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한·일 월드컵 때, 차기 개최국 독일의 작가 귄터 그라스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 참석했다. 축시를 읽기 위해서였다. 그는 단상에 올라 시를 읽었는데,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 한국 관중이 그의 단호한 독일어에 내장된 시적 광휘를 온몸으로 접신한 것은 물론 아니었고, 시가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행사라도 열리면 대회사·격려사·환영사·치사 등이 이어지기 마련인데 그 끄트머리에 귄터 그라스의 시 낭송이 예정돼 있었으므로 어서 빨리 프랑스와 세네갈의 개막전이 열리기를 고대하는 관중은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늘 한쪽이 찌그러지는 시인의 공
그런 마음을 아는지 귄터 그라스는 짧은 시를 읽었다. 심호흡을 해가며 단어 하나씩 음미하며 읽어도 20초면 충분하고 리오넬 메시의 속도로 읽으면 10초 안에 끝날 정도다. “천천히 축구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그때 사람들은 관중석이 꽉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고독하게 시인은 골대 안에 서 있었고, 그러나 심판은 호각을 불렀다/ 오프사이드”
4년 뒤 독일 월드컵이 열렸다. 나는 그곳에서 또 귄터 그라스의 시를 만났다. 독일축구협회는 월드컵에 맞춰 여러 작가들에게 시를 요청했고 귄터 그라스도 한 편 썼는데, 이 시도 짧았다. 이 좁은 지면에 전문을 다 옮길 수 있을 만큼 짧으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나의 공은 찌그러져 있다/ 어렸을 때부터/ 누르고 또 눌렀지만/ 공은 한쪽으로만/ 둥그레지려고 한다”
‘공은 둥글다’는 이 시는, 생존의 균형을 어떻게든 바로잡으려고 비틀거리며 살아가는 우리 삶의 축소판으로 읽힌다. 더 분명하게는 바로 그해에 ‘나치 친위대’ 전력을 고백했던 78살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침통한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기도 하다. 히틀러의 최고 엘리트 친위대로 활동했다는 것은 평생 그의 짐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그는 금지된 것을 금지하는, 위반의 작품을 썼던 전후 세대 작가의 선봉이었고, ‘적대적 공존 관계’인 동서 분단 체제의 고착화에 저항했고, 통독 이후 일그러진 사회 상황을 건사하려는 진보적인 노력의 견인차로 활동했다. 그러니까 그는 줄곧 ‘오프사이드’를 범했고, 그 바람에 그의 공(삶)은 ‘늘 한쪽으로만 둥그런’, 그러니까 언제나 찌그러진 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귄터 그라스가 지난 4월5일 독일에서 “서방의 위선적 태도에 신물이 났기 때문에 더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늙은 내가 마지막 잉크를 써서 핵무장한 이스라엘이야말로 세계 평화를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올해 들어 이스라엘이 주변 정치 상황을 빌미로 핵무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이에 서방세계가 동조 또는 방조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치 친위 전력을 침통하게 고백했던 올해 84살의 귄터 그라스가 ‘유대인에 대한 나치 전범의 기억과 그에 따른 반유대주의자’라는 오프사이드 트랩을 거침없이 돌파하며 지금 이 순간 비판적 지성이라면 반드시 해야 할 발언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아마 그의 공은 좀더 찌그러질지도 모른다.
국내의 경우로 나는 이성부 시인을 기억하고 싶다. 1942년 광주에서 태어난 시인은 1960년 옛 (현 )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시집 (나는 특히 이 시집을 탐독했다) 등을 냈다. 시인의 삶과 더불어 오랫동안 기자 생활을 했고 그 상당한 기간을 스포츠신문에서 활동했는데, 그것을 그가 즐겁게 했던 까닭은 축구 덕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선수가 되어 장차 국가대표를 꿈꾸기도 한 시인은 중학교 2학년 때 축구부를 떠나 문예부로 옮겨갔고, 그 뒤 애틋한 문청 시기를 거쳐 시인이 돼서 줄곧 시를 썼다. 그러나 축구화를 완전히 벗지는 않았다.
몸을 던진 순간의 고결함
서울로 올라와 모래내 쪽에서 살림을 시작한 시인은 생활 세계의 그라운드, 곧 조기축구회에 가입했고 오랫동안 공을 찼다. 그와 함께 공을 찬 선수들은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아저씨였고 거대한 쓰레기산인 난지도 사람들도 있었다. 언젠가 시인은 “새벽마다 동네 조기축구를 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었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을지라도 덜 깬 눈을 비비며 운동장에 나가 뛰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축구를 하는 동안에는 피가 흐르고 상처가 쓰라려도 몸을 던진 그 순간의 일은 후회되지 않는다. 이것이 축구의 마력”이라고 쓴 적 있다. 그리고 1974년, 그 긴급조치의 시대에는 ‘슬라이딩 태클’이라는 시도 썼다. 그 한 대목을 옮겨본다. “입도 잃었어/ 사람이 사람의 마을로도 갈 수 없대서야/ 호통을 치고/ 호루라기 소리 들려오면/ 더욱 겁나지 않는 얼굴들/ 저희끼리 모여// 마음을 쌓아두고 불을 지피는 때/ 이 마지막 남은 칼/ 이 부끄럽지 않은 몸짓!”
이 시에 대해 시인은 “축구를 하는 어떤 순간에는 모래바닥에 자기의 몸을 던지는 것이다. 피가 흐르고 상처가 쓰라리고, 오랫동안 딱지가 붙어 다녀도, 몸을 던진 그 순간의 일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한 적 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열심히 동네 축구를 하고 있는 많은 독자들은 이런 고결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 잘 알 듯하다. 그렇게 평생 슬라이딩 태클을 했던 이성부 시인이 지난 2월28일 간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살.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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