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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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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은 알리의 일이다

등록 2013-02-19 22:21 수정 2020-05-03 04:27

1996년 7월19일, 애틀랜타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센테니얼 주경기장에 성화 최종 주자가 나타났다. 거대한 몸집과 멍한 시선, 눈에 띄게 한쪽 팔을 떠는 흑인, 바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였다.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인 알리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성화에 불을 붙였다. 8만5천 석의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은 가슴으로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법정 싸움으로 보낸 전성기
알리는 두 주먹으로 자신의 거친 운명에 맞서 싸운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복서다. 그는 1942년 1월17일, 미국에서도 가장 인종차별이 심하다는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러스 클레이 주니어. 클레이는 어릴 적부터 백인들에게 차별 대우를 받고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맞으며 자랐다. 어느 날 자전거를 잃어버린 그가 경찰에게 “도둑이 잡히면 한 방 먹이겠다”고 떠벌렸고, 이 말을 들은 경찰이 “한 방 먹이려면 복싱을 배우라”고 했다. 클레이의 심장이 강하게 요동쳤다. 훗날 그는 “평생 그 말처럼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말은 없었다”고 했다. 클레이는 몸집이 컸지만 재빨랐다. 버스비가 없어 남동생과 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는 내기를 했는데, 그것이 그에게 날렵한 몸놀림과 발놀림을 선사했다.
1960년 9월, 로마올림픽은 그에게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줬다. 18살 어린 나이에 미국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해 라이트헤비급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클레이는 귀국길에 ‘이제 나에 대한 차별과 멸시는 없어지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클레이가 금의환향하자 그의 집은 성조기로 뒤덮였다. 페인트공이던 아버지는 현관 계단을 하얀색과 빨간색, 파란색으로 칠해 축제 분위기를 연출했다.
클레이는 한동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잠시 햄버거를 먹으려고 백인들이 주로 다니는 음식점에 들어갔다.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싸늘한 눈초리를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식당 주인이 “깜둥이한테는 음식 안 팔아! 나가!”라고 소리쳤다. 백인 불량배들에게 금메달을 빼앗길 뻔한 일도 있었다. 자신의 조국 미국에 대해 환멸이 느껴졌다. 그는 미련 없이 금메달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아닌, 내가 원하는 챔피언이 될 것이다.’
아마추어 복서로 180승을 거둔 그는 프로로 전향했다. 1964년 2월25일,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홀. 클레이는 무시무시한 주먹을 가진 소니 리스턴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리스턴은 당시 세계프로복싱 양대 기구(세계권투협회(WBA)·세계권투평의회(WBC)) 헤비급 통합챔피언이었다. 클레이는 경기 전 인터뷰에서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그리고 7회 TKO승으로 챔피언에 오른 뒤 “나는 왕”이라고 소리쳤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올림픽 정상에 오른 뒤 강물에 금메달을 던졌던 그는 프로복싱 정상에 오른 뒤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을 내던졌다. 과거 백인들이 흑인 노예에게 부여했던 성을 거부하고, ‘정신적 지주’ 맬컴 엑스처럼 자신의 이름을 ‘캐시어스 엑스(X)’라 부르기로 했다. 이어 이슬람교 지도자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름을 따 ‘무하마드 알리’로 바꿨다. 알리는 이름을 바꾼 뒤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는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알리는 1967년까지 9차 방어에 성공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이슬람교 개종과 흑인운동을 탐탁지 않게 여긴 미국 정부는 그를 괴롭혔다. 1967년 베트남전 참전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평화주의자인 알리는 징집을 거부했다. “베트콩은 나를 깜둥이라고 놀리지 않는다. 내가 왜 베트콩 사람들을 죽여야 하느냐”고 항변했다. 그는 선수 자격이 박탈됐다. 법정에서 실형 5년이 선고됐다. 그러나 알리는 다시 한번 ‘불의’와 맞섰고, 3년6개월의 법정 투쟁 끝에 마침내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4년 만에 링에 복귀했지만 그의 나이는 당시로선 전성기가 지난 29살이었다. 1971년 조 프레이저와 숨 막히는 명승부를 벌였지만 15회 판정으로 졌다. 모두들 알리는 끝났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기적을 만들었다. 1974년 10월30일, 자이르공화국(현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 복싱선수로선 환갑이나 다름없는 32살에 24살의 조지 포먼과 맞섰다. 포먼은 40승무패의 가공할 위력을 가진 세계 헤비급 통합챔피언이었다. 알리는 다시 한번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겠다”고 호언장담한 뒤 포먼을 8회 KO로 눕혔다. 그것은 ‘킨샤사의 기적’이었다.
복싱보다 위대한 알리의 최후 결투
알리는 걸쭉한 입담으로 ‘떠벌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열띤 경기를 벌이다가도 휴식 시간에 라운드걸에게 윙크를 보내는 ‘괴짜’였다. 39살인 1981년, 논타이틀 경기에서 판정패한 것을 마지막으로 61전56승5패37KO승의 전적을 남기고 21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고 했다.
알리는 은퇴 뒤 대학과 뜻있는 단체를 후원하고 아프리카의 빈국을 돕는 데 앞장섰다. 얼마 전 71번째 생일을 보낸 그는 최근 위독설에 휩싸이며 전세계 팬들을 놀라게 했다. 평생 거친 운명과 맞선 그가 삶의 막바지에 병마와 어쩌면 복싱보다 더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질지언정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복싱보다 더 위대하다”는 그의 말처럼.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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