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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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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의 아들, 문경자의 딸

허재 감독의 아들 웅과 훈, 전 국가대표 문경자씨의 딸 지영과 인영
청소년 대표 등 활약하는 2세 선수들의 숨길 수 없는 농구 DNA
등록 2012-10-27 14:22 수정 2020-05-03 04:27

지난 9월18일 서울 신촌 연세대 체육관이 들썩였다. 연세대와 동국대의 2012 KB국민은행 대학농구 6강 플레이오프(3전2선승제) 1차전이 뜨거운 접전을 거듭하자 장내가 후끈 달아올랐다. 이날 경기의 ‘종결자’는 프로농구 전주 KCC 허재(47) 감독의 큰아들 허웅(19)이었다. 연세대는 허웅이 승부처인 4쿼터에만 12점을 몰아넣은 데 힘입어 동국대를 76-71로 물리쳤다. 허웅은 올해 막 입학한 새내기인데도 막판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 주변에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감탄사가 쏟아졌다. 허웅은 경기 뒤 인터뷰도 잘했다. “사흘 전 연고전에서 져 팀 분위기가 좋지 않았는데 졸업을 앞둔 4학년 형들에게 승리를 안기고 싶었다”고 했다. 이를 지켜보는 연세대 정재근 감독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중학생 청소년 대표 박지수의 부모는?

아버지를 쏙 빼닮은 허 감독의 작은아들 허훈(17)도 아버지의 모교인 용산고에서 농구를 하고 있다. 농구인들은 “웅이보다 훈이가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촉망받는 기대주다. 허훈은 지난 7월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17살 이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맹활약했다. 허 감독의 친구인 여자프로농구 용인 삼성생명 이호근(47) 감독은 두 자녀가 모두 농구 유망주다. 아들 이동엽(18)은 고교(광신정산고) 시절 랭킹 1위로 대학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된 끝에 고려대 유니폼을 입었다. 이동엽은 센터 출신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키 192cm의 장신인데도 시야가 넓고 패스워크가 뛰어나 포인트가드를 맡고 있다. 올해 초 미국프로농구(NBA)에서 선풍적 인기를 끈 대만 출신의 제러미 린(24·뉴욕 닉스·191cm)처럼 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 감독의 딸 이민지(17·숙명여고)도 선일여중 시절 여중 랭킹 1·2위를 다툰 유망주다.

요즘 ‘왕년의 농구 스타’ 2세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중·고교 농구대회에 가면 농구인 2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만 많은 게 아니라 활약도 눈부시다. 지난 8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17살 이하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국제 무대에 처음 출전한 중학생 선수가 화제가 됐다. 주인공은 경기도 성남시 분당 청솔중학교 2학년 박지수(14). 그는 일곱 경기에서 평균 9득점, 8.1리바운드로 매 경기 더블더블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다. 게다가 웬만한 선수는 한 경기에서 하나도 해내기 힘든 블록슛을 경기당 3.9개나 해냈다. 평균 출전 시간이 24분에 불과한데다 한창 크는 나이에 3살이나 많은 세계적 수준의 언니들과 겨뤄 일궈낸 성적이다. 블록슛은 모두 27개로 1위를 차지했는데, 공동 2위 선수들의 14개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을 정도로 가공할 위력을 뽐냈다. 박지수의 존재가 알려지기 전에 농구계에선 “어떤 중학생이 공을 잡으면 상대 수비수 3명이 달려들어도 소용없다더라” “고등학교 팀과 연습경기를 해도 그 중학생 덕에 중학교 팀이 이긴다더라”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박지수의 아빠는 현역 시절 실업 삼성전자에서 명센터로 이름을 날렸던 명지대 박상관(43·200cm) 감독이고, 엄마는 실업배구 현대에서 뛰며 청소년 국가대표까지 지낸 이수경(44·180cm)씨다. 박지수의 키는 현재 188cm로 엄마 키를 이미 훌쩍 넘어섰고, 아빠 키를 넘어 아시아 최장신 하은주(202cm)보다 더 성장할지 주목된다. 박지수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나가 금메달을 따고 싶다”며 수줍게 웃었다.

걸출한 센터 2세는 남자농구에도 있다. 키 206cm인 경복고 3학년 이종현(18)은 고교생임에도 올해 국가대표에 발탁돼 눈길을 끌었다. 서장훈의 공격력과 김주성의 수비력을 합쳐놓은 듯한 그는 지난 7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런던올림픽 최종예선에 출전해 쟁쟁한 ‘형님’들 틈바구니에서 맘껏 기량을 뽐냈다. 그의 아버지는 과거 중앙대와 기아자동차에서 센터로 활약했던 이준호(46)씨다. 이종현은 키도 크지만 팔이 유난히 길어 리바운드 능력이 뛰어나다. 또 큰 키에도 기동력이 좋고 외곽슛까지 장착해 한국 농구의 미래를 짊어질 재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학들의 엄청난 스카우트 경쟁 속에 고려대 진학이 확정된 그는 “한국 농구 센터의 계보를 잇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엄마같이 국가대표 유니폼도 입고 싶어

어머니와 딸이 30년의 세월을 넘어 같은 팀 유니폼을 입은 경우도 있다. 1983년부터 삼성생명의 전신 동방생명에서 선수 생활을 했던 여자농구 전 국가대표 문경자(48)씨의 큰딸 양지영(19)이 삼성생명에서 뛰고 있다. 문씨는 “큰딸이 삼성생명에 입단하는 순간 인연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며 웃었다. 문씨는 키 180cm의 센터 출신으로, 1984년 LA올림픽과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 참가해 은메달을 땄다. 딸 양지영은 키 181cm로 엄마와 비슷하지만 3점슛이 정확한 포워드를 맡고 있다. 그는 “엄마의 선수 시절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나도 꼭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고 했다. 문씨의 둘째딸 양인영(17·180cm)도 숙명여고에서 센터로 활약하고 있어 세 모녀가 삼성생명과 인연을 맺을 가능성도 있다.

아들 하승진(27·전주 KCC)과 딸 하은주(29·안산 신한은행)를 국내 최고 센터로 키운 농구인 하동기(54)씨는 농구인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존재다.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농구인 2세 중에 과연 어떤 선수가 부모의 농구 DNA를 뛰어넘을지 궁금하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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