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아시아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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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로 제조사 쪽은 미필적 고의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대해 면죄를 받길 원합니다. 이와 관련한 문제점은 운영자·보험회사·정부가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핵발전소 운영자는 제조사의 기술을 믿고서 원자로를 건설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조사들은 책임으로부터 면죄를 받게 되는군요.”(1959년 일본 원자력손해배상 전문가그룹 회의록 중)
설계 결함 마크-1, 전세계 32기 운행
분명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1960년대 아시아 핵발전의 선두주자였던 일본 핵발전소는 미국에서 만든 원자로로 채워졌다. 1967년 첫 가동을 시작한 후쿠시마 제1원전에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설계한 비등형 경수로 최초 모델 ‘마크(Mark)-1’형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원자로는 안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았다. 핵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던 1970년대 원자로 압력용기가 고압에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켜 방사능을 대규모로 유출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핵발전소 건설 담당자들은 GE 쪽에 설계상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도 마크-1형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1~5호기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32기가 운행되고 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버텨온 후쿠시마 제1원전은 2011년 3월11일 쓰나미를 맞았다. 우려한 대로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생기는 재앙이 벌어졌지만,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상 원자로를 설계한 GE는 사고 책임을 짓지 않았다. 그린피스 일본사무소는 지난 2월21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원자력발전 업계의 책임 회피 실태 고발’(Running from Responsibility)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제기해 얻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문서를 보면, 당시 GE 등 미국 원자로 제조사가 일본 정부의 원자력배상 관련법 초안 작성에 참여해 제조사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로비했다”고 주장했다. 1959년 12월12일 작성된 일본 원자력손해배상 전문가그룹 보고서에는 “핵발전소 제조사에 대한 배상상환권과 관련해서 해당 업체는 미필적 고의와 중과실의 경우 상환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핵발전소 제조사들의 우려를 막기 위해 ‘중과실’이란 표현은 삭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GE의 ‘면책특권’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핵발전소 제조사의 ‘면책특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 1400여 명은 원자로 제조사인 GE 등을 상대로 원자로 노심 용융(멜트다운)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냈기 때문이다. 원자로 제조사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의 합헌 여부에 대해 판결을 받아 오래전 잘못 끼워둔 단추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핵발전소 건설업체 사고 책임 더는 CSC
핵발전소 사고로 벌어지는 배상 문제는 국내법 안에서만 그치는 건 아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적인 배상 조약도 문제다. 핵연료 관련 사고에 대비한 국제적 조약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1960년대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신)의 후원으로 서유럽 회원국은 ‘파리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비서구 회원국이 중심이 된 ‘빈협약’이 대표적이다. 이들 협약의 뼈대는 해당 국가의 핵시설에서 사고가 나면 해당 국가가 각종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6년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고 주변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구체적인 배상 절차 등을 정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997년 빈협정을 확대해 만든 ‘원자력 손해배상조약’(CSC)이 바로 그것이다.
CSC는 핵발전 가동 규모에 따라 회원국들이 공동기금을 운영하고, 사고 발생국에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다. 현재 미국·루마니아·모로코·아르헨티나가 비준을 완료한 상태다. 보고서는 “CSC는 책임 배상액의 상한선을 정하고 책임 당사자 및 국가의 부담 비용을 최소화하려 한다. 또 거의 모든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핵발전소 제조사의 책임 의무를 면제해주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경우, CSC 기금을 받기 위해 정부나 피해자가 제기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피해 보상 절차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CSC의 확대는 핵발전 선진국들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과거 미국이 일본 등에 핵발전을 수출하면서 종용했던 ‘면책특권’을 다른 나라가 같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핵발전 재가동을 선언한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은 2012년 CSC 가입 의사를 밝혔다. 이는 히타치·도시바 등 핵발전 수출업체를 가진 일본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핵발전소 수출을 진행하면서 사고에 대한 책임을 덜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본의 가입을 계기로 핵발전 수출에 적극적인 우리 정부도 CSC 참여 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발전 제조사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원자력손해배상법에서는 핵발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극히 일부분만 사고 책임을 지고, 설계를 담당한 한국전력기술과 핵발전소에 주요 설비를 공급하는 두산중공업 등 관련 업체와 주요 건설사는 사고 책임과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핵발전소 사고 배상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최근 한수원이 지난해 이어진 원전 비리 사건과 관련해 가짜 케이블을 납품한 LS그룹 쪽을 상대로 1300억원을 물어내라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바 있지만, 대규모 핵발전소 사고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도쿄전력 사고 부담금 약 60조원
현재 도쿄전력이 부담하게 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부담금은 약 60조원 규모로 짐작되고 있다. 그동안 방사능 방재 등에 쓰인 25조원 등도 도쿄전력의 주식을 팔아 충당하기로 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벌어지고 있는 배상 논란은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얼마나 큰 피해가 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더욱 비싼 자동차보험을 찾는 모습을 닮았다.
글 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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