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마음이 급했다. 경기도 용인실내체육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화 에 출연한 그는 영화 홍보 때문에 동분서주하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같은 시각 아내는 코트에서 경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전반에는 3점슛을 3개나 터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의 마음은 더 바빠졌다. 아내의 활약은 후반에도 변함이 없었다. 전반과 똑같이 3점슛 3개를 보탰다. 3점슛 6개로 18득점. 양팀 선수 중 최다 득점이었다.
11월9일 용인실내체육관에서 열린 2012~2013 여자프로농구 경기. 용인 삼성생명의 베테랑 박정은(35) 선수는 4연패에 빠진 팀에 귀중한 승리를 안겼다. 그의 남편은 영화배우 겸 탤런트 한상진(35)씨. 한씨는 경기가 끝날 무렵 기자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아내가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인터뷰 때 위로 좀 많이 해달라”는 당부였다.
박 선수는 수훈 선수 인터뷰 때 “그동안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항상 웃는 얼굴인 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당시 삼성생명은 6개 팀 중 5~6위를 전전했다. 팀의 간판 선수인 이미선(33)·김계령(33)·김한별(26)이 줄줄이 부상으로 코트에 나서지 못한 탓이다. 팀의 최고참인 박 선수만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는 “17년 프로 생활 중 꼴찌는 처음이었다. 체육관 가기가 싫을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이런 아내를 옆에서 지켜보며 눈치만 살폈다. 그는 “아내는 식사도 제대로 못했다. 어떻게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노심초사했다”고 털어놓았다.
둘은 농구선수와 팬으로 만났다. 박 선수에게 ‘꽂힌’ 한씨가 적극적으로 매달렸고, 2002년 12월 드디어 첫 데이트를 했다. 결혼 두 달을 앞둔 2004년 3월5일 열린 올스타전 때는 박 선수가 최우수선수(MVP)에 뽑힌 답례로 한씨가 한국여자농구연맹(WKBL)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떡을 돌려 화제가 됐다. 둘은 2004년 5월2일 마침내 웨딩마치를 울렸다. 공교롭게도 신랑 한씨는 원로 가수 현미씨가 이모(어머니의 언니)이고, 신부 박 선수는 원로 농구인 박신자씨가 친고모(아버지의 누나)다.
결혼 직후 2004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는 부부가 MBC TV의 올림픽 중계방송 광고도 찍었다. 달콤한 신혼 기간에 떨어져 있어야 하는 안타까움을 전하며 “그래도 방송 중계가 있어 위안이 된다”고 말하는 내용이었다. 남편은 아무리 바빠도 아내의 경기를 빼놓지 않고 보러 간다. 촬영 일정이 겹쳐 도저히 갈 수 없을 때는 중계방송을 녹화해뒀다가 보고 또 본다. 연애 시절을 포함해 지난 10여 년 동안 아내가 뛴 경기만 족히 400~500경기는 봤다. 여자프로농구 경기를 많이 보다 보니 여자농구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 뺨칠 정도다. 주변에선 여자프로농구 중계 때 “객원 해설위원을 해도 되겠다”고 말할 정도다.
부부가 기억하는 가장 짜릿한 경기는 2010년 3월22일 충남 천안에서 열린 천안 국민은행과의 4강 플레이오프 2차전이었다. 그날 드라마의 주인공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다. 삼성생명은 1차전에서 먼저 승리를 따냈지만 2차전은 고전하고 있었다. 박 선수의 삼성생명은 종료 2.8초를 남기고 72-75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선택은 동점을 노리는 3점슛 한 방뿐이었다. 박 선수는 왼쪽 사이드라인에서 이미선 선수의 패스를 받았다. 3점슛을 쏘려고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드리블을 한 뒤 림을 향해 그대로 팔을 뻗었다. 공이 길게 포물선을 그리는 동안 버저가 울렸고, 공은 백보드에 맞은 뒤 거짓말처럼 림 속으로 쏙 빨려들어갔다. 75-75. 기적 같은 버저비터 동점 3점슛이었다. 기세가 오른 삼성생명은 연장 끝에 85-82로 승리했다. 삼성생명은 3차전마저 이기고 5년 연속 챔피언전 진출에 성공했다.
남편의 스타일을 가장 잘 아는 아내그 시각 한씨는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다. 아내에게서 기다리던 문자가 왔다. 버저비터 동점 3점슛을 넣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새벽까지 이어진 촬영을 마치고 녹초가 돼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냥 잘 수 없었다. 미리 녹화해둔 경기를 보고 또 봤다. 그것도 모자라 WKBL 인터넷 중계까지 돌려봤다. 한씨는 “결과를 이미 알고 보는데도 짜릿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시즌 때는 남편이 아내의 외조를 맡지만, 비시즌 때는 아내가 남편의 내조자가 된다. 남편은 오랜 무명 시절을 거쳤다. 마침내 2007년 초 드라마 으로 기회를 잡았다. 그때 남편은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평을 들었다. 아내는 “머리를 짧게 자르라고 한 것은 내 아이디어였다”고 했다. 남편은 의 박건하 역에 이어 의 홍국영 역, 의 송선풍 역으로 잇따라 대박을 터뜨렸다. 그리고 의 ‘뜨거운 형제들’로 ‘예능’에서까지 재능을 보였다. 한씨는 “모든 게 아내 덕분”이라고 했다. 탤런트의 아내, 운동선수의 남편으로 산다는 것. 이 부부의 특별한, 그리고 감동적인 삶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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