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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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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은 골이오, 노골은 노골이다

유로 2012 우크라이나의 억울한 ‘노골’ 계기로 되짚은 비디오 판독 도입 논란…
40대 카메라가 뻔히 ‘오심’ 찍는데 오심도 축구의 일부라는 관점 유지하기 어려워
등록 2012-06-27 11:57 수정 2020-05-03 04:26
잉글랜드 존 테리가 뒤늦게 걷어냈지만, 공은 명백히 골라인을 ‘완전히’ 넘었다. 전세계 시청자가 모두 아는 사실을 심판만 몰랐다.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오심이 나오는 꼴이다. KBS 스포츠 제공

잉글랜드 존 테리가 뒤늦게 걷어냈지만, 공은 명백히 골라인을 ‘완전히’ 넘었다. 전세계 시청자가 모두 아는 사실을 심판만 몰랐다. ‘벌거벗은 임금님’ 같은 오심이 나오는 꼴이다. KBS 스포츠 제공

우크라이나로서는 땅을 치고 분개할 일이 벌어졌다. 8강 진출을 다투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잉글랜드전에서 우크라이나는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그러던 후반 17분 마르코 데비치가 찬 공이 골라인을 넘었는데, 잉글랜드 수비수 존 테리가 달려와 걷어냈다. 그것도 멋진 모습이긴 했으나, 어쨌든 공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히딩크 vs 플라티니

축구 규칙에서 골이란 공 ‘전체’가 크로스바 아래와 양 골포스트 사이의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갔을 때를 말한다. 공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다. 그리고 ‘완전히’ 넘어가야 한다. 1mm라도 걸쳐 있으면 골이 아니다. 현지 중계 카메라는 데비치가 찬 공의 ‘전체’가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갔음을 보여준다. 오심이다. 우크라이나의 올레크 블로힌 감독은 “공이 골라인을 50cm나 넘었다”고 주장했다. 50cm라면 ‘완전히’ 넘어갔다는 얘기다. 잉글랜드 골문 쪽의 추가 부심은 자신의 다리 사이에 골라인을 끼고 서 있었으면서도 무려 ‘50cm’나 넘어간 우크라이나의 골을 확인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는 눈물을 흘렸고, 8강 진출을 다툰 프랑스가 동시에 다른 경기장에서 열린 스웨덴에 0-2로 패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잉글랜드와 비기기만 해도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통한의 오심이 되었다. ‘결정적 순간’의 오심을 막기 위해 비디오 판독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몇 해 전부터 설득력을 얻고 있는데 이번 경기로 이 논쟁은 다시 점화될 듯하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때의 오심을 두고 히딩크는 ‘비디오 판독을 도입하지 않겠다면 회장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을 맹공한 적이 있다. 축구 규칙의 제정·변경 등을 관할하는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이 문제를 검토했으나 추가 부심이 골라인을 다리 사이에 끼고 서는 것으로 일단락했다. 대신 미디어가 나섰다. 남아공 월드컵 때는 32대의 초고속 카메라와 200여 명의 중계 인력이 투입됐다. 1초에 2700장을 찍을 수 있는 ‘울트라 모션 카메라’도 도입됐다. 이번 유로 2012에서는 무려 40대의 카메라가 ‘거의 모든 장면’을 찍는다. 그래도 카메라는 판관이 아니다. 프랑스 축구 영웅 미셸 플라티니는 비디오 판독 도입에 반대한다. 그런데 그가 바로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이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한 적어도 유럽의 국가 대항전이나 클럽 대항전에서 비디오 판독이 도입되지는 않을 듯하다. 추가 부심 2명 도입이 플라티니의 선택이다.

수억 명이 바로 아는 한 명의 오심

나는 그동안 비디오 판독에 부정적 입장이었다. 한때 스마트볼을 도입하자는 의견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스마트볼이란 위치 추적이 가능한 전자 센서가 내장된 공으로, FIFA의 엄격한 요구에 따라 아디다스가 제작을 완료해놓은 상태다. 스마트볼이 터치라인이나 골라인을 넘어갈 때 센서가 즉각 주심의 수신기에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다. 이미 2005년, 페루에서 열린 17살 이하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그러나 당시 위르스 린시 사무총장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첨단기술로 확인될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밝혀 유보됐다. 나는 ‘심판도 경기를 뛰는 사람이며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는 표현에 의지해 축구가 지닌 지극히 인간적인 원시적 미학이 모니터 화면이나 마이크로칩에 의해 간섭당하는 것을 용인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왔다. 그런 관점의 글도 몇 차례 썼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수십 대의 카메라와 그것을 지켜보는 수억 개의 눈동자가 분명히 골을 확인하고 있는데, 오직 그 앞에 서 있던 추가 부심의 판단 착오로 무효가 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은 큰 대회를 치르는 동안 어쩌다 한두 번 발생한다. 그 정도라면, 비디오 판독을 도입해도 무방하다.

걱정하는 쪽에서는, 그 빗장이 풀리고 나면 축구장은 곧장 비디오 판독 시비의 난장판이 되고 마침내 크고 작은 반칙이나 오프사이드까지 모조리 판독 대상이 되며 이 경우 축구의 고유한 역동성과 비극적 미학이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한다. 그 점, 타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골 확인’으로 한정하자는 것이다. 골은 축구를 구성하는 나머지 요소들을 다 합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결정적 순간이다. 오직 골 하나를 위해 90분을 뛰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서 뛴다. 그런데 우크라이나의 경우처럼, 분명히 골라인을 ‘완전히’ 넘어갔음에도 부심의 오심으로 패하고, 8강행이 좌절되고, 미샤 엘먼의 바이얼린은 구슬프게 울려퍼지고, 영웅 안드리 셰프첸코의 은퇴마저 적어도 한 경기나 일찍 앞당겨진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다.

우리가 저주를 내리는 신은 아니다

나는 몇 해 전 이런 논란이 있을 때, 짐짓 그럴듯하게 피력한답시고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 이야기를 거론하곤 했다. 굴러내린 바위를 다시 밀고 올라가는 인간의 존엄한 부조리 앞에 스마트볼이나 비디오 판독 같은 얘기는 하지 말자는 주장이었다. 이제 그것을 나는 수정한다. 카뮈는 “인간적인 모든 것은 완전히 인간적인 근원을 갖고 있다”고 썼다. 그 명제와 비디오 판독은 대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심판과 상대 팀과 우리 모두는 억울하게 골을 빼앗긴 선수들에게 다시 바위를 밀어올리라고, 그것이 운명이라고, 저주를 내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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