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6년 전, 최은성은 중국 전지훈련지에서 문신을 새겼다. 제 몸에 문신을 새긴다는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이나 맹세를 새기는 일이다. 이를테면 아이들 이름이나 추상적 문양이나 종교적 경구를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대전 시티즌의 엠블럼을 새겼다. 아들과 딸의 영문 이름을 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 몸에 자신의 등번호 21번과 소속 구단의 엠블럼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으로 새겨넣는다는 것은 아무리 10년 이상 몸담은 곳이라 하더라도 쉽게 선택할 수 없는 결정이다. 프로선수들은 본인의 실력과 타 구단의 러브콜에 의해 언제든지 팀을 옮길 수 있다. 본인이 남아 있고 싶어도 구단 사정에 따라 방출될 수도 있는 운명이기에, 제 몸에 구단 엠블럼을 새긴 최은성의 경우는 단순한 호기 이상의 결연하고도 의연한 결정이랄 수 있다.
재계약 불발과 묵살된 은퇴식
그랬던 최은성을, 대전 시티즌은 더 이상 붙잡지 않기로 했다. 그에 따라 대전 시티즌의 홈구장에 붙어 있던, 최은성의 출전 경기수를 나타내는 걸개의 숫자 ‘464’는 이제 멈췄다. 15년 동안 오직 한 구단에서 464경기를 뛴 선수는 최은성이 유일하다. 한 팀에서만 활약하는 ‘원클럽맨’은 30년 역사의 K리그에서 극히 드물다. 신태용, 박태하, 김현석 등인데 더러는 말년에 해외에 진출했기 때문에 온전히 선수 생활 전부를 국내의 한 팀에 바친 선수는 최은성이 유일무이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선수가 구단과의 재계약이 불발돼 사실상 은퇴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쉽기는 해도, 어쩌면 프로라는 냉혹한 세계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능력에 대한 평가와 그에 따른 계약 조건에 대해 ‘갑’과 ‘을’은 늘 다른 입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대전 구단은 선수 등록 마감일인 2월29일 “양측이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력과 금전적 측면에서도 구단의 상황이 너무나도 절박하다”고 밝혔는데, 이 정도라면 이해하지 못할 경우까지는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사람을 떠나보낼 때는, 그에 걸맞은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더욱이 최은성처럼 한 구단에서 15년을 우람하게 버텨온 선수라면 말이다.
그러나 대전 시티즌의 김광희 사장은 등록 마감일까지 어떤 방식의 대화도 하지 않았다. 막바지에 몰린 최은성이 아내의 간절한 호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구단을 찾아갔으나, 김 사장은 아내와 함께 찾아온 선수를 앞에 놓고 동석한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며 ‘나 쟤랑 말도 섞기 싫다’ ‘저 ×× 때문에 잠도 못 잤다’ 등 험한 말까지 쏟아냈다고 한다. 최은성의 아내는 구단 홈페이지에 “제발 부탁합니다. 조용히 잊혀지게 도와주세요”라고 하소연했다. 김 사장은 시즌 첫 홈 개막전에서 최은성의 은퇴식을 열자는 내부 의견도 묵살했다. 최은성의 연속 경기 출장 걸개 숫자를 치우라고 했고 최은성 동영상도 틀지 말라고 했다.
이는 단지 구단과 노장 선수의 재계약 불발 차원을 넘어서, 자치단체장의 ‘제 식구 챙기기’가 낳은 파탄에 가깝다. 대전시 정무부시장과 대전도시철도공사 사장을 지낸, 그러니까 축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낙하산 사장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만행이다. 이런 낙하산들은, 비단 축구장만이 아니라 거의 전 영역에서, 소속 직원이나 팬(혹은 시민)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정치적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임명권자만 바라보고 움직인다. 이런 자에게 축구선수는 그저 ‘뽈이나 차는 애들’일 뿐이고 15년 역사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장기판의 졸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최근 3~4년 동안 대전 시티즌은 이런 무자격의 사장이 줄지어 들어왔다 나가면서, ‘축구특별시’의 자존심이 땅에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땅에 떨어진 ‘축구특별시’의 자존심
이 글을 마무리하는 참에, 구단주인 염홍철 대전시장이 김광희 사장의 사표를 수리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비단 최은성 사태만이 아니라 그동안 물밑에서 거론되던 김 사장의 온갖 독단과 전횡까지 노출되자 염 시장이 이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막으려고 특단의 조처를 내린 셈인데, 그렇다면 이로써 사태는 일단락되는 것인가.
두 가지 숙제가 남았다. 우선, 무자격 사장 때문에 취소된 은퇴식을 정성껏 마련하는 것이다. 구단 직원들은 한화 이글스의 송진우 선수가 은퇴를 할 때 직접 현장을 찾아간 적 있다. 언젠가 최은성 선수를 떠나보낼 때 송진우 은퇴식 이상으로 거행하려고 참관했던 것이다. 과정이 뒤틀리기는 했지만 이제 그 일을 제대로 할 때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축구를 잘 아는 사람이 경영자로 와야 한다. 선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 팬들이 구단주나 기업주 때문이 아니라 오직 선수들을 보려고 경기장을 찾아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대전 시티즌을 맡는 것이다. 그것이 전격적인 사표 수리가 비난 여론을 잠재우려는 미봉책이 아님을 입증하는 방법이며 비로소 ‘축구특별시’ 대전 시티즌이 활로를 찾는 길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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