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장에 처음 간 것은 10살 때였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어린이치고는 조금 늦은 나이다. 퇴근길 작업복을 입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간 구덕야구장엔 담배 연기가 물안개처럼 희뿌옇게 내려앉아 있었다. 포화 같은 담배 연기를 뚫고 최동원이 직구를 뿌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저게 남자다”라고 알려주셨다. 관중석은 ‘난닝구’를 입고 바지를 접어올린 아재들로 가득했고 가뭄에 콩 나듯 지나가는 여자 관중은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요즘에야 어이없이 역전패를 당해도 “128게임 중 1게임일 뿐”이라는 감독의 의연한 멘트가 따르지만, 그때는 야구장 밖에서의 청문회를 통과해야 귀가가 가능했다. 야구장 버스는 가끔 화염에 휩싸였고 보험회사는 이 아수라장에서 부상당한 피해자에 대해 ‘전쟁, 폭동, 소요에 의한 손해’를 보상하지 않는 약관상 면책 사유를 내세워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대법원은 야구장 밖에서의 팬 난동이 “전쟁, 폭동, 소요에 이를 사유는 아니다”라고 판결했다). 내게 야구장은 비릿한 짠내와 욕설이 오가는 수산시장이거나, 치외법권 지대인 방과 후 옥상 같은 곳이었다.
여성 야구팬이 늘고 있다는 점이 화두가 된 것도 이젠 옛일이다. 이미 여성팬은 프로야구 마케팅의 핵심 공략 포인트가 되었다. 그들은 응원팀의 유니폼을 사고, 액세서리를 사고, 야구장에 감성을 불어넣었다. 오래전에 야구를 너무 좋아한다는 이유로 여자친구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 나로서는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32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 프로야구팬 중에는 그 역사를 동시대 그대로 따라온 남성팬이 많다. 역사의 산증인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자부심이다. 더불어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때론 이별의 이유가 되기도 하던 취미에 이젠 수많은 여성팬이 합류했다는 것은, 오래된 야구팬에게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이 인정받기 시작했다는 묘한 성취감마저 맛보게 한다. 그 성취감이 과해 꼰대가 돼버린 남성팬도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프로야구 원년팬으로서 나 또한 이제 막 야구를 좋아하기 시작했다는 여인들을 다소 무시했다. 30여 년에 걸친 프로야구의 부침을 따라왔고 ‘레전드 영상’으로 소개되는 최동원의 투구를 ‘직관’했던 사람으로서, 그녀들의 취미를 한순간의 유행쯤으로 생각했다. 그녀들 앞에서 나는 예전의 불타는 구단 버스에 대한 무용담을 늘어놓았고, 인필드 플라이의 의미에 대해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것이 여자에게 하는 군대 얘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다소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공히 SK 와이번스 박진만의 팬인 남녀가 있다. 남자는 박진만의 느려진 배트 스피드와 좁아진 수비 범위에 마음이 아프다. 여자는 하이틴 스타같이 뽀얀 박진만의 얼굴에 새겨진 아저씨티에 마음이 아프다. 남성팬들이 여전히 선수를 실적의 대상으로 보고 있을 때, 여성팬들은 한 남자의 인생을 본다. 그녀들은 야구를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남성팬들이 야구선수를 야구기계로 바라볼 때, 그녀들은 선수의 표정과 스타일과 인간적인 매력을 포착했다. 그녀들은 성적과 무관하게 왠지 눈에 밟히는 선수를 발견해내기 시작했다. 야구와 무관하게 선수 얼굴만 좇는다며 ‘얼빠’라 조롱받기도 했지만, 그녀들은 남성팬이 발견해내지 못한 야구장의 사각지대를 포착해내며 야구장의 외연을 확장했다.
여성팬들은 선수에 대한 나의 미적 기준까지 바꿔놓았다. 류현진이 연일 삼진쇼를 펼치며 훌륭한 데뷔 시즌을 이어가고 있다고는 해도, 올해의 추신수는 괴물이 돼 있다. 그럼에도 여자팬들은 류현진에게 더욱 열광한다. 국내 리그 출신이라 친근한 이유도 있겠지만, 류현진의 그 둥글둥글한 외모에 대한 칭송은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의 미적 기준에서 보면 추신수는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보스 스타일이며, 류현진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 청년이다. 그러나 류현진에 대한 여성팬들의 열광을 매일 듣고 있으니 류현진이 정말로 잘생겨 보인다. 멋있다.
여성팬과 함께 진화 중인 프로야구트위터에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풍경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사회적 사안에 탁월한 식견을 뿜어내던 여인들이 야구경기 시간이면 비이성적인 절규와 탄식과 과잉된 눈물을 난사하는 장면이다. 즉, 야구는 더 이상 마초들의 여가생활이 아니다. 야구가 군부독재의 ‘3S(Sex·Sports·Screen) 정책’ 중 하나라고 비판하던 게으른 사회평론의 시대는 지나간 것이다. 프로야구는 여성팬의 합류와 함께 그 고유의 역사를 진화시키는 중이다.
한화 이글스가 개막 뒤 13연패의 치욕을 끊던 날, TV 화면은 열광하는 아저씨 야구팬의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쏟고 있던 한화의 여자팬을 클로즈업해주었다. 지금 한국 프로야구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은 뒤에서 저 여성팬들이 흘리는 눈물이다. 그러니 한국의 오래된 남성 야구팬들이여, 당신들의 추억을 존중하지만 이제는 저 여자팬이 흘리는 눈물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야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제 추억을 자랑하지 말자. 과장을 즐기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 일인가. 기형도의 말이다.
김준 칼럼니스트·사직아재*‘S라인’ 필자로 활약해온 김동훈·최민규 기자가 필진에서 빠지고, 남지은 스포츠부 기자와 칼럼니스트 김준씨가 새로 합류했습니다. 그동안 수고해준 두 기자에게 감사드립니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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