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다. 현묘한 몸놀림이다. 그런데 그것이 100m를 11초 안에 끊는 그런 단순한 직진의 속도가 아니다. 공을 몸에 붙이고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급격한 회전에도 능하고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거는가 하면 ‘숨어 있는 1인치’를 파고드는 화학적인 속도가 매우 빠르다.
하나도 동일하지 않은 골들
담대하다.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인다는 뜻이 아니다. 피지컬 수치는 170cm에 63kg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지금 막 PC방에서 밤을 새우고 나오는 평범한 청소년들 신체에 가깝다. 격렬한 몸싸움이 수반되는 축구에서 63kg이라면 결코 넉넉한 수치가 아니다. 그러나 담대하기 때문에 해결한다.
문창진.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그의 현묘한 몸놀림과 침착한 플레이에 의해 19살 이하 축구대표팀이 아시아축구연맹(AFC) U19 챔피언십 우승을 일궈냈다. 2004년 말레이시아 대회 이후 8년 만이다. 그때 누가 있었는가. 6골을 터트린 박주영이 있었다. 그는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기관을 이용해 한국 축구의 진부한 담론을 뒤흔들었다.
바로 그 자리를 문창진이 잇고 있다. 만약 이것이 경마라면, 지금 마권을 손에 쥔 꾼들이라면 판세를 정확하게 읽고 유연하게 곡선을 그리며 코너를 돈 뒤 막판 스퍼트에서 모든 경쟁마를 제치고 있는 추입마를 눈여겨봐야 한다. 그 말의 이름이 바로 문창진이다. 이번 대회에서 그가 성공시킨 골들은 하나도 동일하지 않다. 난적 이란과의 8강전에서는 경기를 시작하자마자 상대 문전에서 이란 수비수 2명을 뒤흔들며 대각선으로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급회전해 유연한 터닝슛을 날렸다. 우즈베키스탄과의 4강전에서는 프랑스의 지단, 스페인의 멘디에타, 이탈리아의 피를로 같은 천하의 ‘강심장’들만이 성공시킨다는 ‘파넨카킥’을 찼다.
그리고 이라크와의 마지막 결승전. 0 대 1로 패색이 짙은, 심판이 휘슬을 입에 물기 직전, 최후의 순간, 경기 시작 92분께에 얻은 마지막 기회, 감독은 골키퍼를 제외한 전원이 이라크 문전으로 올라가도록 주문했고 마침 그 자리로 공이 떠올랐다. 상대 수비수가 걷어낸 공이 혼전 중에 문창진 앞으로 떨어졌고 이 순간 문창진은 정확히 세 번 공을 터치했다.
첫 번째 터치는 방향을 잃은 공을 발 앞에 정확히 떨어뜨리는 것, 두 번째 터치는 이라크 선수들로부터 공을 떼놓으려고 슬며시 뒤로 당긴 것, 그리고 마지막은 목적지를 잃고 방황하는 공이 가야 할 마지막 장소를 일깨워주는 것, 곧 통렬한 터닝슛. 이로써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승부차기 끝에 19살 이하 청소년 대표팀이 아시아 최정상에 올라섰다. 혼전 순간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담대한 플레이를 펼친 문창진, 기억할 만한 이름이다.
문창진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면, 더불어 우리는 이광종 감독과 포항 스틸러스도 기억해야 한다. 이광종, 12년 동안이나 유소년, 그 낮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중앙대를 졸업하고 1988년 유공에 입단해 프로 생활을 했으며, 수원 창단 선수로 2년을 뛴 뒤 1998년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2000년 대한축구협회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유소년 전담 지도자 양성, 그 1기 출신이다. 12~15살의 어린 선수들 중에서 재목을 발견하고 성장시키는 역할이었고 그는 유소년 전임 지도자 14명을 이끄는 팀장으로 꾸준히 활동했다. 영국·독일·스페인을 방문해서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연구해 로드맵을 만들기도 했다. U15 감독, U20 수석코치, AFC U16 선수권대회 감독, 국제축구연맹(FIFA) U17 월드컵 감독 등을 거쳐 이번 AFC U19 챔피언십 감독을 맡았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지동원·손흥민·백성동 등이 활갯짓을 배워 창공으로 훨훨 날아갔고, 이제 그 뒤를 문창진이나 이광훈 같은 유망주가 잇고 있다.
한국의 맨체스터·바르셀로나, 포항
포항 스틸러스의 유스팀 시스템도 기억해야 한다. 문창진은 광양제철남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독일로 유학을 가서 브레멘과 도르트문트에서 축구를 배운 뒤 다시 포철중과 포철공고를 거쳐 현재 포항 스틸러스의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고 있다. 이번 대회에서 함께 활약한 이광훈도 이 치밀한 시스템에서 성장한 선수다. 포철 유스 시스템이 낳은 유망주 문창진과 이광훈은 지난해 고교클럽 챌린지리그 우승을 이룩했고, 그 대회에서 문창진은 최우수선수상을 받았고 이광훈은 득점왕에 올랐다.
반세기의 역사 속에서 베컴·긱스·스콜스 등을 배출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스 시스템이나 푸욜·사비·메시 등을 키운 바르셀로나 유스 시스템에 버금갈 만한 포항의 시스템이 있다. U18팀 포철공고는 고교클럽 챌린지리그를 2연패했고, U12팀 포철동초는 일본 다논네이션스 대회를 우승했고, U15팀 포철중은 전국소년체전에서 우승했다. 그 맨 위에 올해 FA컵 우승을 차지한 전통의 포항스 틸러스가 있다. 여러모로 기형적이고 폐쇄적이어서 불합리한 구석이 많은 한국 축구이지만 적어도 이런 시스템이 어딘가에 있고, 묵묵히 10년 넘게 미래의 씨앗을 뿌리는 감독이 있으며, 그런 바탕 위에서 문창진 같은 선수가 계속 나온다는 점, 이는 아름답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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