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여주겠다는 듯이, 다큐 필름은 주홍빛 장막이 서서히 열리며 시작된다. 시가 흐르고 흑백의 화면들이 흐르고 다시 시가 흐르면, 다큐 필름은 끝이 난다. 이 필름을 다 보고 나면 누구라도 불현듯 여행 가방을 챙기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의 마음은 벌써 저 잉글랜드의 항구도시 리버풀로 떠나는 중이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2008년 다큐멘터리 (Of Time and the City) 이야기다.
힐즈버러 참사, 41명 목숨 구할 수도
흑백의 화면들은 이 도시가 갑작스런 춘풍에 휩싸여 번창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흡사 바싹 마른 잡목들만이 서 있는 황량한 들판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테렌스 감독의 낮은 바리톤 목소리는 이 도시가 우연한 기회로 항구라든가, 축구라든가 혹은 비틀스라든가 하는 문화적 아이템을 획득해 갑작스런 황홀경의 도시가 된 곳이 결코 아님을 웅변한다. 2차 세계대전의 황폐함 이후에 성장한 노동자계급 출신의 비감 어린 시선으로,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은 리버풀을 처연하게 바라본다. 낡은 자료 화면들은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제임스 조이스와 셸리 같은 문사들의 절박한 언어에 휩싸인다. 한 세기를 버텨온 이 항구도시의 랜드마크들은 말러 교향곡 2번 5악장의 위로를 받는다.
만약 당신이 진정한 축구팬이라면, 그것도 무슨 까닭인지 몰라도 어찌하다 보니 저 잉글랜드 서북부 지역의 항구도시를 연고로 하는 ‘리버풀FC’의 팬을 자처한다면, 꼭 한 번은 봐야 할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더불어 사회파 감독 켄 로치의 1997년작 다큐멘터리 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켄 로치 감독은 1995년 리버풀에서 시작한, 3년여에 걸쳐 부당해고에 맞서는 항만 노동자들의 투쟁을 그렸다.
이런 작품들에 의해, 우리는 이를테면 1989년 4월15일, 잉글랜드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 힐즈버러에서 발생한 사태, 무려 96명이 사망한 ‘힐즈버러 대참사’ 같은 축구장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이날,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 간의 축구협회(FA)컵 준결승전이 벌어졌는데, 레핑스 레인 테라스(입석 형태의 관중석)가 무너져 끔찍한 참사가 발생했다. 최근 밝혀진 충격적인 기록에 따르면, 당시 경찰과 정부는 경기장의 안전에 소홀했으며 한순간에 너무 많은 관중을 한정된 입구로 입장시키는 잘못을 범했고, 더욱이 참사 이후 이 비극을 축소하거나 은폐하는 데 골몰했다.
2009년 발족한 ‘힐즈버러 독립 패널’이라는 단체는 힐즈버러 참사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살핀 끝에 경찰의 조처가 현명하고 빨랐더라면 최대 41명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는 점, 경찰은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사망자의 혈중 알코올 농도와 범죄 이력을 리스트업하는 데 골몰했다는 점, 이를 바탕으로 경기장을 찾은 팬들을 불한당처럼 묘사했다는 점 등을 밝혀냈다. 사실 1981년의 대규모 시위 이후, 마거릿 대처의 집권 보수당에 노동자들의 도시 리버풀은 골치 아픈 지역이었는데, 이런 참사를 역이용해 그들의 강압적인 노동정책을 밀어붙이는 데 활용했다. 1981년의 대규모 시위 이후, 대처는 저항하는 노동자계급에 대해 철저한 불관용 정책으로 일관했고 그들을 적대시하는 이미지 전략을 능란하게 구사했던바, 힐즈버러 참사는 축구로 표출된 중·하위 계급의 불만을 ‘난동’으로 호도할 수 있는 적절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따금 리버풀의 경기를 보면, 특히 런던을 연고로 하는 팀과 맞붙을 때면 언제나 (You‘ll Never Walk Alone)을 외쳐 부르는 안필드 구장의 ‘더 콥’(The Kop·리버풀 서포터스)들이 ‘우리는 잉글랜드인이 아니라 스카우스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다. 스카우스(scouse)란 양고기나 쇠고기, 양배추, 당근, 감자, 양파 등이 들어간 리버풀 지역의 전통적인 스튜 요리이기도 하고 같은 영국 사람들도 알아듣기 어려운 리버풀 지역의 억센 사투리이기도 하며 따라서 리버풀이라는 도시와 그 지역 사람들을 가리킨다. 타 지역 사람들이 스카우스 말을 쓸 때는 경멸이나 비아냥의 뜻이 있는데 이를테면 맨체스터는 그 유명한 ‘박지성 개고기 송’에서 리버풀 사람들을 스카우스라고 비아냥거린다. 이를 받아서 리버풀 사람들도 자신만의 독특한 역사와 문화적 정체성을 강조할 때 스카우스라고 반어적으로 강조한다. 리버풀의 심장 스티븐 제라드는 서형욱 해설위원과 가진 인터뷰에서 제이미 캐러거 같은 리버풀 출신 동료들과 이야기할 때는 “스카우스를 쓴다! 우리만 통하는 언어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이해 못한다”고 말한 적 있다.
도시의 문화와 역사와 상처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의 으로 돌아가서 말한다면, 우리는 축구를 이해할 때, 그 선수들을 밤낮으로 성원하는 팬들을 이해할 때, 그 선수와 팬들이 형성한 문화를 이해할 때, 그 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던 한 도시의 역사까지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에 비로소 축구팬이 ‘난동꾼’이 아니며 축구장이 무슨 사회적 악감정이나 해소하는 배설소 같은 천박한 곳으로 전락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리버풀을 사랑해 그들의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까지 본다는 것은, 이번주에도 메마른 운동장에서 낡은 축구화 끈 동여매고 뛰고 있을 우리 모두의 영혼을 위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난동꾼이 아니며 시간이 남아돌아서 흙먼지 마시고 뛰고 있는 게 아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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