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졌지만 이긴 ’광주’의 챔피언들

잇단 판정 시비로 아쉽게 진 아시안게임 한국 선수들의 눈물…

패배 딛고 의연하게 내일 준비하는 당찬 그들에게 경의를
등록 2010-11-24 10:55 수정 2020-05-03 04:26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유도 여자 48kg 이하급에 출전한 정정연(23·포항시청)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그의 눈에선 금세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동메달 결정전에서 북한의 황류옥을 상대로 밭다리걸기 한판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따낸 직후였지만 그는 웃을 수 없었다. 중국의 우수건과 맞붙은 준결승전이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절대 되치기가 아니었어요. 제가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도하면서 이렇게 억울한 건 처음”

11월16일 중국 광저우 화궁체육관에서 열린 2010 아시안게임 유도 여자 48kg 이하급 경기에서 한국의 정정연이 비디오 판독 끝에 한판패를 통보받은 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연합

11월16일 중국 광저우 화궁체육관에서 열린 2010 아시안게임 유도 여자 48kg 이하급 경기에서 한국의 정정연이 비디오 판독 끝에 한판패를 통보받은 뒤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다.연합

상황은 이랬다. 경기 시작 2분5초 만에 정정연이 허벅다리걸기를 시도하자 우수건은 허리안아돌리기로 역습을 감행했고, 둘은 거의 동시에 매트에 넘어졌다. 우수건의 등이 매트에 먼저 닿았다고 생각한 정정연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한판승을 확신했다. 심판진은 비디오 판독에 들어갔다. 이쪽 비디오에서는 정정연이, 반대쪽 비디오에서는 우수건이 먼저 매트에 닿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도 심판은 우수건의 한판승을 선언했다. “짜요! 짜요!”를 외치며 일방적으로 우수건을 응원하던 관중은 일제히 환호했다. 우수건은 결승에서 일본 선수를 상대로 열세를 보였는데도 2-1 판정승을 거두고 기어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정정연은 “여기가 중국이라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다. 유도하면서 이렇게 억울한 적은 처음”이라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키 155cm, 몸무게 48kg의 정정연은 당차고 의연했다.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빨리 잊고 2년 뒤 런던올림픽을 착실히 준비하겠습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 유도 경기가 펼쳐진 화궁체육관에서 한국은 금 6개, 은 3개, 동 5개를 따냈다. 애초 목표이던 금메달 3~4개를 초과 달성했다. 하지만 승자의 미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땀에 섞인 눈물과 한숨도 짙게 배어 있었다. 키 189cm, 몸무게 140kg의 거구 김나영(22·대전서구청)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많은 눈물을 쏟았다. 여자 무제한급에 출전한 그는 결승에서 류환위안(중국)에게 지도 2개를 내주고 졌다. 경기를 마치고 믹스트존(선수와 기자가 만나는 장소)으로 걸어오는 김나영은 땀과 눈물로 뒤범벅됐다. 그는 소감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연방 “아쉽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남자 유도 73kg 이하급의 왕기춘(22·용인대)은 아키모토 히로유키(일본)와의 결승전에서 연장전까지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유리한 경기를 펼치며 판정으로 가면 승리가 확실시됐다. 그러나 연장 종료 23초를 남기고 공격을 시도하다가 다리잡아메치기 역습을 허용했고, 심판은 유효를 선언했다. 애매한 판정이었고, 통한의 패배였다. 아키모토는 분명 왕기춘보다 한 수 아래 선수다. 하지만 지난 9월 일본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아키모토한테 준결승에서 연장까지 유리한 경기를 펼쳤지만 석연찮은 판정패를 당했다. 믹스트존으로 걸어나오는 왕기춘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역시 의연했다. “제가 (상대를) 못 넘겨서 진 것입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왕기춘은 깜짝 놀랄 말을 털어놓았다. 그는 “아키모토가 발목을 다친 것을 알고 있었지만 부상 부위를 공격하지 않았다”고 했다. ‘비겁한 금메달’을 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키모토는 다음날 목발을 짚고 나타날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고, 이 때문에 경기 내내 방어 자세만 취했지만 심판은 지도를 주지 않았다. 아키모토는 “왕기춘에게 존경과 경의를 표한다”며 고마워했다.

태권도가 열린 광둥체육관에서는 첫날(11월17일)부터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남자대표팀 주장을 맡은 장경훈(25·수성구청)이 남자 74kg급 1회전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9월 추석 때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25살에 뒤늦게 태극마크를 단 아들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하던 어머니가 산에 오르다 사고를 당해 숨졌다. 어머니는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수발을 들어왔다. 여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다.

누구보다 병역특례 혜택이 절실했지만 운이 없었다. 1회전에서 세계 랭킹 1위 알레자 나스라자다니(이란)를 만나 1-4로 졌다. 한 달 보름밖에 적응하지 못한 전자호구는 뜻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이란 선수가 공격하고 나서 일부러 넘어져 장경훈의 반격을 피했는데도 경고조차 주지 않은 심판 판정도 미숙했다. 말없이 경기장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대표팀 김정규 코치는 “어머니 영전에 금메달을 바치고 싶어했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계속될 환희와 감동의 드라마

유도경기장에서 3~4km가량 떨어진 광궁체육관에서는 남자핸드볼 선수들의 ‘분노의 슛’이 폭발했다. 4년 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편파 판정의 핵심 국가이던 쿠웨이트를 31-29로 꺾었다. 다음날에도 또 다른 편파 판정의 주역 이란을 역시 31-29로 물리치고 4전 전승으로 4강에 올랐다. 한국팀 에이스 윤경신(37·두산)은 “시원한 설욕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승이 목표라 전력을 노출하지 않으려고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유도경기장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광저우대학타운 벨로드롬에서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가 펼쳐졌다. 2004년 은퇴한 뒤 경륜에 입문한 조호성(36·서울시청)이 남자 사이클 4km 단체추발에서 10살 이상 차이 나는 후배 3명과 짝을 이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4년 히로시마 대회부터 시작해 아시안게임 개인 통산 다섯 번째 금메달이었다. 그는 “4년 전 도하 대회 때는 후배들을 전화로만 격려했는데, 같이 금메달을 따 가슴 벅차다”고 감격해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은 이제 대회 중반을 맞고 있다. 땀과 눈물, 환희와 감동의 드라마는 계속될 것이다..

광저우(중국)=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