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한국야구위원회(KBO)의 한 직원이 아이디어를 냈다. 올해 한국시리즈는 7차전까지 갈 경우 11월2일에 끝날 예정이었다. 시리즈 기간 중인 10월26일은 서울시장 선거일. KBO에선 한나라당 나경원, 야권 단일후보 박원순 캠프에 각각 오퍼를 냈다.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리는 5차전(10월31일)에 신임 서울시장을 모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MB의 잠실야구장 키스 이벤트
KBO 관계자에 따르면 나경원 캠프에선 OK 사인이 나왔다. 그러나 박원순 캠프에선 답이 오지 않았다. 그럼 일이 되지 않는다. 일 욕심이 많은 새 총재를 모시는 처지에선 입맛이 썼다. 하지만 여기엔 약간의 반전이 있었다. 여러 정파가 모인 박 후보 캠프는 일사불란함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실무진 사이에 혼선이 빚어졌을 수 있다. KBO의 제안이 전해진 뒤 “서울시장 후보 박원순, 민주노동당 권영길 의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한국시리즈 5차전을 관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여러 사정이 겹쳐 야구장 방문은 무산됐다. 하지만 정계에 태풍을 몰고 온 서울시장 선거 와중에 한국시리즈 관전이 캠프 의제가 됐던 건 사실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9월3일 홈팀 LG와 원정팀 롯데의 경기가 열린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이 대통령은 4회초 종료 뒤 잠실구장 전광판에 ‘키스타임’이라는 문구가 뜨자 동석한 부인 김윤옥씨와 입을 맞췄다. 여기에는 약간의 ‘의전’이 포함돼 있었다. 청와대는 대통령 내외의 행차를 앞두고 이 경기를 중계한 방송사에 “이벤트가 일어나면 해당 이닝 교체시 광고 방송을 중단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뭐 그 정도야 어떤가.
‘스포츠’와 ‘정치’라는 단어가 결합하면 부정적 뉘앙스가 생긴다. 기자는 91학번이다. 과 사무실에 스포츠신문을 들고 가는 게 이상하게 비친 시절이었다. 프로스포츠는 제5공화국의 ‘3S’ 정책의 산물이라는 이론이 상식이었다. 정태춘도 “화창한 잠실야구장”을 불편해하는 노래 가사를 썼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 대통령 내외의 야구장 방문이나 “거인(롯데 자이언츠)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 다른 ‘갈매기’인 문재인, 안철수, 루시드 폴 등과 함께 사직구장 경기를 보고 싶다”는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트위터 멘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예전보다는 너그러워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뒤 “사직구장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롯데 구단은 꽤나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올해엔 KBO가 여야에 관계없이 서울시장 당선자를 초청할 생각을 한 데서 정치에 대한 태도가 꽤 쿨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은 적극적으로 정치권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한다. 경남 창원시의 제9구단 유치에는 김두관 경남도지사의 지원이 큰 구실을 했고, 경기 수원시의 10구단 유치에는 김문수 경기도지사가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울한 수치가 하나 있다. 대한민국 국회도서관 홈페이지에서 ‘교육 재정’을 키워드로 입력하면 456건의 학위 논문이 검색된다. ‘체육 재정’은 어떨까. 고작 11건이다. 2000년대 이후만 따지면 5건에 불과하다.
한 페이지짜리 체육 정책공약
몇 년 전 서울대 체육교육과 원로인 임번장 전 체육인재육성재단 이사장에게 “국내에 체육 재정 관련 전문가가 몇 분이 있습니까”라고 물은 적이 있다. 노학자의 답을 이랬다.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외국으로 떠났고 한 명은 분야를 바꿨다.”
질문을 했던 이유는 2007년 부산 에서 충격적인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김용호·권혁범 기자는 발품을 팔아가며 부산시내 293개 초등학교 가운데 61개교를 표본조사했다. 조사 결과 33개교(54%)에는 운동장에 축구 골대가 없었고, 26개교(43%)에는 농구 골대가 없었다. 명목상 안전사고 우려 때문이지만 공부에 지장이 생긴다는 게 실제 이유였다고 한다. 문제는 제7차 교육과정의 ‘초등학교 체육장(운동장) 설비 기준’에는 이 시설을 의무적으로 갖추도록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산 문제로 접근을 시도했지만 ‘전문가가 없다’는 더 충격적인 답을 들었다.
이는 예산을 집행하는 행정부, 재원을 배분하는 정치권의 체육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낮다는 걸 방증한다. 2008년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을 하던 선배를 찾아 “체육 관련 정책을 적극 개발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철야 근무에 지친 선배는 “다른 곳에 쓸 재원도 모자라지 않는가”라고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보정당’만 그럴까. 정희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교수는 “2007년 대선 때 한나라당 정책공약집에 체육 관련 내용은 단 1페이지였다. 민주당 공약집의 경우 페이지는 조금 더 많았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지난 대선 때 정책을 베끼다시피 했다”고 덧붙였다.
국내의 체육 관련 재정 규모는 충분하지 않지만 작지는 않다. 2010년 체육백서에 따르면 보면 국고, 국민체육진흥기금, 지방비, 체육 단체를 더해 총 3조5344억원 규모다.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체육 관련 예산은 뺀 수치다. 이 예산은 얼마나 잘 쓰이고 있을까.
정 교수는 “국고(1529억원)보다 스포츠토토 수익금을 재원으로 하는 기금(5295억원)의 비중이 너무 높다. 안정성이 낮은 기금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며 “체육 예산 집행을 따져보면 국제대회 유치나 경기장 건설에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 집행된다. 생활체육 관련 예산이 사실상 전용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지자체에서도 대형 센터나 골프장 등 지자체장의 업적 과시성 지출이 많다”며 “지자체에서 잔디구장을 지어도 청소년이나 일반인에게 잘 개방되지 않는다. 접근성이 높은 지역 유지들의 행사 용도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계에서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건 스포츠 기자 처지에선 바람직한 일이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이들에게 스포츠는 소통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육·스포츠에는 관심을 넘어선 ‘정책’이 필요하다.
복지는 건강한 삶에서 비롯한다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는 중요한 선거 쟁점이 될 것이라 한다. 복지는 ‘행복한 삶’이라는 뜻이며 몸의 건강은 행복에서 매우 중요하다. 2007년 의 기사를 주의 깊게 읽었던 이유는 딸아이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3학년이 된 딸은 “학교에 축구 골대는 있어도 농구 골대는 없다”고 말했다.
최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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