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감히 꿈이라도 꿨을까. 대한민국 축구가 세계 정상에 서다니. 말 그대로 어안이 벙벙하다. 환대 속에 개선한 소녀들이 청와대 연회장에서 아이돌 스타 앞으로 달려가 까무러치는 장면을 뻔히 보는 동안에도 쉽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세계 축구 챔피언, 대한민국이라니.
축구는 늘 우리에게 콤플렉스였다. 1등이 아니면 취급도 못 받는 사회에서 축구는 언제나 예외였다. 세계 16등의 성적표를 받고 전 국민이 환호작약하는 분야가 축구 말고 어디 또 있을까. 축구로 세계를 제패하는 일은 그만큼 언감생심이었다.
갑자기 사공이 많아진 여자축구
국제축구연맹(FIFA)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기구다. FIFA 가맹국 수는 현재 208개로 유엔의 192개나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205개보다 더 많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팀이 참가하는 대회에서 한국은 늘 단역이나 조역에 그쳤다. 각급 연령대와 성별을 막론하고 정상의 길은 우리에게 언제나 멀고 또 험한 코스였다. 하지만 우리는 마침내 세계 제패의 꿈을 이뤄냈다. 게다가 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여고생 선수들. 홀대받던 그녀들은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을 딛고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뤘다. 훈련과 경기장 배정에서 남자 선수들에게 우선순위를 빼앗겼고, 남자 축구가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누릴 동안에도 그녀들은 소외된 곳에 있었다. 앞서 20살 이하 청소년 대회에 출전한 여자 선수들의 4강 진출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17살 이하 월드컵이 열린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세렌디피티’(Serendipity·뜻밖에 발견한 행운)나 다름없던 이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갑작스레 사공이 많아진다는 공통된 부작용이 있다. 선수들의 노력 아래 숨겨졌던 불합리한 요소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그때까지 침묵하던 이들의 우려와 한탄이 넘쳐나기 시작한다. 불모지에서 핀 꽃을 보며 감탄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꽃을 피운 불모지를 비난하고 뒤엎으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그동안 성장을 방해하던 요소가 제거되는 일도 있지만, 많은 경우 그 꽃의 뿌리나 이파리가 상하기도 한다. 성과가 있기까지 그 뒤를 묵묵히 받쳐주던, 꽃이 피기까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없이 영양분을 제공하던 이들의 사정은 생각지도 않은 채 쉬운 말과 지나친 행동으로 분위기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여자 청소년 대표 선수들의 세계대회 선전은 분명 놀라운 성과다. 그러나 그간의 과정과 공헌을 잊어도 좋을 정도로 압도적인 성과는 아니다. 이미 아시아의 다른 나라 여자팀들은 연령별 대회에서 한국에 앞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바 있다. 이번 대회 역시 한국 앞의 우승팀은 북한이었다. 또한 2011년 FIFA 여자 월드컵(성인 대회)에서도 한국은 북한과 일본에 밀려 본선 진출권조차 따내지 못했다. 이번 성과에 기대어 그간 묵묵히 한국 여자축구를 이끌어온 이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과도한 상찬과 지나친 흥분이 쏟아내는 말들의 풍경이 불편하게 느껴져서다. 당장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 힘쓸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경계 대상이다. 좋은 성적으로 전국적 감동을 자아낸 데 대한 찬사야 해도 해도 끝이 없을 테지만, 선수들에게 포상급 지급 액수를 높일 것을 요구하는 여론이나 여자축구 전용 경기장과 같은 시설 투자를 강권하는 행위에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대한축구협회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조직이 아니다. 무작정 수익을 내기 위한 사업체는 아닐지라도 정해진 연간 사업을 통해 예산을 짜고 이에 맞는 재정 운용을 통해 한국 축구의 앞날을 설계하는 단체다. 청소년 월드컵에는 성인 월드컵과 달리 별다른 상금이 걸려 있지 않다. 따라서 우승을 했다고 선수들에게 ‘거하게’ 포상금을 ‘쏠’ 입장은 아니다. 기존에 다른 사업을 통해 벌어둔 자금으로 선수들을 격려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협회가 밝힌 일정액의 장학금 지급은 그들이 인색해서가 아니니 그동안 속사정에 무심했던 여론이 부추길 영역이 아니다. 남자 성인 국가대표팀 후원사인 하나은행 쪽에서 장학금을 추가로 지원할 예정이라니 희소식이기는 하지만, 이를 두고 협회의 대처를 비난할 필요까진 없다.
저변을 다져야 지속 가능시설 투자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저변이 넓지 않은 여자축구를 위해 전용 시설 건립에 투자하는 것에는 여러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 오히려 당장의 시설 확충보다는 더 많은 여자 선수들이 축구를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데 더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지 않을까. 현재 대한축구협회에 등록된 여자축구 선수 수는 일본 여자축구의 (선수가 아닌) 등록 클럽 수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선수 수만 놓고 비교하면, 한국 여자축구 선수 수(1400명)는 3만6천 명을 보유한 독일과는 견줄 수준도 안 된다. 6개 실업팀이 전부인 국내 여자 축구 리그인 WK리그는, 지역 리그까지 포함하면 4부 리그 수백 개 클럽이 경쟁하는 독일 여자축구 리그 시스템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더 체계적이고 항시적인 리그 운용이 확보돼 학생 선수들이 사회인이 된 뒤에도 직업적으로 공을 찰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시설만 늘리는 건 불필요한 투자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은 여자축구의 미래에 대한 장기적 청사진이다. 우리 여고생들이 세계 수준의 기량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적인 성과지만, 이처럼 소수의 정예 멤버들을 숙련시켜 국제대회에서 성과를 거두는 것이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전문 스포츠는 이를 직간접적으로 즐기는 인구가 확대될 때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 엘리트 선수들의 국제 무대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플레이를 즐기고 공유하는 인구가 늘어나지 않는다면 꾸준한 성장은 어렵다. 대학팀과 실업팀을 비롯한 팀 창설의 증대와 선수들이 학업에 시간을 배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는다면 저변 확대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소녀들의 성공을 음미하며 그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들의 업적을 만들어낸 전문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이다.
서형욱 문화방송 축구해설위원