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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의 끝, 보석처럼 남은 이름

9월4일 폐막한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값진 승부를 기록한 작고 낯선 나라의 선수들을 기억하라
등록 2011-09-08 09:28 수정 2020-05-02 19:26

모두들 3레인 선수만 주목했다. 세계선수권 사상 처음으로 여자 200m와 400m 동시 석권을 노리는 앨리슨 펠릭스(26·미국)였다. 그는 200m 4연패 도전에 앞서 400m에 출전했다.
여자 400m 결승이 열린 8월29일 저녁 대구 스타디움. 펠릭스 옆 4레인의 아만틀 몬트쇼(28)는 조용히 스타팅블록에 두 발을 얹었다. 드디어 출발 총성이 울렸다. 출발 반응 속도는 0.327초. 결승에 오른 8명 중 두 번째로 느렸고, 경쟁자 펠릭스(0.163초)의 두 배에 달했다.

0.03초의 승부, 보츠와나의 몬트쇼

스타트의 단점은 폭발적인 스피드로 만회했고, 어느새 선두로 치고 나갔다. 결승선 100m를 앞두고 펠릭스가 따라붙었다. 인간이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한계치는 350m 정도다. 400m 트랙을 한 바퀴 도는 경기에서 나머지 50m는 극한의 고통이 밀려온다. 결승선을 앞두고 둘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경쟁을 펼쳤다. 그리고 골인. 승부는 0.03초 차이로 갈렸다. 승자는 몬트쇼였다.
전광판 맨 위를 장식한 몬트쇼의 이름 옆에 ‘BOT’라는 국가명 약칭이 새겨졌다. 관중은 갸우뚱했다. 49초56으로 자국 신기록까지 세운 몬트쇼는 얼룩말 무늬의 국기를 몸에 휘감고 관중에게 손을 흔들며 트랙을 천천히 돌았다. 그는 “보츠와나에 있는 동포들이 기뻐할 것”이라며 “조국에 희망을 전해 기쁘다”고 했다.
보츠와나는 인구 200만 명에 불과한 아프리카 남부의 작은 나라다. 이번 대회 개최 도시인 대구(250만 명)의 인구보다도 적다. 인구의 30%가 기아와 에이즈에 허덕이고 평균수명이 40살 정도로 알려진 나라다. 몬트쇼는 보츠와나 여자 선수로는 최초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했다. 그리고 보츠와나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대회에서 메달을 땄다. 보츠와나 선수단장은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는 우리나라가 이제 금(메달)까지 손에 쥐었다”고 기뻐했다.
여자 400m 결승에 이어 다음날인 30일 저녁 열린 남자 400m 결승에서도 거짓말처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 종목의 강자는 2008 베이징올림픽과 2009 베를린 세계대회를 연속 제패한 라숀 메릿(25·미국). 모두가 그의 메이저대회 3회 연속 우승과 세계선수권 2연패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약물 양성 반응으로 21개월 출전정지 징계를 받은 뒤 이번 대회 직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다이아몬드리그에서 2위를 기록하며 화려한 복귀를 준비했다.

첫 출전 금메달, 그레나다의 제임스

반면 인구 8만9천 명의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에서 온 키러니 제임스(19)는 그저 복병 정도로 여겨졌다. 자신의 만 19살 생일(9월1일)에 이틀이 모자란 ‘애송이’였다. 이번 대회 직전 첫 출전한 성인 무대에서 44초61의 올 시즌 최고 기록을 냈지만 메이저대회 출전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제임스는 빨강·노랑·초록의 국기 색깔 옷을 입은 틸먼 토머스 총리 등 대구에 온 자국 국민의 응원을 받으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예선과 준결승을 1위로 통과해 결승에서도 5번 레인을 배정받았다. 출발도 좋았다. 0.137초의 경이적인 출발 반응 속도로 스타트했다. 바로 옆 레인(4번 레인)에 자리한 메릿과 엎치락뒤치락 뜨거운 승부를 벌였다. 둘은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과는 결승선 20m를 앞두고 메릿을 근소하게 앞지른 제임스의 0.03초차 역전 드라마였다. 공교롭게도 여자 400m 결승의 1·2위 간격과 똑같았다. 제임스는 2005년 8월12일 헬싱키 대회 때 제러미 워리너(미국·당시 21살193일)를 넘어서는 400m 최연소 금메달의 주인공이 됐다.
전광판 그의 이름 옆에 44초60의 올 시즌 최고 기록이 찍혔다. 그리고 그 옆에는 ‘GRN’이라는 국가명이 새겨졌다. 그레나다. 우리에겐 1980년대 쿠데타와 미국 침공 정도로 알려진 나라다. 제임스는 경기 뒤 공식 기자회견에서 “국가를 대표해 뛰어서 기쁠 뿐”이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는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레나다 사람들을 위해 금메달을 따서 기쁘다”고 했다.
토머스 총리는 제임스가 우승하자 담화문을 발표하고 “그레나다의 스포츠 역사상 가슴 벅찬 순간”이라고 기뻐했다. 그레나다 정부는 제임스가 금메달을 딴 날을 기념해 국가공휴일 지정 여부도 고려 중이다.

세인트키츠네비스의 ‘킴 콜린스의 날’

몬트쇼와 제임스라는 영웅을 탄생시킨 남녀 400m 결승에 앞서 28일 저녁 열린 남자 100m 결승. 모두가 우사인 볼트(25·자메이카)의 실격에 놀라고 당황했다. 볼트 없이 다시 출발한 경기에서 동메달을 목에 건 35살의 노장 선수가 있었다. 킴 콜린스. 그의 조국은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세인트키츠네비스. 면적은 그레나다보다도 작은, 서울의 절반도 안 되고, 인구는 그레나다의 절반가량인 4만6천 명에 불과한 나라다.
콜린스는 이미 2003년 세계선수권 육상 남자 100m에서 금메달을 땄다. 팀 몽고메리(미국), 드웨인 체임버스(영국)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의 치열한 접전 끝에 얻은 금메달이었다. 세인트키츠네비스는 그가 금메달을 딴 날을 ‘킴 콜린스의 날’로 정했고, 고속도로와 공항 등 곳곳엔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 있다.
콜린스는 대구에서 금메달보다 값진 동메달을 땄다. 1993년 세비야 세계선수권 때 린포드 크리스티(영국·33살135일)가 세운 역대 세계선수권 100m 최고령 메달리스트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는 2년 전, 육상 선수에겐 환갑이나 다름없는 33살에 베를린 세계선수권에 출전했지만 100m 준결승에서 쓴잔을 마신 뒤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35살에 전격적으로 트랙에 복귀해 조국에 깜짝 메달을 선사했다. 콜린스는 “볼트가 실격했을 때 내게도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게 게임이고 인생”이라고 했다.
“시상대 위에 서게 돼 기쁘다”고 말한 그는 내년 런던올림픽 무대에도 서겠다는 각오다. 그의 생애 다섯 번째 올림픽이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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