 제2원전이 들어서 있다. 보통 핵발전소는 13개월을 사용하면 정기 점검을 해야 하는데 이를 24개월로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정의회의 양해를 구하는 결의안이 상정돼 있었다. 그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직후였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긴 지진이 시작됐다. 이어 쓰나미 경보가 울렸다”고 말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해안가에 자리한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부팅을 기다리면서 창밖의 바다를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곧바로 집을 빠져나와 고지대로 몸을 피했다. “쓰나미(지진해일)로 집이 휩쓸려갔다. 집에 그냥 있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핵발전소는 괜찮을까.’ 쓰나미가 지나간 뒤 마쓰모토는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에 빠졌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3월13일 새벽 2시께 도쿄전력에서 정사무소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1호기에선 쓰나미가 덮친 3월11일 자정께부터 노심 용융(멜트다운)이 시작돼 이튿날인 12일 오후 3시36분 수소폭발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마쓰모토는 “바람이 부는 방향(남쪽)인 이와키시 쪽으로 전 정민을 피난시켜야 한다”고 정장에게 건의했다. 이날 오전부터 나라하마치 주민 7500여 명은 이와키시의 14개 학교 체육관에 수용됐다. 3년에 걸친 피난 생활의 시작이었다.
사고 당시 남동풍이 분 탓에 수소폭발로 흩어진 방사성물질은 핵발전소의 북서쪽인 나미에마치, 이타테무라 쪽으로 날아갔다(그래픽 참조). 그 덕에 나미에마치는 공간선량(특정 공간에서 공기에 흡수된 방사선량)이 높지 않은 지역에 속한다. 정장을 중심으로 한 마을 사람들은 올 4월께 귀환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불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쓰모토는 “공간선량이 좀 떨어졌다고 귀환하는 게 옳은지, 후쿠시마 제2원전의 폐로는 어떻게 할지 앞으로 따져물어야 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귀향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제염이다. 일본 환경성의 자료를 보면, 핵발전소 사고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주변 11개 시·정·촌(한국의 읍·면·동) 가운데 제염이 모두 끝난 곳은 다무라마치 한 곳에 불과하다. 그 뒤를 이어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자리한 오쿠마마치와 나라하마치 등의 제염이 80~90% 정도 끝난 상태고, 나미에마치 등은 아직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그래픽 참조).
후쿠시마 상황에 무심한 서일본 사람들지난 2월12일 교토에서 만난 사토 노리코(가명)도 사고 뒤 고향인 후쿠시마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비가 내리던 2011년 4월19일, 11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쪽으로 580km, 11시간을 내달려 오사카에 도착했다. 머물 집은커녕 지인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불안이 덮친 고향과 달리 오사카 시내는 평온했다. 그를 포함한 후쿠시마 주민 900여 명은 교토부에서 내준 공영주택 등에 자리잡았다. 나고 자란 곳은 후쿠시마현 현청 소재지인 후쿠시마시. 집에서 60km 떨어진 곳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핵발전소는 그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쓰나미가 동일본을 강타한 3년 전 그날, 사토의 집도 어둠에 잠겼다. 전기·가스·수도 공급이 끊긴 것이다. 사흘이 지나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TV를 켜자 제1원전의 처참한 모습이 나타났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입었던 옷은 버리거나 세탁하고, 샤워를 해야 한다.” 언론은 이렇게 당부했다. 난방용 등유를 받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부도 지자체도 알려주지 않았다. 기댈 언덕이 없었다. 사고 나흘 뒤, 후쿠시마시 방사능 수치가 24.24μSv로 치솟았다. 평소보다 600배 높은 수치였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수치를 봐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뒤졌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 초기, 집 붕괴 같은 물리적 피해가 없었던 사토는 이재민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후쿠시마와 멀리 떨어진 오사카나 교토부에선 이재민 증명이 없는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집을 지원해주었다.
정부는 사고 핵발전소 반경 20km 바깥은 안전하다고 했다. 딸아이는 낯선 곳으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친·인척과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 예민하게 군다’는 시선도 있었다. 피폭에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뿌리내리고 살아온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취업이 어려운 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토는 현재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녀만 국외로 유학 보내거나, 가장만 후쿠시마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거주지를 옮기는 세대도 있다.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자, 전자우편 답장엔 이러한 문장이 있었다. “어차피 국외로 가는 게 아니면 똑같다.” 떠난 자와 남은 자, 마음의 거리도 멀어져갔다.
서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후쿠시마의 상황에 무심하다. 동일본에 살던 사토도 1995년 서일본을 강타한 한신 대지진 뉴스를 보며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피난민이 되자 고립감이 엄습해왔다. 사고 두 달 뒤 ‘탈원전’을 외치는 시위에 나섰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왜 도쿄 밥보다 오사카 밥이 맛있는지 아십니까. 도쿄 사람들은 ‘아줌마, 여기 밥이 맛없어요’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오사카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맛있게 만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바깥으로 말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이크를 든 누군가가 말했다.
비산하는 방사성물질 뒤집어쓴 소들그날 이후 사토는 말하기 시작했다. 2012년 교토시장 선거에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나타나자, 지원 유세에 나섰다. 시민운동 현장에 나가 경험담을 나눴다. 뜻이 맞는 피난민 주부 2명과 함께 ‘피난자 지원법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지난 2월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탈원전’ 후보들은 선택받지 못했다. “이야기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사람들이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아닐까.” 사토는 잠시 말하기를 멈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피난민 가운데 탈원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는 소수다. 가까이 사는 피난민 가운데는 사토에게 “정치적 활동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에게 후쿠시마 피난민으로 인식되는 게 싫다거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조만간 말하는 일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최근 홈페이지에 올린 링크 주소 몇 개를 지웠다. 올해 말 시행을 앞둔 ‘특정비밀보호법’ 때문이다. 행정기관은 국가 안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정보를 ‘비밀’로 지정한다. 이런 ‘비밀’을 누설하거나 선동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위험한 법’이다.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정보를 비밀로 지정한다면, 이를 거론하고 비판할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쉬쉬하는 핵발전소 정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긴 더욱 어렵게 됐다.
3월6일 오전, 후쿠시마현 북동쪽에 자리한 미나미소마시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국도 6호선을 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후쿠시마 제1원전에 가닿는다. 도로 양옆으로 뒤집어진 자동차와 배 따위가 방치돼 3년 전 쓰나미의 위력을 전해주고 있었다. 핵발전소를 10여km 앞두고 취재진의 차량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다”는 안내원의 지시를 받고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이곳에는 피폭을 감수하며 고향을 떠나지 않는 주민이 있다. 나미에마치에 자리한 ‘희망의 목장 후쿠시마’를 지키고 있는 요시자와 마사미(60)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다. 소를 버리고 떠날 순 없다.” 이제 막 봄이 다가온 목장의 너른 구릉에는 조금씩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땅으로 선량계를 갖다대자 수치가 금방 6~7μSv까지 뛰어올랐다. 방사성물질이 쌓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은 땅이 된 것이다. 목장에서 핵발전소까지의 거리는 14km. 핵발전소에서 20km 안쪽 지역에 피난 지시가 내려졌으니 그는 원칙적으로 농장에서 살면 안 된다.
현재 그가 돌보고 있는 소는 350마리다. 요시자와는 “사고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소들이 불쌍해 하루 종일 울었다”고 말했다. 인간과 달리 피난을 갈 수 없었던 소들은 비산하는 방사성물질의 공격을 속수무책으로 받아야 했다. 이곳에서 보호받고 있는 소의 혈액과 근육에선 세슘이 검출된다. 100베크렐(Bq)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검출되는 고기는 유통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소들은 모두 살처분돼야 한다. 요시자와는 “정부는 방사능 소는 귀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 죽이라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소들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리겠다”고 말했다.
팔뚝엔 원인 모를 하얀 반점이최근엔 강한 방사선을 받아 유전자가 변형된 탓인지 피부에 하얀색 반점과 털이 돋아난 소가 발견되고 있다. 그것도 벌써 10여 마리나 된다. 현지 조사를 나온 일본 농수산성 관계자는 요시자와에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만 말했다. 방사선은 사람과 소를 차별하지 않는지 그의 팔에도 원인 모를 하얀 반점이 돋아 있었다. 그는 “우리 지역은 버려진 지역이고, 우리 피난민들은 ‘버림받은 주민’(棄民·기민)이다. 소들을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참상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소들의 생명력은 끈질겨 3년 사이에 200마리가 영양실조와 스트레스 등으로 죽고 200마리가 다시 태어났다. 요시자와의 설명을 듣다보니 소가 사람인지, 사람이 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떠난 나미에마치의 거리엔 정적만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에서 방치된 식당의 네온사인 간판과 신호등만이 하릴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건물의 도난을 막기 위해 순찰을 돌던 경찰이 “주민이 아니면 밖으로 나가달라”고 말했다. 후쿠시마현에서 고향을 떠나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모두 13만5546명에 이른다. 봄이 왔는데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렸다.
글 후쿠시마(일본)=길윤형 특파원 charisma@hani.co.kr교토(일본)=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사진 후쿠시마(일본)=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 참고 문헌 (전은휘·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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