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김성근 감독 경질 사태를 비롯, 스포츠인에게 던져지는 급작스런 해고 통보…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예의와 태도에 대해
등록 2011-08-31 20:03 수정 2020-05-03 04:26

딕 아드보카트를 기억하는가?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한국 대표팀을 이끈 네덜란드 출신 감독으로, 현재 러시아 대표팀을 이끌고 있다. 그가 한국 대표팀을 이끌고 독일로 갔을 때, 국내의 ‘군사적 스포츠 저널리즘’은 다양한 군사용어를 남발하며 1승 혹은 16강을 염원했다. 그중 이런 기사가 있었다.

뒷모습 씁쓸했던 딕 아드보카트

구단들은 이제 '헤어짐'에도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김성근 전 SK 와이번스 감독. 한겨레21 윤운식

구단들은 이제 '헤어짐'에도 예의를 갖춰야 하지 않을까. 김성근 전 SK 와이번스 감독. 한겨레21 윤운식

“나폴레옹이여, 알프스를 정복하라! 국내 축구팬들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스위스는 물론 전 유럽을 정복했던 나폴레옹을 아드보카트 감독에게 비유하면서 그가 현란한 용병술로 반드시 스위스를 격파해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2006년 6월22일치) 이 기사는 계몽과 혁명, 그리고 반혁명과 앙시앵레짐이 복합적으로 얽힌 200여 년 전의 유럽 역사에서 오로지 정복자 나폴레옹의 이미지만 뽑아내 아드보카트 대표팀 감독을 군사령관쯤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그 장군은 냉정하게도 16강 진출에 실패하자, 현지에서 곧장 러시아로 떠나버렸다. 선수단과 함께 귀국하지도 않았고 각별한 정을 나누는 기자회견도 드물었으며, 월드컵 내내 ‘러시아행’을 부정하다가 그냥 그쪽으로 갔다.

나는 지금 그때 그 성적과 전술을 복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냥 그렇게 떠나도 되는 것일까.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동안의 수고와 정과 아쉬움을 어루만지는 과정이 너무 짧았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더치페이’가 말해주듯이 계산 하나는 확실히 하는 네덜란드인답게 아드보카트의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뒷모습은, 씁쓸했다.

하긴 떠나는 사람만 그런가. 보내는 사람도 예의가 있고 태도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구단을 구단주(즉, 대전시장)의 선거 전리품으로 여겨온, 그 바람에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구단 운영과 장기적·발전적 미래 비전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구단 운영 방침이 선수와 팬이 아니라 자신을 임명해준 상급자(물론 최상위자는 대전시장)만 바라보게 한, 대전시티즌은 지난 7월2일 왕선재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승부 조작’ 파문에서 왕선재 감독의 일정한 ‘관리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직접적 책임 소재가 밝혀지지 않았다. 게다가 일정하게 ‘모양’을 갖춰 진행할 수도 있는 일이었건만, 김 사장은 취임한 바로 다음날, 경기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날 전남 드래곤즈와 비중 있는 경기를 앞두고 연습 중인 왕선재 감독을 불러 전격적인 경질을 통보했다. “당신은 해고야!”(You are fired!)

이렇게 해도 되나. 한 팀의 수장을 간단히 처리해버리면 그것을 지켜보는 구단 직원과 선수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라운드에서 땀 흘려 뛰는 일이란 한낱 파리들의 한철 날갯짓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가? 하긴, 어디 축구장뿐인가. ‘구조조정’이니 ‘경영합리화’니 하는 근사한 이름으로 전격 실시되는 해고가 요즘엔 대체로 ‘문자메시지 통보’라고 하니, 직접 찾아와 ‘당신은 해고되었소’라고 말하는 것은 점잖은 축에 속할지도 모른다.

[%%IMAGE2%%]신화가 된 김성근 야구여 안녕

비단 그 태도와 방식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시즌 도중에, 아직 계약 일수가 남아 있음에도 전격적으로 경질하는 것은 ‘인간적 도리’ 운운하는 추상적인 태도를 떠나서 팀의 장기적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올해 강원 FC는 최순호 감독이 전격 경질되고 김상호 감독이 후임으로 왔으나 성적이 여의치 않아 단장이 사퇴를 했다. 신임 감독마저 자를 수는 없어 단장이 사퇴했는데, 이 정도면 고육지책이 되겠다. 서울 FC의 경우, 팀을 맡은 지 겨우 110일 만에 황보관 감독이 사퇴했다. 사퇴라고는 했지만 경질이었다. 신임 감독이 겨우 7번 경기를 치르고(물론 1승3무3패는 좋은 성적이 아니다) 경질된다는 것은, 그러니까 110일 정도 지도한다는 것은 평소 축구 철학의 실현이나 팀의 발전적 전망이나 스카우트나 트레이드를 통한 리빌딩 따위는 고사하고 현재의 선수들이 내밀하게 지닌 미묘한 습관이나 스타일, 경기 전후의 성격을 알아내기도 어렵다.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그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하는 법이다. 자, 이제 SK 와이번스를 생각해보자. 다급한 보도를 통해 익히 알려졌다시피, 지난 8월19일 SK 구단은 그야말로 전격적으로 ‘올 시즌을 마치고 팀을 떠나겠다’는 김성근 감독의 발언이 있자마자 곧장 다음날 경질해버렸다.

축구장에 떠도는 명언이 있다. ‘축구는 영원하고 감독은 경질된다’는 것이다. 야구장도 다를 게 없다. 지난 시즌, 4강 감독들이 저마다의 경우와 구단 상황에 따라, 현재 모조리 필드를 떠났다. 롯데의 제리 로이스터, 두산의 김경문, 삼성의 선동열, 그리고 숱한 악재를 딛고 지난 시즌 우승(뿐만 아니라 감독 재임 4시즌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및 그 가운데 세 차례 우승)을 거둔 김성근 감독마저 더그아웃에서 사라졌다.

김성근 감독의 신화적인(‘야신’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야기는 잠시 잊기로 하자. 공 하나마다 혼을 거는 철두철미한 작전의 야구, 직접 배팅 코치가 되어 몇 시간이고 공을 던져 올리는 훈련의 야구, 지독한 훈련 때문에 시즌이 끝나면 우승과 함께 부상으로 ‘부상’을 얻기도 하는 야구, 그럼에도 치밀한 회복과 리빌딩으로 부상 전보다 훨씬 우람하고 정교한 선수로 거듭나게 하는 야구…. 그런 신화들을 잠시 잊자. SK의 ‘스포테인먼트’도 잠시 잊자. 한 해 평균 30만 명도 채 되지 않는 관중 수가 (김성근 감독의 이기는 야구와 더불어) 구단 프런트의 ‘즐기는 가족 야구’ 마케팅으로 100만 관중을 헤아리는 시대가 된 것도 잠시 잊자.

구단 아닌 감독과 선수를 보는 팬들

중요한 것은 구단이 감독이나 선수를 어떻게 떠나보내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축구장으로 찾아가서 ‘수원 삼성!’ 하고 외친다. 야구장을 찾아가서는 ‘LG’나 ‘SK’나 ‘롯데’를 외친다. 그러나 팀 이름 때문에 그렇게 외치는 것이지 실질적·내면적으로는 그 기업이 아니라 감독과 선수들을 호명하는 것이다. 감독이 존중받는 야구, 설령 서로 뜻이 맞지 않아 떠나보낼 때도 ‘경질 파문’이 일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하는 야구. 그런 자세와 문화가 결여된 채 기업(혹은 구단주)의 자존심을 위해 감독의 자존심을 꺾어버리는 행태 때문에 팬은 화가 나는 것이다. 문자메시지로 해고를 통보하는 이 비정한 사회에서 마침내 그라운드와 필드마저? 그리하여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유니폼에도 불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