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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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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이기지 않았다

여자월드컵의 일본, 코파아메리카의 파라과이 등 승부차기 ‘명승부’… 수만 가지 변수가 얽힌 심리전에 인간사의 모든 것이 있다
등록 2011-07-29 17:01 수정 2020-05-03 04:26

파라과이 대표팀이 2011 코파아메리카(남미축구선수권)에서 단 1승도 없이 무승부만으로 결승까지 올라갔다. 파라과이는 조별리그에서 에콰도르(0-0), 브라질(2-2), 베네수엘라(3-3) 등과 차례로 비겨 3위에 머물렀지만 ‘와일드카드’로 어렵사리 8강에 진출했다. 이후 파라과이는 8강전 브라질과 4강전 베네수엘라에 모두 승부차기 승리를 거둬 5경기 연속 무승부 결승 진출을 이뤘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결승에 진출했으니 독자가 이 지면을 읽을 쯤에는 ‘무승부 연대기‘의 결말이 나 있을 것이다. 오직 무승부만으로 우승까지 하는 억조창생의 기막힌 장이 펼쳐질지 궁금한 상태로 이 글을 쓰고 있다.

무승부를 가르는 승부차기

여기서 잠깐, 국제축구평의회(IFAB)가 2009년 10월에 승인하고 국제축구연맹(FIFA)이 2010·2011 시즌에 적용하고 있는, 그러나 우리가 어려서부터 그 세목들을 전혀 모르고도 ‘뽈’을 차는 데 아무 지장이 없던 ‘경기규칙’(Laws of the Game) 제8조 ‘경기 시작과 재개’를 보자.
이 조항에 따르면 경기는 전·후반과 연장 전·후반의 ‘시작’ 및 득점 발생 직후 경기 ‘재개’ 방식을 ‘킥오프’로 규정하고 있다. 양팀 선수가 자기 진영에 있고 킥오프하는 팀의 두 선수가 주심의 신호에 따라 킥오프를 하며 나머지 선수들은 9.15m(중앙원의 반지름)를 떨어져야 한다. 이렇게 ‘시작’ 또는 ‘재개’된 흐름 과정에서 골이 골문을 넘어갔을 때를 득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킥오프’가 아닌 상황에서, 양팀 선수가 교대로 차는 것은 ‘경기 시작 또는 재개’의 한 요소가 아니므로 경기 결과에 반영되지 않고 ‘무승부’로 처리된다.
이 ‘경기 외적’인 절차로 과거에는 동전 던지기, 제비뽑기, 다음날 단축시간 재경기 등이 있었다. 그러나 빡빡한 일정에다 전세계 미디어와 팬이 결합한 축구 산업의 월드마케팅 사이즈는 다음날 재경기 같은 한가로운 겨루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동전 던지기나 제비뽑기도 혈전 120분을 한낱 ‘복불복’으로 전락시키는 처사라는 이유로 사라졌다.
내 기억에는, ‘동네 축구’를 제외하고, 1998년 K리그 정규리그에서 천안 일화 대 전남 드래곤즈의 경기가 마지막 제비뽑기였다. 시즌 개막 뒤 7연패에 빠진 천안 일화는 전남 드래곤즈를 홈(곧 천안오룡경기장)으로 불러 초반에 선취점을 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한 채 1-1 상황에서 승부차기까지 했는데 이 역시 5-5로 평행선을 그었다. FIFA의 규칙대로라면(제17조) 양팀이 번갈아 한 명씩 킥을 해 그 매 순간의 득점으로 승자를 가려야 했으나 당시 오룡경기장은 조명시설이 없어서 더 이상 승부차기가 불가능한 상황. 하는 수 없이 제비뽑기가 결정되었고, 2004년 브라질 일간 가 전세계 선수 704명의 사진을 놓고 인터넷 투표한 결과 미남 베스트11에 뽑힌 적 있는 천안 일화의 장대일 선수가 승리제비를 뽑았다.
이 숨 막히는 쇼다운(Showdown·마지막 결전)은 이제 국내외 모든 축구 경기와 감독과 선수들의 가장 비중 있는 한순간이 되고 있다. 파라과이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강호 미국에 맞서 극적인 우승을 거둔 일본 여자대표팀 역시 그 찬란한 결승전의 종지부를 승부차기로 끝냈다.

비운의 ‘다이애나 로스 클럽’

문제는 그 누구도 승부차기를 연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각 팀 감독들은 비중 있는 경기를 앞둔 전날, 슈팅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을 따로 뽑아 승부차기 연습을 시킨다. 그렇게 하면서도 어쩌면 본질적으로는 부질없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경기 흐름상의 개인 전술이나 부분 전술은 얼마든지 연습이 가능하지만 승부차기는 발의 감각을 살려놓는 정도일 뿐 그 압도적인 분위기를 사전에 세팅해놓고 연습할 수 없다는 뜻이다.
키커의 강슛이 골네트를 가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0.5초. 최고 기량의 골키퍼가 공의 방향을 인지하고 반응하는 데는 0.75초. 물리적으로는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경기 전체의 흐름, 상대팀과의 역대 전적, 그날 경기장의 과열된 분위기, 아침에 먹은 음식 메뉴의 상태, 축구화나 잔디의 조건 등 수만 가지 요소가 단 한 번의 킥에 집중되기 때문에 실축 혹은 골키퍼의 선방이 발생한다. 그래서 ‘무작정’ 차야 한다는 이론도 있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독일의 일간 는 역대 기록을 분석해 1.22m 이상 높이로 찬 슛이 99% 이상 성공했다고 썼지만, 이를테면 프랑스 대표팀의 프랑크 리베리는 방향을 정해두지 않고 그냥 달려가서 내질러버리며, 스페인의 멘디에타는 언제나, 어김없이, 설마 이번에도 또? 하는 상황에서도 한복판으로 슛을 쏜다(때로는 가볍게 그냥 밀어넣는다).
결국은 심리전인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때 주최국 이탈리아의 골키퍼로 준결승까지 517분 무실점 기록을 남긴 왈테르 젠가는 승부차기(혹은 페널티킥) 직전에 상대방을 향해 “얀마, 지금 네 생각이 나한테 다 읽히고 있다는 거, 잘 알지?” 하고 소리친 적도 있다. 요즘이라면 당장 퇴장이다. 이 때문에 아르센 벵거는 절대로 상대 골키퍼와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출중한 선수들이 ‘다이애나 로스 클럽’(미국의 팝스타 다이애나 로스가 1994년 미국 월드컵 개막행사에서 불과 3m 앞에 설치된 가설 골문에 차넣는 페널티킥을 실축함)에 가입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운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운명적 불가지론은 축구장의 운명이다. 인간사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바조, 둥가, 베컴, 트레제게 이런 선수들이 설마 그렇게 차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은퇴하는 전설에 대한 예의

한국 축구사에서 최악의 승부차기는 지난 1월의 아시안컵, 일본과 맞붙은 준결승전이다. 구자철, 이용래, 홍정호가 모조리 실축(혹은 상대 골키퍼의 선방)했다. 중요한 것은 그날 조광래 감독이 팀내 최고참 이영표 선수를 승부차기 명단에 넣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영표에게는 트라우마가 있다. 2002년 아시안게임 때 와일드카드로 선발되었으나 준결승전 때 승부차기 실축으로 아끼는 후배 이동국, 최성국, 김두현 등이 상무나 경찰청으로 가야 했다. 차범근 감독 역시 19살 때 국가대표로 처음 선발돼 나간 이라크와의 경기에서 두 번이나 실축했다. 그 뒤 차범근 감독은 승부차기(페널티킥 포함)에 나서지 않았다.
아무튼, 다시 생각해보건대, 만약 그 준결승 한-일전에서 이영표가 실축했더라면 어찌될 뻔했는가. 산전수전 다 치르고 대표팀 은퇴 발표까지 마친 이영표 선수가 결국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비운의 기록을 안고 다이애나 로스 클럽에 가입하게 되는 것은 악몽이다. 그러니 나는 조광래 감독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아뿔싸, 그로부터 20일쯤 지난 뒤 이영표는 사우디아라비아 크라운프린스컵 8강전에서 그만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말았다. 축구장이란, 운명이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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