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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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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낮은 산티아고의 밤보다 어둡다

등록 2010-10-22 15:06 수정 2020-05-03 04:26
1.

밤늦게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가 TV를 켠다. 생중계가 진행 중이다. 몇 번째 광부가 구출되고 가족이 환호하고 대통령이 자축 연설을 한다. 흥분한 스페인어로 흘러나오는 말이 그보다 약간 차분한 영어로 동시통역된다. 두 언어 사용권을 합치면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 감동의 순간을 실시간으로 듣고 보고 있다. 나처럼 불완전한 해독력의 시청자까지 합치면 가히 전세계가 그 순간에 지상의 한 지점을 관찰하고 있을 테다. 생사의 갈림길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30분 뒤가 될지, 닷새 뒤가 될지, 그런 갈림길이 과연 있기나 한 건지 알지 못한 채, 무더운 어둠 속에서 32명의 동료들과 어제에 대해 그리고 내일에 대해 이야기하며, 숨 쉬는 순간순간 문득문득 찾아오는 공포를 견뎌야 했던 그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해방되는 장면을 칠레와 낮밤이 반대인 서울의 한 아파트 1203호에서도 불 밝힌 채 보고 있다. 그건 같은 ‘사람’으로서 유전자가 지시하는 무엇, 아니면 지금 인류가 새로이 유전자에 새겨넣고 있는 무엇과 관련이 있는 듯싶다.

2.

칠레 산호세 광산에서 마리오와 루이스와 플로렌시오가 수백m 갱도를 타고 막장으로 내려갈 때 이 땅에서는 순철과 영호와 상훈이 좁고 긴 사다리를 올랐다. 좁고 어두운 갱도만큼이나 좁고 두려운 허공의 길을 맨발과 맨손으로 딛고 70m 타워크레인에 올랐다. 그리고 광부들이 먼지 가득한 막장에서 몸을 상해가며 일할 때 몸 하나 겨우 건사할 크레인 조종실에선 추락의 불안감과 싸우며 일했다. 어차피 지상의 세계와는 단절된 곳이다. 무섭고 외로운 곳이다. 언젠가 재앙이 찾아올 곳이다. 칠레의 지하 막장이 무너졌을 때 이 땅의 타워크레인 하나도 무너졌다. 광부들이 생명의 희망을 놓지 않을 때 크레인 기사도 허공에 매달려 마지막 붙들 곳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대개의 매몰사고와 달리 칠레 광부들은 운이 좋았다. 대피할 공간이 있었고 얼마간의 식량도 있었다. 그때 허공에 매달린 서울의 타워크레인 기사는 더 이상 기댈 공간이 없었다. 매몰된 광부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삶의 의지를 다질 때 그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시간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도움을 기다릴 만큼 길지 않았다. 타워크레인은 무너지는 것도 순간이요, 생명의 흩어짐도 지하보다 빠른 탓이다. 그는 추락사했다.

3.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였던가. 칠레 광부들은 69일을 버티며 전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긴 기다림의 시간을 마무리한 구조 작전은 극적이었다. 반면 타워크레인 사고를 당한 기사는 세상의 주목을 받기도 전에, 아니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받기도 전에 숨이 끊겼다. 어릴 적 공상과학소설에서 본 시간조절 장치가 있어 시간의 흐름을 늦출 수 있었다면, 그가 처한 생사의 갈림길을 9시 뉴스에서도 보도하고 인터넷도 들끓고 미 항공우주국은 아니어도 119구조대의 손길이나마 불러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칠레의 광부나 서울 마포구의 타워크레인 기사나 똑같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유일한 자산인 몸을 지상이 아닌 곳에 부려놓은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매몰된 광부들을 무사히 지상으로 이끈 우르수아 작업반장의 위대한 지도력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한편, 이름 없이 스러진 저 크레인 기사에게는 왜 물거품만큼의 연민도 바쳐지지 않는지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져간 ‘하늘의 광부’가 최근 3년간 35명이다.

한겨레21 편집장 박용현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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