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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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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존재감의 컬트 히어로

또다시 위기에서 탈출한 박지성…
EPL 6년차, 언제나 위기이자 동시에 위기탈출 중이었던 ‘미친 존재감’의 사나이
등록 2010-11-09 13:54 수정 2020-05-03 04:26

맨유의 ‘산소탱크’, 박지성이 살아났다. 지난 10월27일(한국시각) 칼링컵 16강 울버햄튼 경기에서 골 맛을 본 뒤 31일 잉글리시프리미어리그(EPL) 10라운드 토트넘 경기에선 선발 풀타임 최고 평점으로 조심스럽게 부활 조짐을 알리더니, 11월3일 새벽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부르사스포르전에서 1도움 공격 포인트를 올리며 위기탈출을 인증했다. 특히 최근 세 경기의 활약상은 밖으로는 시즌 초반의 극심한 부진과 잇따른 이적설을 훌훌 털어내고, 안으로는 박지성 스스로 자신감을 충전했다는 점에서 더욱 값지다.

팬들이 붙여준 ‘컬트 히어로’

» 위기를 정말로 기회로 반전시키는 사나이 박지성이 지난 10월27일 칼링컵 울버햄튼 경기에서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REUTERS/ PHIL NOBLE

» 위기를 정말로 기회로 반전시키는 사나이 박지성이 지난 10월27일 칼링컵 울버햄튼 경기에서 골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REUTERS/ PHIL NOBLE

도대체 얼마큼 못했기에 이토록 호들갑이냐고? 숫자가 말해준다. 최근 세 경기를 빼면 석 달이 지나도록 리그와 칼링컵을 포함해 총 4회 출전에 한 골이 전부였다. 그가 아무리 뒤늦게 발동이 걸리는 ‘슬로스타터’라서 8~9월 공격 포인트가 없다 해도 연이어 18명 엔트리에서조차 제외된 것은 이례적이다. 컨디션 난조와 잦은 결장의 악순환에다 드문드문 나간 경기에서도 박지성이 맞나 싶을 만큼 무력했던 모습은 그의 출전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나 같은 ‘맨유 우선’ 팬들까지 한숨짓게 했다. 설상가상으로 온갖 악재에 휘청이던 팀 전체의 추락이 박지성의 존재감마저 지워버렸고, 바이에른뮌헨 이적설에 이어 토트넘의 가레스 베일과 맞트레이드설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잘하든 못하든 박지성은 항상 위기였다. 2005년 여름 한국인 최초로 EPL에 입성한 이래 ‘벤치워머’ 굴욕을 당해가며 높디높은 EPL의 문턱을 허무느라 위기였다. 나니, 발렌시아 같은 떠오르는 신성들부터 심지어 긱스 같은 레전드 선수들과 전방위 주전 경쟁을 펼치느라 늘 위기였다. 선발과 결장, 공격 포인트와 실수 하나에도 멀미날 만큼 롤러코스터를 태우는 한국 언론 때문에 위기였고, 냄비처럼 끓다 식어버리는 현지 팬들 변덕 탓에도 위기였다. 게다가 유니폼 판매원이라는 의심을 벗겨낼 무렵 고질적인 무릎 부상으로 ‘2년차 증후’에 걸리지 않나, 맨유에 대형 선수 영입이 필요할 때마다 재정확충용으로 불거지는 옵션 포함 이적설엔 진위와는 상관없이 첫 번째로 이름이 오르내리니 운도 지지리 없다.

주목할 것은, 그동안 그가 위기에 대처하던 자세다. 위기설이 출몰하면 보란 듯이 득점으로 이를 잠재우고야 만다. 지금껏 큰 경기들에서 보여준 결정적 한 방을 비롯해 ‘수비형 윙어’라는 새로운 포지션을 만들기까지 모든 시즌에 걸친 박지성의 ‘미친 존재감’은 절정의 위기설을 정면 돌파한 결과다. 안팎으로 박지성은 언제나 위기였고, 동시에 언제나 위기탈출 중이랄까. 이렇게 그는 위기와 부활의 변증법으로 맨유에서 단련되고 진화했고, 팀의 고비마다 퍼거슨의 히든카드로 중용됐다.

그 사이 이적설에 반대하는 현지 팬들에게 ‘컬트 히어로’라는 훈장도 받았다. 얼마 전 EPL 팬사이트 ‘풋볼팬캐스트닷컴’이 “박지성은 맨유에서 현재와 미래적 효용가치가 있다”면서 숨겨진 영웅이라는 뜻으로 붙여줬다는데, 그의 현재를 고스란히 말해주는 이름이다. 실제로 등 현지 언론들은 박지성이 ‘저평가 우량주’임을 재조명한다. 이런 인식은 동료와 관계자의 발언이나, 팬사이트의 글, 가끔씩 펍에서 울려퍼지는 응원가 ‘박지성을 팔지 마라’(Don’t sell my Park)를 통해서도 확인된다(모든 맨유 선수들에게 까칠하기 짝이 없는 골수팬 영국 친구 녀석 역시 박지성의 헌신적인 팀플레이만큼은 입이 마르게 칭찬하곤 했다. 그게 맨유 스피릿이고 특히 나니가 배워야 할 덕목이라고).

그의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남은 문제는 어느덧 시즌 6년차를 맞은 박지성이 주전이냐 이적이냐, 중요한 갈림길에서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입증하는 것. 그러려면 절대권력 퍼거슨의 로테이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는 게 급선무임을 그가 모를 리 없다. 기회는 언제고 온다. 이제 자신감을 회복했으니 경기력을 끌어올리고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박지성만의 경쟁력을 완성하기 위해 골 결정력과 공격 기여도를 높이라거나, 측면 루트를 개발하라거나, 간혹 맡는 중앙 포지션에 대한 창의력을 키워 ‘센트럴 팍’의 진가를 발휘하라거나, 패스 성공률을 더 높여야 한다거나 등 뻔한 해답용 주문은 잠시 미뤄두기로 하자. 위기론이 반복될수록 팬들 역시 이제 막 위기를 탈출한 그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천하의 루니가 복귀해도 로테이션을 비켜가기 힘든 냉엄한 현실에서 매 경기에 박지성의 선발출장을 기대할 순 없는 일일 터. 숱한 별들이 명멸한 세계 최고 클럽에서 벌써 6년째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새삼스럽게 고맙지 않은가. 이적설 또한 마찬가지. 맨유팬으로서야 박지성이 맨유에 오래도록 남아주길 바라지만, 그가 어디서 어떻게 선수생활을 마무리할지는 오로지 그의 선택에 달렸다. 다만 그의 바람처럼 앞으로 4년 정도 더 뛸 수 있다면, 그 시간이 전성기가 되기를 바란다. 다행인 것은 박지성이 놀라운 영민함과 강인한 정신력, 특유의 성실함을 더욱 빛내주는 겸손함까지 롱런할 수 있는 미덕을 두루 갖춘 선수라는 점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그의 도전과 미덕에 대한 팬들의 신뢰가 여전하다면, 컬트 히어로의 미친 존재감은 계속될 것이다. 박지성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이지안 축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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